[한겨레]
적멸궁도 나그네도 은빛세상에 포∼옥 안기다
정암사가 눈에 덮였다. 적멸궁도 수마노탑도, 수마노탑 오르는 돌계단도 흰 눈에 덮여 적막하다. 매운 산바람에 날리는 눈가루가 수마노탑 서른 두개의 풍경을 때려서 함백산 산골짜기는 온통 은빛이다. 1300여년전 자장 스님이 주목나무 지팡이를 짚고 서서 바라봤을 풍경이다.
강원 남부지역 최고봉인 함백산(1573m) 서북쪽 자락, 남한강 최상류 지류 중의 한 물줄기가 시작되는 산골짜기에 천년고찰 정암사(淨岩寺)가 들어앉아 있다. 아담하고 정갈한 이 절집의 겨울 풍경이 더욱 희고 적막한 것은, 이곳까지 굽이굽이 닿아 있는 길과 세월이 석탄빛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북·고한 등 탄광지대를 통과해야 다다르는 산골이다. 탄광이 전성기를 이뤘던 1960~80년대 정암사는 고된 노동에 지친 광원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절 부근 마을에 폐가로 남아 있는 광원들의 대규모 숙소 등이 번창했던 탄광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석탄빛 여전한데 광원들 간데없고
정암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이 만년에 창건(645년)하고 입적까지 한 절이다. 자장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갔다 돌아오며 부처님의 진신사리(정골·치아·불사리 등)를 들여와 황룡사·대화사·통도사 등 여러 절에 나누어 모셨다고 한다. 이 때 들여온 진신사리를 모신, 현전하는 적멸보궁이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 등 다섯 곳이다.
들머리 마을 이름이 갈래인데, 자장이 처음 사리를 모실 탑의 자리를 이 마을에 잡자, 눈 위로 세 줄기의 칡이 솟아올라 지금 수마노탑 자리까지 뻗어왔다고 한다. 여기서 갈래(葛來)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탄허 스님이 썼다는 ‘태백산 정암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산기슭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간과 그 너머로 높고 낮게 들어선 건물들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절은 골짜기 물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먼저 물길을 건너기 전에 만나는 것이 선불도량인 육화정사(요사채)와 범종각, 관음전 등이다. 일주문을 포함해 다 최근(1970년대)에 지은 것들이고, 탐방객을 잡아 끄는 정암사의 정갈한 보석들은 물길 건너에 있다. 범종각 옆 극락교를 건너면 오래된 주목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르며 서 있고 그 뒤로 단아한 자태로 들어앉은 건물이 적멸궁이다.
흰 눈을 두껍게 받은 청기와 지붕 아래 빛바랜 단청과 낡아가는 기둥들이, 자장 스님이 꽂은 지팡이가 자라올랐다는 주목, 주변의 아름드리 전나무들과 어우러져 천년 세월을 보듬어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지금의 적멸궁은 1770년 중창된 뒤, 1858년과 1919년에 중수를 거친 건물이다.
여느 적멸보궁이 그렇듯이 부처를 모시지 않고 있는데, 현판에 ‘보’ 자를 빼고 적멸궁이라고만 적고 있는 점이 다르다. 적멸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열반)를 한자어로 적은 것으로, ‘열반에 든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보배로운 궁전’이 적멸보궁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리는 적멸보궁에 모시지 않고 그 뒤쪽에 탑이나 계단(戒壇)을 쌓고 모신다. 적멸궁 뒤 천의봉 자락 높직한 언덕에 사리를 모신 수마노탑(국보 410호)이 있다.
저 주목은 지장스님 지팡이의 현신?
범종각 쪽으로 돌아나와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너 수마노탑으로 오른다. 오래된 돌담 흔적이 남아 있는 전나무숲에서 시작되는 이 가파른 산길은 정암사가 간직한 아름다운 유산 가운데 하나다. 산길은 200m가 채 안되지만, 가파른 돌계단 길이어서 눈이 많이 내리면 출입을 막기도 한다. 돌계단이 꺾이는 곳들에서 몇 차례 다리를 쉬어가며 오르면 탁 트인 경치를 내다보고 서 있는, 높이 9m의 7층 모전 석탑 수마노탑에 닿는다.
일주문과 절 마당이 아득히 내려다보이고, 갈래 마을 쪽의 눈 쌓인 산줄기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마노석으로 쌓았다는 탑인데, 동해 용왕이 돌의 물길 운반을 도왔다 해서 앞에 수(水) 자가 붙었다.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걸린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잡티 없는 맑은 소리를 들려준다. 1713년부터 1874년까지 네 차례 탑을 중수했다고 기록된 5장의 석판과 사리장치·염주알·금합·은합 등이 1972년 해체 복원할 때 탑에서 발견됐다. 지금 탑은 1995년 다시 해체 복원한 것이다.
내친김에 만항재까지 가볼까나
정암사에 딸려 있던 암자로는 자장 스님이 입적한 조전과 삼지암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 자리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함백산 자락엔 적조암·심적암 두 암자가 남아 있다. 절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물은 열목어 서식지(천연기념물)다. 정암사엔 주지 정광 스님과 절을 관리하는 도감 덕진 스님 등 5명이 머물고 있다. 덕진 스님에게 물으면 귀찮아하지 않고 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암사까지 차를 몰고 온 공력을 생각하면, 정선·태백·영월 땅이 갈리는 만항재까지 올라보지 않을 수 없다. 해발 1330m의 고개로, 넘어가면 태백시 혈동과 영월군 상동읍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고개 정상엔 휴게소가 있다. 여기서 장쾌한 전망을 자랑하는 함백산 정상까지 차로 오를 수 있으나, 매우 가파른 시멘트길이 얼어 있는 경우가 많아 체인을 감아도 위험하다. 만항재 고갯길도 눈이 쌓이거나 얼어붙어 있으면 체인없인 오를 수 없다.
꼬마열차 타고 칙칙폭폭 아우라지까지 눈 눈 눈
눈 덮인 정선 산골에서 체험해볼 만한 것으로 꼬마열차를 타고 즐기는 설경 감상이 있다. 정선 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아우라지 뱃사공들이 한강으로 운반할 뗏목을 띄우던 출발점 아우라지로 가는 추억의 열차다. 증산역에서 아우라지역(옛 여량역)까지 기관차와 발전차에 객차 1량(45인승)을 단 ‘정선 아우라지 관광열차’가 하루 세차례 왕복운행한다. 38.7㎞ 거리를 50분에 걸쳐 달리는데, 자그마한 역들을 거치며 동남천·어천 등 조양강의 지류와 본류의 강풍경과 심심산골의 눈경치를 맛볼 수 있다. 차창밖 경치도 아름답지만, 열차를 이용하는 산골 할머니·할아버지들과의 구수한 대화도 소중한 체험이다. 증산·별어곡·선평·정선·나전·아우라지 등 6개의 역 가운데, 증산역·정선역말고는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다. 열차 안에서 승무원이 표를 끊어준다. 송천·골지천이 만나는 곳인 아우라지엔 지금 세 개의 섶다리가 연결돼 놓여 아름다운 설경을 빚어내고 있다. 본디 정선선은 1967년 석탄을 실어나르기 위해 구절리까지 개통해 운행하던 열차였다. 구절리 탄광이 문닫은 뒤에도 주민들의 편리한 이동 수단이자, 학생들의 통학 수단으로 이용됐다. 종착역이었던 구절리까지의 구간이 폐쇄되고, 차량 내부가 카페식 유람열차로 개조된 지금에도, 정선읍을 오가는 주민들과 통학생들의 발로서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정선군은 폐선된 아우라지역~구절리역 구간을 오는 4월부터 철로 자전거(레일 바이크) 코스로 활용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삼을 계획이다. 7.2㎞ 거리를 시속 13㎞ 속도로 직접 페달을 밟아 운전해 오가게 된다. 2인승·4인승짜리 50대가 운행된다. 구절리역 주변엔 폐객차를 이용한 카페 등 쉴곳과 인라인스케이트장·클레이사격장 등 레포츠 시설을 설치하게 된다. 유람열차 운행시각 증산역 출발 06시45분·14시·18시15분, 아우라지역 출발 08시31분·15시51분·19시30분. 어른 1200원, 어린이 600원. 정선/글·사진 이병학 기자 3Dleebh99@hani.co.kr">leebh99@hani.co.kr
정선 여행정보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 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나들목~38번국도~영월~신동~사북~고한~상갈래. 강원랜드 입구 지나 상갈래에서 38번 국도 버리고 우회전(414번 지방도), 만항재쪽으로 2.6㎞ 지점에 정암사가 있다.
정암사에서 만항재 정상까지는 5.5㎞,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3㎞.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이용할 경우 고한역에서 내려 정암사까지 택시로 10분(5000원 안팎), 구의동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면(6시간30분 소요) 고한터미널에서 내려 하루 네번(07시·10시20분·14시35분·19시) 있는 시내버스로 정암사까지 간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정선5일장 열차는 3월부터 운행된다.
정암사 못미쳐 고한·사북읍에 황태국·청국장 등을 내는 집들이 많다.
정선군청 부근 동박골식당(033-563-2211)은 곤드레나물밥을 잘한다.
아우라지역(여량역) 옆 옥산장(033-562-0739)에선 감자옹심이·범벅·송편·전 등 감자요리 종합세트(1만5000원)를 낸다. 굴피집과 수석 전시장에 진열된 1000여점의 각양각색의 수석들도 볼거리다.
주인 전옥매 할머니가 주변에서 모은 수석이다.
사북·고한·증산의 여관들이 많다. 4만원 안팎. 강원랜드(033-590-7700)가 운영하는 고한 골프텔은 10만원(2인 조식 포함)부터. 특1급인 메인카지노호텔도 있다.
정선군청 관광문화과 (033)560-2390.
정암사 (033)591-2469.
증산역 (033)591-106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