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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8974565367(8974565366)
272쪽
141 * 210 * 25 mm /450g 

책소개이 책이 속한 분야

30여 년 간 미국 뉴저지에 살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장은아의 두 번째 장편소설 『성북동 아버지』가 출간되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출간된 『성북동 아버지』는 코로나로 지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위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심각한 아동학대 문제가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현실 앞에서 더욱 사랑이 필요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수혜가 20여 년 미국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자신이 잊고 싶었던 고국을 다시 찾으며 시작된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있던 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과거를 또렷하게 마주하게 된 수혜는 차분히 그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하나의 사건 속에는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진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크게 들리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미세한 소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곳에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니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지난 세월의 상처가 있었다. 오랜 세월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서,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마주 대하게 된 수혜는 비로소 자신의 지나온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서야 수혜는 자신이 결코 버려진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을 처절하게 지켜준 사람들이었으며,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사랑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갈구할 뿐이다. 문학에서도 사랑은 소멸된 채, 건조하고 척박한 광야만이, 잘려나간 흑백필름처럼 뒹굴고 있다. 『성북동 아버지』에서, 억울할 수 있는 세상의 지탄과 불명예를 평생 소리 없이 감내하면서, 은밀하게 사랑을 실천해 나간 ‘성북동 아버지’는 사랑 없는 이 시대의 영웅이다. 그에게 감동과 감사를 보낸다. 아울러 그의 딸로 성장하여 온갖 역경을 버텨가며 떳떳한 사회인의 자리에 앉은 주인공 수혜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난 속에서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장면 또한 감동적이다. 사랑은 주어짐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_김주연 (문학평론가)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여섯 살 ‘수혜’는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여자였다. 그녀가 성장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모두 지웠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는 되돌리고 싶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기억 하나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동안 그녀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돌아본 자신의 삶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한 번도 버려진 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인 줄만 알았는데, 보이지 않은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과 사랑으로 지켜진 삶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상처는 사람에게서 온다.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존재도 사람뿐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상처라고 여겼던 여자가 있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낯선 대문 앞에 자신을 버렸다. 아버지는 멀리 있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온몸과 가슴에 여자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넣고 싶었던 남자도 떠나갔다. 이 여자가 사람에게서 희망과 사랑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마술일까, 기적일까.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마술이 펼쳐지고 일상은 기적이 되는 것일까. 한 호흡에 숨 가쁘게 읽히는 이 여자의 서사는 사람이 곧 사랑임을 일깨우는 따스한 마술이다. _ 조용호 (소설가)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세상에 버려진 모든 ‘수혜’들에게 당신은 버려지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당신이 사는 그 힘겨운 나날들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누군가의 사랑으로 지켜진 날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해야 할 때라는 것을.
‘사람’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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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장은아

작가 정보 관심작가 등록

현대문학가>소설가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0년 미국에 와서 현재 뉴저지주에 살고 있다. 2002년 《뉴욕 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미주 〈한국일보〉 단편소설 당선. 2003년 재외동포 재단, 제5회 ... 더보기

장은아의 다른 작품

목차

추천사
작가의 말

오래된 기억 …… 13
기억의 첫 장 …… 17
두렵고도 서러운 일 …… 38
첫 만남 …… 70
운명 …… 90
운명의 기로 …… 107
엇갈린 운명 …… 120
운명의 역습 …… 139
이별, 그리고 만남 …… 165
살아야 할 이유 …… 184
핏줄의 힘 …… 207
오래된 진실 1 …… 219
오래된 진실 2 …… 231
성북동 아버지 …… 237
아직 못 다한 이야기 …… 250
사람이 사랑이다 …… 259

출판사 서평

[줄거리]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고모의 연락을 받고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된 수혜는 애써 지워내고자 했고, 까맣게 잊은 줄로 알았던 지난 세월의 기억과, 아프고 서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수혜는 여섯 살 때까지 장애가 있는 엄마와 강원도 사북에서 살았다. 가난과 이웃들의 멸시 속에서 어렵게 홀로 딸을 키우던 애란은 호적이 없는 수혜의 학교 문제로 결심을 하고, 낯선 집 대문 앞에 수혜를 버려두고 떠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에 낯선 곳, 낯선 대문 앞에 엄마에게 버려진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서 있는 일은 참으로 막막하고 두렵고도 서러운 일이었다. 한 번씩 고개를 빼고 혹시나 엄마가 다시 나를 찾아올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엄마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곁에 두고 울고 서 있는 내가 이상한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렸다. 부끄러워진 나는 대문 옆 담벼락 쪽으로 몸을 돌려 쪼그려 앉았다. _본문 중에서

엄마에게 버려진 낯선 집은 고모의 집이었으며 갑자기 나타난 수혜로 고모와 식구들은 놀랐지만, 식구들은 어린 수혜를 따뜻하게 대했다. 얼마 후 처음 만난 아버지를 따라간 성북동 집에는 성북동 어머니와 갓 태어난 동생이 살고 있었다. 어린 수혜는 자신을 대하는 성북동 어머니의 불편한 태도를 보면서 이곳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혜는 성북동에서 살지 못하고 다시 시골 고모 집으로 돌아왔다. 수혜의 의심스러운 출생을 두고 소문이 무성한 탓에 시골에서도 항상 외톨이였다. 특히 태완의 엄마 무실 댁의 수혜를 향한 증오는 그녀의 무의식중에 수혜를 혼외자로 낳은 애란과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 간 첩실을 동일시했기 때문이었다. 수혜는 그런 무실 댁의 아들 태완을 좋아하게 되고 슬픔을 안고 사는 태완을 향한 동질의식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했다. 사춘기 시절 마을 뒷산에서 마주친 수혜와 태완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게 되고, 태완이 집에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재확인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운명의 끈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거처를 옮긴 수혜는 태완과 비밀스러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온전한 자유와 행복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햇살처럼 밝은 성격의 세아가 나타났다. 수혜의 유일한 친구인 세아는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수혜는 세아의 그런 재주가 부러웠다. 그로 인해 태완이 흔들리는 것이 불안하지만 수혜는 단짝 친구인 세아에게 태완과의 관계를 밝히지 못했다. 자신과 태완의 관계가 무실 댁 앞에서 비밀스러워야 했던 탓도 있었지만, 태완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자신에게 간절하고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내가 말했지. 그건 너를 잃게 될까 두려워서였어.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모두 나를 떠났어. 그게 무엇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우리 엄마도 나를 버렸고, 나를 지켜주겠다던 성북동 아버지도 나를 지켜주지 못했어. 내 동생들 정혜와 신혜에게는 여전히 아버지이면서, 내게는 언제나 먼데 있는 타인 같았어. 그렇게 간절히 빌었는데. 그렇게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는데. 내가 좋아하던 머리핀, 예쁜 지우개, 연필.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건 모두 잃어버렸어. _본문 중에서

무실 댁이 수혜와 태완의 관계를 알게 되고, 태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실 댁은 목을 매어 죽겠다고 협박했다. 태완은 그 일로 더는 수혜와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태완은 수혜의 눈빛에 감도는 슬픔 속에서 엄마 무실 댁의 슬픔이 보여서 괴롭고 심신이 지쳐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김살 없이 밝고 환한 세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태완은 수혜를 버리고 세아와 결혼하여 독일로 떠났다. 더는 세상을 살아낼 의욕을 잃어버린 수혜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탈진하여 의식을 잃게 되지만, 삶의 마지막 끈을 놓고 멀어지려는 수혜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주는 정섭과 만나게 되었다. 늘 따뜻하게 감싸주고 수혜의 모든 상처도 함께 품어줄 수 있는 정섭의 사랑을 받아들인 수혜는 정섭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수혜는 마흔을 훌쩍 넘겨 고국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예전의 상처를 하나씩 되짚어갔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성북동 어머니의 마음을 중년이 된 수혜는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옷을 정리하던 수혜는 아버지가 마지막 입었던 옷 속에 자신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함께 찍은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수혜는 자신이 결코 버려진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을 처절하게 지켜준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닫기

이상문학상 손홍규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

 

첫 중편소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로 수상

 

                          이상문학상 대상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의 손홍규 작가
이상문학상 대상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의 손홍규 작가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제42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의 손홍규 작가가 8일 오전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이상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18.1.8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이다."

제42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소설가 손홍규(43)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수상작품집에 수록될 문학적 자전의 마지막 문장이며 제 모든 것이 담겼기에 다시 한 번 인용한다"며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수상작은 중편소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의 플롯은 인물들의 '마음의 구조'를 탐색하는 과정"이라며 "앞으로도 '마음의 구조'를 더듬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소설가는 소설쓰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더는 비참한 곳이 아니게 될 때까지 소설가는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소설가는 세계의 비참과 동행하여 세계가 더는 비참해지지 않는 곳에서 사라질 운명이므로 이 운명을 앞으로도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그는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해 21세기 한국문학의 흐름과 작품 활동의 궤를 같이 해오며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 '이슬람 정육점',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그 남자의 가출' 등 많은 작품을 냈다.

 

 

그동안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을 받기도 했지만, 이번 이상문학상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인 듯했다. 이 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 주간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가 수상작에 찬사를 보내며 소개하자 그는 눈시울을 살짝 붉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미리 준비해온 수상 소감을 읽어내려갔다.

  그는 여러 문학 스승과 문우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마지막으로 아내와 다섯 살 난 딸에게 감격 어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따로 작업실이 없는 저로서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홀로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한 달간 아내와 딸아이를 처가로 보내고 홀로 집을 지키며 소설을 썼습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아내와 딸까지 멀리 보내고 이러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고 그러기에 더더욱 최선을 다해 써야 한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와 더불어 한생을 건너가는 아내와 딸에게, 소설가의 아내와 소설가의 딸로 소설가보다 소설가답게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두 사람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크게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부부인 영택과 순희의 현재 모습에서 출발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사 구조를 띤다. 일용직, 비정규직으로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관계는 현재 멀기만 하다.

  작가는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마치 꿈을 잃듯이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만다. 그러기에 그들 내부에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이 질문의 대답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마음이 상처받기 이전으로 갈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을 따라가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옮겨 놓은 게 바로 이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책인 '나, 여성 노동자2- 2000년대 오늘 비정규직 삶을 말한다'와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일하다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를 참고했다고 한다.

심사위원회를 이끈 권영민 교수는 "이 소설에는 파업의 현장이라든지 현장을 단속하는 용역들이 가해온 노동자들에 대한 엄청난 폭력 같은 것들이 포함돼있는데, 그 자체가 부각되진 않고 아주 감춰져 있다. 그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주인공의 내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고 소개했다.

  또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정공법의 접근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그 배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관계와 내밀한 의식의 문제를 다룬다. 폭력의 문제가 다른 어떤 방법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에 대한 확인을 통해 가능하다는 작가의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소설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가의 진지한 소설적 실험과 성취가 놀랍다"고 평했다.

이상문학상은 지난 한해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우수작으로는 구병모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방현희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 정지아 '존재의 증명', 정찬 '새의 시선', 조해진 '파종하는 밤' 등 5편이 뽑혔다.

시상식은 오는 11월에 열릴 예정이며 상금은 대상 3천500만 원, 우수작 300만 원이다. 수상작품집은 이달 19일께 출간된다.

mina@yna.co.kr

 

교수님 축하합니다.^^

재학시절 <현대소설창작론> 강의 시간에 남달리 학생들에게 꼼꼼하게 챙겨주시고 매주 강의가 끝날 때마다 주어진 3~4편의 단편소설을 읽고 창작이론에 근거하여 작품을 비평(론)하여 과제를 제출하라는 혹독한(?) 모습이 참 감사하게 느껴져 늘 마음에서 잊히지 않습니다. 학생들과 토론도 서슴지 않고 언제나 성심성의를 다해 질문에 답해주시던 교수님. 집필실이 따로 없어 가족들을 부모님 댁으로 보내고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짠했습니다. 추위에 떨어보지 않고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우리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소외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작가는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작가 정신을 늘 강조하시며 수업에 인용하는 국내외 소설도 작가의 색채가 뚜렷한 작품만을 엄선하여 다뤄주셨죠. 졸업 후에도 교수님 강의를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듣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상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리면서 책 나오면 꼭 구입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아 참, 그때 비평도 잊지 않겠습니다. ㅎㅎㅎ(옮긴 이: SDU 2014760000) 

 

봄내지기2020.05.08 15:57

이 글은 수상 당시 저의 일터 홈페이지 카페에 올렸던 글을 다시 이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참 꼼곰하고 타이트하게 가르쳐 주시던 교수님, 요즘도 변함없으실 테죠. 시간이 허락하면 교수님 강의만 시간제 강의로 따로 신청하여 듣고 싶습니다.

 

 


작별10점
한강 외 지음/은행나무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한강 〈작별〉

존재와 소멸의 슬프면서 아름다운 경계에 대해 말하다!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작별》 출간 

“존재와 소멸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경계”라는 심사위원단의 격찬을 받은 작가 한강의 〈작별〉을 표제작으로 한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출간되었다.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소설가 김유정의 문학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김유정문학상은, 지난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모든 중·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별하여 시상해온, 현재 한국문학의 의미 있는 흐름을 짚어보는 계기가 되어왔다. 젊은 평론가들의 예심을 통해 스무 편의 중·단편소설들이 본심에 올랐고 소설가 오정희, 전상국과 문학평론가 김동식 세 명의 본심 심사위원의 치열한 논의 끝에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한강의 소설 〈작별〉이 선정되었다.

 

어느 날 깨어보니 눈사람이 되어버린 그녀,

조금씩 부스러지고 조끔씩 녹아내리다

수상작 〈작별〉은 겨울의 어느 날 벤치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고 보니 눈사람이 되어버린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눈으로 뭉쳐진 육신이 점점 녹아 사라지는 운명. 그런 운명 속에서 그녀의 삶에 얽힌 관계들과 작별하는 과정을 단아하고 시심 어린 문장으로 그려놓았다. 그 변신의 놀라움이 차츰 자연스러움으로 변해가고 충격이 더 이상 충격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우리는 과연 복잡하게 엮인 관계들과 어떤 작별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물로 흘러 녹아 사라지고 말 운명.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존재와 소멸의 경계 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쓸쓸한 운명에 관해 한강은 소설의 서사를 빌려 아름답고 슬프게 재현해놓았다.

 

이토록 아름답고 슬프게 사라져버린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어느 날 예측하지 못한 어떤 일이 갑자기 일어나버렸다. 다른 징조도 그 어떤 특별한 신호도 없었다. 그냥 보통의 하루, 매일 산책하는 천변의 어느 벤치에 앉아 약속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겨울날 야외에서 잠이 오다니. 여기서 잠들면 안 되지, 생각하는데” 그녀는 정말로 잠들어버렸다. 깨어보니 그녀는 새로운 몸―눈사람―으로 변했다. 단단하고 고요한 눈 덩어리로 부감되는 그녀의 몸. 그 몸에서 한 군데 다른 부분이 있다면 왼쪽 가슴, 심장이 있던 자리다. 예전처럼 박동하진 않았지만 미미하게 따뜻할 뿐이다. 그녀는 변해버린 몸에서 유독 그 심장의 미온만을 자각했다.

 

그녀는 7살 연하의 가난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고, 그녀는 눈사람이 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눈사람이 된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긴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이미 그녀는 세상에서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고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사직을 권유받은 후 그녀는 사물처럼 사무실에 앉아 있었고 사물처럼 지하철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다고, 그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눈사람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몸에 대해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조금씩 흐릿해지는 손과 발의 경계들. 서서히 지워지는 그녀의 뺨과 눈과 콧날의 윤곽들. 그 사라짐들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었다. 연인의 손을 맞잡을 수 있고, 입술을 포갤 수 있었다. 다만, 맞잡은 손은 더 빨리 녹아 사라졌고 그녀의 입술과 혀는 더 빠르게 녹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오늘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냉동창고에 들어가도 허사였다. 이미 사라지고 녹은 육신을 보존해서 무엇 할까. 갑자기 변했으니 또 갑자기 되돌아올 수 있지도 않을까. 둘러싼 모든 것과 작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아이와 끝말잇기를 하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걸고, 남동생에게 연락하고자 한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좀 더 녹아 사라지는 중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혼자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삶이라고 불렸던 몇 십 년의 시간에 대해.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나의 모든 것이 흥건한 물웅덩이로 남는다면? 그녀는 억울하지 않았다. 후회스러웠으나 후회는 없었다. 그냥 끝, 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고요하게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소멸이라는 운명을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으로 받아들였다.



출처: http://boookworld.tistory.com/1862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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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성님께서 수고해주셨어요^^

출처 : 장영희 교수님 팬클럽
글쓴이 : 파란 원글보기
메모 :

참 그리운... 보고 싶은 분입니다. 따스한 글로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셨던 장영희 교수님.

김영주 시인의 '편도(片道)

詩 해설 정수자 시인

2018-01-19 15:12:25 ㅣ최종 업데이트 : 2018-01-19 15:13:16  ㅣ 작성자 :    e수원뉴스
김영주 시인의 '편도(片道)'

김영주 시인의 '편도(片道)'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오늘날의 삶을 집약하는 말이다. 여차하면 빌딩 숲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겪는 게 많은 고향들의 현실이니 말이다. 그러니 고향이 거기 있어도 더 이상 고향은 아닌 것. 그곳에 쌓인 웃음과 울음과 노래들은 다 어디다 버렸는가. 

그런 고향집 시간의 층을 되짚는 김영주(1959~) 시인은 2009년 ‘유심’으로 등단, 시집으로 ‘미안하다, 달’과 ‘오리야 날아라’를 펴냈다. 오늘날이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시화(詩化)를 통해 지금 이곳의 정형시적 영역을 넓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원 출신답게 수원에 대한 작품을 간간 쓰며 지역의 문화판에도 적극 참여 중이다.

대부분 고향을 잃고 사는 오늘날. 어머니를 잃은 것만큼이나 크나큰 상실이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를 ‘고등동집’에서 보내드렸나 보다. 자신의 손때 묻은 집에서 노년을 보낸다면 그것만도 얼마나 복인지, 아파트공화국 주민이라면 더욱 절감한다. 다름 아닌 ‘고등동’이라 가능했을 텐데 그 ‘앞마당 수수꽃다리 그늘 아래’ ‘다리 저는 평상’이라면 가족이며 이웃까지 함께 즐긴 추억의 집적소겠다.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던 ‘먼 산’으로 결국 가신 뒤, 긴 흔적을 자식은 그저 ‘눈물로’ 좇아볼 밖에…

돌아보면 부모님들은 ‘편도 차표 한 장’ 들고 ‘먼 여행 길’을 다 뜨신다. 예전 고향에서는 그런 이별 앞에서 예를 더 각별히 갖추고 온 동네 사람이 함께했다. 수원 시내라 농촌 같은 동네 장례는 아니었겠지만, 식구와 함께 웃고 울었던 ‘고등동집’도 온 마음을 다해 안주인을 보내드렸으리라. 그런 어머니 속은 딸이 더 잘 알게 마련이니 ‘어머니 앉아가신 자리에/어머니처럼’ 오래 앉아 있는 까닭이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야 출세한다고, 그래야 더 큰사람으로 더 넓은 세계에 선다고, 등 떠미는 말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 ‘못난 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로 깊은 뿌리의 힘을 보여주는 전언도 전한다. 수원 웬만한 곳은 다 아파트숲을 이뤘는데 고등동이 아직 옛집들과 함께 있는 것은 개발이익이 적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구러 흔적만 남은 고향이라도 옛집을 찾아 가볼 수 있는 곳들은 어우렁더우렁 사람 사는 마을로 다시금 잘 살려 가면 좋겠다.  

요즘 뜨는 ‘마을 살리기’ 건축 운동이 있다. 획일적인 아파트군단 말고 오래된 동네다운 단장으로 거듭날 고민을 주민들이 함께하는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 같은 마당 넓은 ‘평상’ 집들을 지킨다면, 더불어 사는 이곳의 즐거움도 더 크지 않겠는가. 
 
김영주 시인의 '편도(片道)'

시해설 정수자 시인의 약력



출처 : 오토오아시스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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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벽은 문이다/정호승



  영화 '해리포터'를 떠올리면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열한 살 고아 소년 해리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 킹스크로스역 벽을 뚫고 들어가던 장면입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차단된 벽 속으로 해리가 성큼 발을 내디뎌 들어서자 벽 속에는 마법학교로 가는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승강장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저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것은 벽이 문이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모든 벽 속에는 문이 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벽은 항상 굳게 막혀 이곳과 저곳을 차단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벽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에게도 '해리포터 시리즈'는 인생의 벽 앞에서 작가 자신이 연 용기의 문이었습니다. 이혼 후 어린 딸을 데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벽 앞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해리포터를 씀으로써 벽을 문으로 만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제 인생의 벽 앞에서 돌아서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벽을 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꿈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어서, 내 인생이라는 시간을 내가 주인이 되어 오로지 시를 쓰는 일에 사용하게 되는 것이어서, 잘 다니던 직장을 두 번이나 스스로 그만둔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회에 나와 국어교사 생활을 3념 넘게 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남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갈수록 큰 고통으로 다가와 아무런 대책 없이 그만둬버린 일이 그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오랫동안 잡지사 기자 생활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그만둔 일입니다. 당시 제 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가장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늘 생계라는 벽에 가로막혀 번번이 되돌아서곤 했습니다. 좀처럼 그 벽을 뚫고 나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흔한 살 되던 해에 사라져가는 그 꿈을 찾고 싶어 친지들 모두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나마 벽을 뚫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류 중에는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삶의 벽 앞에서 문을 여는 존재입니다. 독소리의 평균 수명이 인간과 비슷한 까닭은 늙음과 죽음의 벽 앞에서 독수리가 스스로 새 삶의 문을 열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는 30년 좀 넘게 살게 되면 무뎌진 부리가 자라 목을 찌르고 날개의 깃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합니다. 날카롭게 자란 발톱마저 살 속을 파고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뼈를 깍는 고통의 과정을 밟아 새롭게 태어날 것인가 선택하게 됩니다. 만일 새 삶을 선택하면 6개월 정도 먹는 것도 포기하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합니다. 높은 산정에 둥지를 틀고 암벽에 수도 없이 부리를 쳐 깨트리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새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부리가 나면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고는 그 새 부리로 낡은 날개의 기털도 뽑아내고 새 깃털이 자라 날개짓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때 독수리의 몸은 피범벅이 됩니다. 그런데도 독수리는 그 고통의 벽 앞에서 자신을 전부 새롭게 갈고 새 삶의 문을 엽니다. 만일 독수리가 벽 속에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면 결코 인간과 같은 수명을 누리는 새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벽 앞에서 내일이라는 새로운 삶을 위해 독수리처럼 선택과 결단의 문을 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독수리와 같은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2007년에 말기암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마지막 강연'이라는 동영상을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던진 미국의 랜디 포시 교수는 인생의 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벽이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준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앞에 멈춰 서라는 뜻으로 벽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인생의 벽을 절망의 벽으로만 생각하면 그 벽 속에 있는 희망의 문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벽을 벽으로만 보면 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능한 일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벽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보면 결국 문이 보입니다. 벽 속에 있는 문을 보는 눈만 있으면 누구의 벽이든 문이 될 수 잇습니다. 그 문이 굳이 클 필요는 업습니다. 좁은 문이라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넓은 희망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 지니고 있어도 그 문을 굳게 닫고 벽으로 사용하면 이미 문이 아닙니다.


  문 없는 벽은 없습니다. 모든 벽은 문입니다.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벽 없이 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쓴 시 '벽'을 함께 읽으면서 내 마음의 벽에 있는 문을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벽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 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원문 발췌 자판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앗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다섯살 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여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여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자식에게 볼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기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

 

 

 

[아버지의 추억] <20> 시인 손택수

아들과 대중탕 못 간 이유, 이제서야…
40년간 지게일로 시커멓게 죽은 등…병수발 때 드러나

아버지의 추억 

  누가 물으면 여섯 살이라고 해야 한다. 알았지? 어머니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꼭 이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싫어요.’ 목젖까지 올라오는 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네” 하고 시무룩하게 대답을 해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정색을 하고 거듭 확인 절차를 거치곤 하셨다. 너, 몇 살이니? 여섯 살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목욕가방을 챙기셨다. 그러면 옆에서 또랑또랑한 두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누이동생들이 마구 놀려대기 시작했다. 오빠는 거짓말쟁이래, 거짓말쟁이. 우리 오빠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대요.
  주말마다 한 번씩 목욕탕에 가는 게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머니와 공범이 되는 것도 싫었고, 앙큼한 누이들에게 매번 꿀밤을 먹이면서 싸우는 것도 싫었다. 속으론 여섯 살, 여섯 살 하고 몇 번이나 되새겼는데 잔뜩 긴장한 목에서 내 의지와는 정반대로 저번처럼 갑자기 여덟 살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내 고추를 잡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정말 여섯 살 맞니?’ 하고 묻던 그 돼지 같은 아줌마를 또 만나면 안 되는데, 이런 공포감에 떠는 것도 싫었다. 다른 애들처럼 내놓고 뛰어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하게 목욕탕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온갖 찜부럭이 다 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아버지 탓이야.’ 급기야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따라다닐 수 없을 만큼 커버린 뒤론 하릴없이 혼자서 목욕을 다녀야 했다. 여탕의 악몽에서 해방된 게 나는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도 잠시뿐이었다. 여탕을 벗어난 것까진 좋았는데 남탕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끙끙거리며 때를 밀 때마다 함께 와서 등을 밀어주는 부자(父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매번 등 밀어줄 사람을 탐색해야 하는 내 처지란 것이 생각하면 참 딱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졸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 중에서). 그랬다.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지 않는 이상한 위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꽤 오랫동안 적대감을 부러 숨기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뭔 놈의 소설 시 나부랭이냐 이놈아, 늬 애비가 시장에서 지게질 하고 번 돈이 어떤 돈인데!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오셔서 하는 푸념을 나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술주정을 대놓고 저주하곤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건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걸, 술힘을 빌리지 않곤 지게를 질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노쇠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알코올성 간경화 말기로 아버지가 쓰러져 누웠을 때 나는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보았다. 40년 가까운 지게 짐에 화인처럼 찍힌 자국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자국이었고, 아들에겐 더군다나 어떤 식으로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관장을 하고 아버지가 아기 때의 내게 그랬듯 나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다. 그리곤 아버지를 업고 병원 욕실을 찾았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적막한 등짝이 드러났다. 아버지,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 지게 자국이 제겐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과 같아요.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아버지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삶의 무게들을 비로소 쓰다듬기 시작했다.

▲ 손택수는…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당선돼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등이 있다.

 

출처: 아버지 학교

편집 겸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이 시는 한국전쟁을 치른 뒤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기까지 이어진 아버지 세대의 삶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엔 싸한 아픔이 밀려온다. 평생 지게를 지고 농사일에 파묻혀 새우등이 되도록 허리 한번 마음껏 펴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홀연히 찾아온 중풍으로 3년 9개월 동안 기어 다니셨던, 육 남매 낳아 기르며 고생하시다가 생의 끝자락을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하셨던 아버지. 몸이 무거우면 하늘로 오르지 못하실까 봐 그러셨을까. 끝내는 누워서 자신의 몸뚱이까지 어린 새끼들에게 다 나눠주고 떠나는 거미처럼 살가죽이 뼈에 맞닿은 뒤에야 벽제 승화원에서 지게 자국을 지우고 하늘로 떠나신 나의 아버지.ㅠㅠ

 

  어린 시절 여름날, 아버지가 집 뒤 울 옆으로 흐르는 도랑 가에 엎드려 누나들이 씻겨드리는 등목을 하실 때면 등과 어깨엔 평생 숙명처럼 짊어져야 했던, 농경사회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지게질로 피부가 혈액순환이 안 돼 마치 검은 참깨를 뿌려놓은 듯이 6남매를 거느린 가장이 진 삶의 무게가 참혹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 나의 아버지,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지 못한 철부지 막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깨닫습니다.

' 내가 아버지의 짐이었다고...' (봄내지기 추가)

 

이 자료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손택수 시인의 여러 자료들을 모아 다시 편집한 것임을 알립니다. 하여 일부 정보의 오류가 있을수 있으니 읽고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편집 겸 옮긴 이)

 


박인환은 왜 술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을까?
   경춘고속도로 하행선 동홍천IC를 지나 속초로 가는 국도변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 156번 길, 옛 행정명 상동리 415-1번지입니다. 60년부터 80년대까지 연정(戀情)에 빠졌던 분이라면 한 번쯤 읊어보았을 어느 멋쟁이의 시(詩) 한 수를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출처: https://youtu.be/uLlg5_7hbxs?si=6fi9QWVpTxvndrYi (영상시-편집 옮긴이 추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않는다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않아도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 시는 박인환(朴寅煥ㆍ1926~1956)이 쓴 ‘목마와 숙녀’입니다. 1926년 8월15일 소양강 상류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 강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평소 흠모했던 이들이 셋입니다. 영국 시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 프랑스 작가 장 콕토(1889~1963),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입니다. 저는 박인환의 시를 요즘 문체가 아닌 발표 당시 그대로 실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바지니아 울프’라는 표현이 더 정감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만가(輓歌)라고 하지요. 대체 박인환은 왜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이 시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고 넘어가지요.

 

목마와 숙녀를 적어놓은 아크릴판 한가운데로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쳐 보인다.

목마와 숙녀를 쓴 아크릴판 한가운데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친다.

 

   박인환이 한창 시인으로 재능을 꽃피우던 시기는 6ㆍ25의 상흔(傷痕)이 뚜렷이 남아있던 1950년대입니다. 그야말로 허무와 불안의 시기였습니다. 흔히 문학사를 보면 우리 세기말, 혹은 국가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페스트 같은 대규모 질병이 창궐했을 때 허무주의가 강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우리 문학사에는 ‘창조’ ‘폐허’ ‘개벽’같은 동인지들이 등장하는데, 이 창조나 폐허나 개벽이란 단어가 실은 같은 정조(情調)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00년 조선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자,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고 국토마저 일본에 빼앗기며 문학인들은 허무주의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광복의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살육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으며 국토가 잿더미로 변한 6ㆍ25 직후에 허무주의가 강하게 대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인환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강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 끊은 울프의 비극적 삶과 자신이 살던 시대를 동일시했습니다. 바로 그 불안과 허무의 상징물이 ‘목마’라고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쓸쓸한 가을 속으로 목마를 타고 떠난 울프(숙녀)를 애도하며 박인환은 떠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별은 비록 삶의 행로(行路)를 밝히는 좌표이자 희망의 상징이지만 술병에서 부서지고 말지요. 이렇게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늙은 여류작가의 눈’처럼 세상에는 ‘등대에 불’, 즉 길잡이가 보이지 않았지요.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뱀’으로 상징되는 통속적인 욕망뿐이었습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 있다.

 

   시를 읽고 나니 제가 속초 가는 길에 보았던 인제로 156번 길 박인환 문학관으로 들어가 보고 싶으시겠지요. 저 역시 한참을 지나쳤다가 무엇에 홀린 듯 유턴해 박인환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4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박인환은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습니다. 그에게 ‘인제(麟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던 산간 벽촌에
나는 자라서 지금은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할까 부질없고나(…중략)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박인환 문학관 바로 옆, 속초~동홍천 국도에 ‘박인환의 거리’가 있습니다. 한 병원 장례식장 바로 옆에 조성된 100m남짓한 거리지요. ‘장례식장’이라는 말과 요절한 시인의 생애가 묘한 연상을 자아내는데, 거기 이 ‘인제’라는 시가 적힌 흰색 철제 의자가 있습니다. 마침 여름 햇살에 이 시구가 땅에 비쳤지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인제’라는 시는 시인의 머릿속에서 ‘산간 벽촌’과 ‘가난’의 상징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봄이여 빨리 오라’고 외치지만, 시인이 떠난 지 한참 됐는데도 인제는 여전히 산촌(山村)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목마와 숙녀’의 허무주의와는 또 다른 한국적 정서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시입니다.

<中편에계속>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Photo by 이서현

 

당시 명동 문인들 '모나리자파'와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2012년 만들어졌다는 박인환 문학관은 모두 2층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층에는 그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명동의 옛 모습을 재현해놓았고, 2층에는 그가 한때 운영했던 ‘마리서사’라는 책방 이름을 딴 마을도서관 ‘마리서사’가 있습니다. 그 한쪽에는 인제 어린이들이 그리고 쓴 박인환의 시와 그림이 자리해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박인환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 뒤 14살 때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합니다. 이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면 꽤 공부를 잘한 학생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덕수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그는 전체 66명 중 7등이었는데 학교장은 ‘최적(最適)’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아주 우수하다는 정도겠지요.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오른쪽 뒷편으로 박인환의 생전의 얼굴사진이 보인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동상 앞에서 관광객이 사진을 담는다. 뒷편으로 얼굴 사진이 보인다.


  박인환은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 내수동에 잠시 살다 원서동 215번지로 이사 갔는데, 당시 살던 집이 바로 창덕궁 서쪽의 용수산 비원점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제가 가보니 얼마 전 허물어져 지금은 폐허이며 바로 옆은 원불교에서 지은 ‘은덕문화원’과 카페 마고가 있습니다. 용수산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분께 물어보니 “얼마 전에 재개발하려 없앤 건물인데 그냥 있었어도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고 했습니다.

  시인 박인환 얘기를 꺼내자 이러시더군요. “한 6개월 살았나?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라에서 나서야지, 민간인이 어떻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문학사의 주요 인물들의 자취가 이렇게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에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박인환이 ‘의사의 길’을 버리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은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그만두고 ‘말리서사(茉莉書舍)’라는 책방을 시인 오장환에게서 인수합니다. 영재들만 간다는 경기중학과 평양의전마저 중퇴하면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왔던 박인환에게 말리서사(요즘은 마리서사라고 부름)는 문단(文壇)이라는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교두보였다고 하겠습니다. 말리서사를 인수할 때 박인환은 아버지에게 5만원, 작은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렸습니다. 박인환이 서점을 연 것은 오장환이 운영하던 ‘낭만서점’에서 힌트를 받은 바 크다는 게 중론입니다. 당시 오장환의 낭만서점은 김기림-김광균-이시우 같은 쟁쟁한 시인과 소설가가 몰려 교류하는 장(場)이었습니다.

 

박인환이 문학에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박인환이 문학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말리서사라는 이름의 유래를 두고 양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여성 시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와 어울린 파리 예술계의 중심인물이었지요. ‘말리’란 한자어가 일본 시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이름이 ‘군함말리(軍艦茉莉)’이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바람대로 박인환의 말리서사는 시인-소설가-화가-영화감독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우정을 다지고 예술을 논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바람대로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합니다.

  내친김에 저는 박인환의 말리서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주소로 서울시 종로3가 2번지 말리서사는 탑골공원 바로 옆 좁은 골목이 아닌 동쪽으로 30m쯤에 떨어진, 승용차가 두대 정도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입구에 있습니다. 지금은 대한보청기라는 회사가 들어서 있는 스무 평 남짓한 공간으로 빨간색 건물이지요. 한때 이 땅의 청년들의 문학의 메카였던 곳이 지금은 연세 드신 분들의 공간이 됐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일요일 한낮이었는데 벌써 술잔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더군요.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니 뭐니 하는, 언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종로거리의 영락(零落)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인제의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명동이나 충무로 혹은 종로에 있는 것들입니다. 박인환은 이 말리서사를 1948년 폐업합니다. 아무래도 김경인-양병식-김수영 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하느라 서점을 운영할 시간이 적었던 게 아닌가 싶지만, 시인 박인환은 전성기를 맞지요.

  한 살 아래인 이정숙과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그가 거주한 곳은 세종로 135번지인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교보문고 옆쪽 주차장입구입니다. 제가 가보니 이번에는 도로포장 공사를 하느라 얼마 전까지 있던 박인환 거주지라는 돌비석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없어지는 게 많은지. 공사를 하는 분들께 물어보니 “포장이 끝날 때까지 대림건설 본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박인환이 결혼해 1956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산 곳입니다. 그곳이 지금의 교보문고가 된 것을 보면 뭔가 인간의 운명(運命)이라는 게 꼭 존재하는 것만 같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박인환은 자유신문사(1948년)-경향신문사(1949년) 기자로 일하며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아메리카의 영화시론’ ‘사르트르와 실천주의’ 같은 글들을 발표하며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시키지만 한참 솟아나던 청춘의 시심(詩心)이 무자비한 포화(砲火)에 짓밟히고 맙니다.

  바로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6ㆍ25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박인환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지냈습니다. 서울 수복이 되기 사흘 전인 9월 25일에는 장녀 세화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서울에 다시 국군이 진입한 이후 비로소 박인환은 가솔을 이끌고 대구로 피난을 갑니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간 박인환은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둔 뒤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 옛집으로 돌아온 박인환은 우리가 잘 아는 ‘명동시대’의 주역이 됩니다. 당시 명동에서 그가 드나든 곳은 다방과 살롱과 대폿집입니다. 50년대의 정취를 되살리며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먼저 박인환과 처음 인연을 맺은 선술집, 지금의 대폿집은 ‘유명옥’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충무로 4가에서 운영하던 유명옥은 빈대떡 집인데 김수영-박인환-김경린-양병식 등이 모여 ‘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훗날 박인환 동인집 ‘신시론 1집’의 밑거름도 여기였지요. 박인환은 밤에 유명옥으로 가기 전 ‘봉선화다방’에 즐겨 들렀습니다. 광복이 되자 명동에서 초기에 생긴 다방 중 하나 라는 봉선화다방은 고전음악 전문점으로 차 마시는 공간일 뿐 아니라 시 낭송,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종군화가 전시회, 음악가들의 작곡발표회까지 열린,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이었습니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봉선화다방의 과거 모습 역시 인제 박인환 문학관에 복원돼 있는데 무섭게 생긴 남녀 인형들이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듭니다. 봉선화다방 못지않게 박인환이 자주 들렀던 곳이 다방 모나리자입니다. 문인들의 회고로는 시인들은 이런 다방에서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한번 들러주길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글 쓰는 게 유일한 생계수단인 시인들이 신문사 편집국장 만나는 게 곧 돈 버는 길이었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동의 문인들은 ‘모나리자파’와 인근의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모나리자가 얼마 되지 않아 없어지자 이번엔 옛 대한중석 본사 바로 옆 ‘동방싸롱’으로 우르르 몰려갔다고 합니다.

  모나리자와 관련해 박인환에게는 이런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박인환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술값이 모자라 맡겨놓았던 만년필을 찾아 친구였지만 유파(類派)가 달랐던 김수영에게 선물로 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지막을 짐작할까요? 박인환의 사례를 보며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저는 모나리자 다방의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흔적을 뒤져도 명동에서 ‘소공동 조선호텔 가는 방향’이라는 말밖에 없었지요. 대신 동방싸롱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방싸롱은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 명동점 바로 옆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푸른색 가림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원서동 집도, 교보문고 뒤 집터라고 새겨진 돌비석도, 동방싸롱도 하나같이 없어졌거나 공사 중이니 웬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최불암 어머니 명동 은성 주점을 차린 이유는?

  동방싸롱이 입주한 동방문화회관 건물은 1955년 완공된 것으로 당시로써는 최첨단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사업가 김동근이 희사한 것입니다. 1층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싸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다방이나 선술집을 전전하던 문인들에게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1957년 문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김동근이 어린 아들과 밤섬에 뱃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불행이 닥칩니다. 주인이 없어진 건물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돌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얼마 전까지 치킨집-호프-당구장이 입주한 건물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연극인 이해랑이 카페와 주점을 운영했다는 이 역사적인 건물 역시 이제 과거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됐으니 우리 역사는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박인환과 명동의 추억을 되새길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포엠이란 위스키 시음장입니다. 박인환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렸는데 굉장한 멋쟁이였다지요. 얼굴 자체도 미남형인데다 초콜릿색 싱글 양복에 홍시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커피색 양말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포엠에서 즐긴 위스키는 계절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를 마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봉구는 ‘명동’이라는 글에서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곳은 은성이라는 막걸릿집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가 운영하던 은성은 명동 파출소 맞은 편으로 지금은 신발 판매장으로 바뀌었는데 앞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이명숙 여사가 은성을 차리게 된 데는 일찍이 청상(靑霜)이 된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과로로 숨지자, 외동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막걸릿집을 연 것입니다. 은성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병상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최씨의 회고로는 천병상 씨는 항상 입구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리에 앉을 엄두를 못 낸 것인데 누군가 “이리와 한잔하라”고 부르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냉큼 달려가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명숙 씨는 박인환 일행이 외상 갚을 생각도 없이 술을 요구하자 외상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지요.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70년대 낭랑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린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도 유명한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시가 완성되자 박인환은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넘겨 곡이 완성되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서슬 푸르게 외상값을 요구했던 은성 주인이 펑펑 눈물을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인환이 쓴 시는 은성 주인의 슬프게 끝난 과거 연애(戀愛)를 시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이봉구의 단편소설 ‘명동’에 나옵니다.

 ※  저의 추측으로는 은성 주인이 박인환에게 은연 중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기에 즉흥적으로 박인환이 주인의 마음을 시로 그렸지 싶습니다.(편집 옮긴이 추가)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탤런트 최불암은 이 은성을 부활시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기인이사 1편’에 등장한 한옥 아티스트 안영환씨를 찾아 복원 방법을 논의했다지요. 그 계기는 안씨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당시 유진룡 문화관광부장관였습니다. 최씨의 사연을 듣고 유장관이 절친한 동창이었던 안영환씨와 연결시키준거지요. 안씨가 운영하는 한식점 ‘진사댁’과 일식점 ‘제주미항’이 옛 은성 맞은편,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씨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사댁 지하를 은성처럼 꾸며 주막처럼 잔 막걸리를 팔 생각도 해봤는데, 최불암 씨가 전체를 쓰고 싶어했어요. 그러면 주방을 옮겨야 해서 고민 중입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명동은 온통 중국인 관광객들 천지이지요. 거리에는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어 걸어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분들이야 생계를 잇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옛 추억이 남아있는 명동을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성 하나 복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박원순 시장이 노점상 생존권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 본류(本流)인 명동을 고급으로 부활시킨다면 중국관광객 유커(遊客)들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거양득의 정책이 아니겠습니까? 사라져가는 명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해본 생각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글쓴이  문갑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편집 옮김]:봄내지기 (일부 띄어쓰기, 내용을 첨부하였음을 알립니다. 개인적으로 인제 박인환문학관에 몇 번 다녀왔는데, 상징적인 의미는 있어도 자료가 부실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인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인환이 한국전쟁을 끝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자료가 많이 남아있을 리 없겠지만 문갑식 기자가 쓴 이 글처럼 박인환과 얽힌 추억담이라도 좀 더 많이 비치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5yBfHwKzHZE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v6NarYtcfno

  

          출처:https://www.youtube.com/embed/rFa-l8yFLLI

 

   시대의 암울함에 울분을 느끼면서도 서정성이 짙은 시를 남기고 하늘로 떠난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 유일할 듯하다. 윤동주의 시는 저항성을 지니지만 감정을 토로하듯 격하거나 직설적이지 않은 문학적 토대 위에서 내면의 울분을 은유와 고백으로 표출한다.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식민통치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양심을 고백한 그는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어린 나이에 보여준 심덕이 깊은 한국 문학사에 둘도 없는 본받을 시인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를 단지 식민통치 수단에 거부하여 우리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두고 생체실험으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반인륜적이고 파렴치한 제국주의(군국주의)자들의 피를 타고 난 후대 일본의 양심인들조차 윤동주 시인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유다.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슬 퍼런 식민통치시대에 그토록 꽃다운 젊은 나이에도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인으로서 피 끓는 조국애를 불태운 문학도이자 훗날 독립운동가와 다름없는 '사후 시인'으로 조명되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살신성인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외쳤다면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정신과 문학의 정신으로 젊음을 불사른 평화의 사도였다. 

 

   97년 어머니와 함께 중국 북경을 거쳐 1주일 동안 백두산까지 돌아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연길에서 용정을 거쳐 백두산에 이르는 여정에서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시 대성중학교에 있는 윤동주기념관을 잠시 둘러봤다. 기념관엔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교내에서 학생들이 발표한 시화를 벽에 걸어놓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인의 맑고 순결한 시정신이 가슴에 닿아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서시>의 시구 중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읽으며 눈물이 맺힌 추억은 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백두산 천지까지 돌아오는 여정이었기에 서시 속의 그 구절은 가슴을 후벼팠다.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아~! 이 얼마나 고매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윤동주 시인만의 자기성찰인가?  나는 사는 날까지 시구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그저 닮고 싶을 뿐이다. 

 

  그뒤 한국에 돌아와 대성중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기념관 안내를 맡았던 김영ㅇ 선생님과 한동안 오누이로 호칭하며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우리와 달리 중국 연변, 특히 용정에 사는 동포들의 가슴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조국애가 깊어 윤동주 시인의 삶을 존경하며 받들고 있다는 것을 영ㅇ 선생님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언제 다시 기회가 된다면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안고 추억의 그 길을 따라 백두산을 돌아본 뒤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 들러 경배하며 시인의 맑고 순수한 시정신을 받고 싶다. 그때 이젠 40대 중반의 엄마가 되어 교단에 서 있을 영ㅇ 선생님의 두 손을 잡고 서신이 끊어지게 된 연유와 용서를 빌고 싶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변함없는 '그때'의 몸이라고. 비록 인연의 끈은 맺지 못했지만, 그 마음만은 아직도 변함없이 추억으로 간직하며 배반하지 않았다고...

그날을 기다려 본다.^^

 

글쓴이 겸 영상 편집인:meister59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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