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베란다에서 좌측인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다보면 보이는 풍경이다. 처음 입주할 때 나무들은 아기 손목 굵기였다. 그렇게 심어진 나무들이 스무 해가 지나며 제법 안아줄 만큼 자라 호숫가 산책로가 봄이면 벚꽃으로 풍성하다. 바로 앞에 느티나무도 지난해 가을 가지치기를 당하며 목생 처음 생의 아픔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토록 잔인하게 상수 머리도 남기지 않고 가지마다 싹둑 잘랐으니, 나무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럼에도 나무는 긴 겨울을 나서 본능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조물주의 거룩한 사랑을 잊지 않았는지 잘린 몸둥이에서 움을 틔우고 잔가지를 키워냈다. 저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가지를 길게 뻗었을 때는 우리 집 베란다 앞까지 다가와 바람이 불 때면 살랑거리는 이파리로 창문을 두들기곤 했다. 여름이면 매미들이 찾아와 게으른 늦잠꾸러기인 막내의 아침잠을 깨우기도 하고 사계절 새들이 날아와 재잘거리며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해 나무는 가지만을 잃은 것이 아닌 그동안 찾아왔던 매미와 새들의 사랑도 모두 잃었다.
말을 못 하는 생명체라고 하여 그저 자기들 편의대로 가지치기한 인간의 무지와 무자비한 폭력이 얼마나 나무에게 가혹한 형벌인지 깨달아야 한다.
♡ 처음 우리 집에 온 업동이(작은누나네 옆집에 역시 업동이로 들어와 주인이 사랑을 받지 못해 녀석은 늘 작은누나네 집에 와서 살다시피했단다. 2010년 5월3일 어버이날을 며칠 앞서 작은누나가 엄마 모시고 닭죽 먹으러 오라고 하여 갔는데... 우리가 차에서 내리니, 녀석 초면인데도 반갑다고 내 바짓가라랑이에 몸을 비벼대며 아양을 떨어 " 오~! 너, 누구니~ 우리 집에 가서 할머니랑 친구하고 살자~ " 했더니 누나가 주인에게 이야기를 해 그날 밤 목욕까지 재개하고 우리 집에 업동이로 온 녀석이다. 업동이로 눈칫밥을 먹고 지내 그런지 말귀도 잘 알아듣고 참 총명했다.
♡형아~, 나 잘랑게... 깨우지 마쇼~잉~~.늘 울 엄니 주무시는 자리에 떡하니 자리하고 녀석이 주인인 양 느긋하다.ㅎㅎㅎ
♡나, 잔다고 깨우지 말라그랬지... 냥이 첨 보냥~ 첨 봐~ 아이고 무서붜라~~~ㅋㅋㅋ
♡ 아침마다 찾아와 냥이랑 기싸움을 하는 까치 녀석들... 어떤 날은 유리창까지 깨고 들어올 듯이 달려들어 짖어댄다. 가치 녀석들은 자기들 영역이라고 외치고 그럴 때마다 냥이 녀석은 자존심이 상해서 매복을 하고 숨어서 마냥 기다리지만, 까치 녀석들도 유리창이 있어 냥이와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터라 그때마다 냥이 녀석은 제풀에 죽어 가라앉곤 했다.ㅎㅎ
♡ 옥수수 차를 끓인 후 남은 알갱이는 새들에게 먹이기 위해 늘 베란다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 잡다한 새들이 날아와 먹고 간다. 까치 녀석도 그들 중 한 무리이기에 반갑기도 하지만 시끄럽게 울어대면 때론 성가신 존재로 다가오기도 하니 인간의 간사함이란...ㅎㅎ
♡ 내가 주방에서 일할 때는 식탁 의자 밑에 엎드려 기다리는 아주 착한 녀석이다. 어느 날 큰누나가 멸치볶음을 맛있게 해 준 것을 엄니가 저녁상 차린다고 정신없이 열어놓고 있는 사이 녀석이 몇 마리만 남기곤 다 훔쳐 먹은 뒤 죄가 크니 자중하고 있는 모습... ㅠㅠ
♡ 울 엄니는 냥이 녀석이 잘 때면 고개 아프다고 타월로 베개까지 만들어 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녀석은 천연덕스레 베고 잤다.
♡주방 앞에서 멸치 달라고 아양 떠는 모습. 내가 저녁 무렵 일터에서 집에 들어가면 재올떠는 모습이 예뻐 멸치를 주곤했는데, 학습이 돼서인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멸치를 달라고 나뒹군다. 녀석을 위해 겸사겸사 국물 멸치를 따로 사오면 국물용보다 녀석이 먹는 것이 훨씬 많았다.ㅎㅎ
♡ 언젠가 이웃 아파트 화단에 하롯밤 외박하더니, 그곳에 사는 냥이와 썸씽이 있었는지 집에 돌아와 식음을 전폐하고 온종일 잠만 잤다. 오랜만에 낭자 냥이와 회포를 풀었는지, 아니면 차여서 상심했는지 녀석을 찾으러 가니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해 한참을 달래서 데려왔다. 그 맘을 알지~^^ 옆 아파트 화단에 노랑 암코양이가 살고 있었다.
♡2010년 9월 엄니랑 전국 일주 여행 중 안동탈춤축제를 보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집에 오는 중 원주를 좀 지났지 싶다. 내가 운전 중인데 운전석 발판까지 찾아와 엎드려 잠을 청하는 녀석. 가특함에 장난기가 발동해 창문을 여니 쏴~ 소음과 함께 찬바람이 들어오니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던 모습에 웃었던..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 2011년 6월 현충일 연휴, 봉평 허브나라 계곡으로 오르며... 조명빛에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녀석 창밖을 계속 바라보며 갔다.
♡ 봉평 허브나라 계곡 옆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1박 하는데, 녀석 주인의 품이 이렇게도 좋은지 내 발을 베고 잠이 들었다. 고양이를 키우며 개처럼 살갑고 주인을 잘 따르며 말을 잘 듣는 고양이는 처음 봤다. 그래서 집을 나간 후에도 마음이 더 아팠다.ㅠ
♡ 봉평 허브나라 농원을 둘러보고 잠시 휴식 겸 간식 타임을 갖기 위해 차로 돌아오니,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반가움에 울 엄니 발을 베고 누워... 울 엄니 대견하고 귀엽다,며 흐믓해 하시는 모습. 울 엄닌 나보다 고양이를 더 위하셨다.ㅎ 이젠 두 주인공 모두 내 곁을 떠나 그리움만 가득하다. 먼 훗날 엄니랑 냥이랑 하늘에서 꼭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한다. ㅠㅠ
♡ 봉평에서 나와 강릉단오제를 관람하고 그날 밤 강릉에서 삼척으로 가는 길에 정동진을 지나 해안길을 따라 가는데, 녀석 뒷자리에 있더니 슬그머니 앞자리 가운데 테이블 시트에 잠시 앉아 있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또다시 운전석 앞 대쉬보드 위까지 올라가 창밖을 바라보며 갔다. 암튼 웃기는 녀석임엔 틀림없다. 동물농장에 출연해도 될 만큼 정말 웃기는 녀석이었다.ㅎㅎ
♡2010년 9월 추석 연휴 전국 일주 여행하며.. 울 엄니와 동행하는 냥이 녀석... (제천 시내 한방바이오엑스포장으로 향하며)
♡여행 중 행사장에 입장할 때나 식사시간에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어'하면 사료를 먹고 꼭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어 대견했다.여행 중에 응가하라고 투명 과일 팩을 만들어주면 그곳에 응가를 하고, 집에서는 화장실에 가서 똥오줌을 가려 누고, 벽지도 긁지 않고. 참 총명한 녀석이었는데... ㅠㅠ
♡안동국제탈춤축제장(안동문화회관) 뒤 잔디밭에서 하룻밤 차에서 야영하며 잠시 휴식 시간에... 녀석은 출입문 앞에서 의젓하게 기다린다. 축제장을 찾은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귀엽다고 많이 찾아와 데리고 놀았다.
♡ 2011년 10월14일 오후 5~6시 사이 엄니가 정신없이 현관문을 잠시 열어놓아 녀석이 가출했다. 그후 전단을 만들어 붙이고 한 달 넘도록 밤이면 온동네를 헤매어 찾아다니고 주민들의 신고가 들어오면 찾아가기도 했지만, 녀석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녀석 아직 살아있을지... 이젠 모두 그리움만 가득한 추억이 되어 하늘에서 할머니와 재회하기를 빌어줄 뿐이다. ㅠㅠ
아직도 마음에 짐이 되어 늘 그립고 가슴이 아리다. 속마음은 티브 프로그램 동물농장에 편지라도 보내 방송 화면에 사진과 자막이라도 띄워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업동이라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집에 2010년 5월 3일에 왔으니까 당시 모습으로 보아 아마 2009년 늦가을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2025년 기준하며 올해 열일곱 살이다. 고양이 평균수명이 다 됐으니 길거리를 떠돌았다면 쓸쓸히 홀로 외롭게 삶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반려 동물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생명체이기에 동고동락하는 동안 정이 들고 그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추억하는 이유다. 먼 훗날 우리 다시 할머니와 삼촌(울 엄니는 냥이에게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주었다. 내가 퇴근 시간이 되면 엄니가 녀석에게 '삼춘 오나봐 하면 현관 앞에 앉아서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이랑 꼭 다시 만나 옛이야기하면서 더 좋은 세상에서 알콩달콩 재밌게 살아가자.ㅠㅠ
30여 년 간 미국 뉴저지에 살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장은아의 두 번째 장편소설 『성북동 아버지』가 출간되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출간된 『성북동 아버지』는 코로나로 지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위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심각한 아동학대 문제가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현실 앞에서 더욱 사랑이 필요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수혜가 20여 년 미국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자신이 잊고 싶었던 고국을 다시 찾으며 시작된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있던 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과거를 또렷하게 마주하게 된 수혜는 차분히 그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하나의 사건 속에는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진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크게 들리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 미세한 소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곳에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니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지난 세월의 상처가 있었다. 오랜 세월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서,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마주 대하게 된 수혜는 비로소 자신의 지나온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서야 수혜는 자신이 결코 버려진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을 처절하게 지켜준 사람들이었으며,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사랑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갈구할 뿐이다. 문학에서도 사랑은 소멸된 채, 건조하고 척박한 광야만이, 잘려나간 흑백필름처럼 뒹굴고 있다. 『성북동 아버지』에서, 억울할 수 있는 세상의 지탄과 불명예를 평생 소리 없이 감내하면서, 은밀하게 사랑을 실천해 나간 ‘성북동 아버지’는 사랑 없는 이 시대의 영웅이다. 그에게 감동과 감사를 보낸다. 아울러 그의 딸로 성장하여 온갖 역경을 버텨가며 떳떳한 사회인의 자리에 앉은 주인공 수혜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난 속에서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장면 또한 감동적이다. 사랑은 주어짐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_김주연 (문학평론가)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여섯 살 ‘수혜’는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여자였다. 그녀가 성장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모두 지웠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는 되돌리고 싶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기억 하나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동안 그녀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들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돌아본 자신의 삶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한 번도 버려진 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인 줄만 알았는데, 보이지 않은 누군가의 눈물과 희생과 사랑으로 지켜진 삶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상처는 사람에게서 온다.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존재도 사람뿐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상처라고 여겼던 여자가 있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낯선 대문 앞에 자신을 버렸다. 아버지는 멀리 있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온몸과 가슴에 여자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넣고 싶었던 남자도 떠나갔다. 이 여자가 사람에게서 희망과 사랑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마술일까, 기적일까.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마술이 펼쳐지고 일상은 기적이 되는 것일까. 한 호흡에 숨 가쁘게 읽히는 이 여자의 서사는 사람이 곧 사랑임을 일깨우는 따스한 마술이다. _ 조용호 (소설가)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세상에 버려진 모든 ‘수혜’들에게 당신은 버려지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당신이 사는 그 힘겨운 나날들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누군가의 사랑으로 지켜진 날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해야 할 때라는 것을. ‘사람’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오래된 기억 …… 13 기억의 첫 장 …… 17 두렵고도 서러운 일 …… 38 첫 만남 …… 70 운명 …… 90 운명의 기로 …… 107 엇갈린 운명 …… 120 운명의 역습 …… 139 이별, 그리고 만남 …… 165 살아야 할 이유 …… 184 핏줄의 힘 …… 207 오래된 진실 1 …… 219 오래된 진실 2 …… 231 성북동 아버지 …… 237 아직 못 다한 이야기 …… 250 사람이 사랑이다 …… 259
출판사 서평
[줄거리]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고모의 연락을 받고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된 수혜는 애써 지워내고자 했고, 까맣게 잊은 줄로 알았던 지난 세월의 기억과, 아프고 서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수혜는 여섯 살 때까지 장애가 있는 엄마와 강원도 사북에서 살았다. 가난과 이웃들의 멸시 속에서 어렵게 홀로 딸을 키우던 애란은 호적이 없는 수혜의 학교 문제로 결심을 하고, 낯선 집 대문 앞에 수혜를 버려두고 떠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에 낯선 곳, 낯선 대문 앞에 엄마에게 버려진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서 있는 일은 참으로 막막하고 두렵고도 서러운 일이었다. 한 번씩 고개를 빼고 혹시나 엄마가 다시 나를 찾아올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엄마의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곁에 두고 울고 서 있는 내가 이상한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흘깃거렸다. 부끄러워진 나는 대문 옆 담벼락 쪽으로 몸을 돌려 쪼그려 앉았다. _본문 중에서
엄마에게 버려진 낯선 집은 고모의 집이었으며 갑자기 나타난 수혜로 고모와 식구들은 놀랐지만, 식구들은 어린 수혜를 따뜻하게 대했다. 얼마 후 처음 만난 아버지를 따라간 성북동 집에는 성북동 어머니와 갓 태어난 동생이 살고 있었다. 어린 수혜는 자신을 대하는 성북동 어머니의 불편한 태도를 보면서 이곳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혜는 성북동에서 살지 못하고 다시 시골 고모 집으로 돌아왔다. 수혜의 의심스러운 출생을 두고 소문이 무성한 탓에 시골에서도 항상 외톨이였다. 특히 태완의 엄마 무실 댁의 수혜를 향한 증오는 그녀의 무의식중에 수혜를 혼외자로 낳은 애란과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 간 첩실을 동일시했기 때문이었다. 수혜는 그런 무실 댁의 아들 태완을 좋아하게 되고 슬픔을 안고 사는 태완을 향한 동질의식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했다. 사춘기 시절 마을 뒷산에서 마주친 수혜와 태완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알게 되고, 태완이 집에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재확인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운명의 끈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거처를 옮긴 수혜는 태완과 비밀스러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온전한 자유와 행복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햇살처럼 밝은 성격의 세아가 나타났다. 수혜의 유일한 친구인 세아는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수혜는 세아의 그런 재주가 부러웠다. 그로 인해 태완이 흔들리는 것이 불안하지만 수혜는 단짝 친구인 세아에게 태완과의 관계를 밝히지 못했다. 자신과 태완의 관계가 무실 댁 앞에서 비밀스러워야 했던 탓도 있었지만, 태완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자신에게 간절하고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내가 말했지. 그건 너를 잃게 될까 두려워서였어.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모두 나를 떠났어. 그게 무엇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우리 엄마도 나를 버렸고, 나를 지켜주겠다던 성북동 아버지도 나를 지켜주지 못했어. 내 동생들 정혜와 신혜에게는 여전히 아버지이면서, 내게는 언제나 먼데 있는 타인 같았어. 그렇게 간절히 빌었는데. 그렇게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는데. 내가 좋아하던 머리핀, 예쁜 지우개, 연필.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건 모두 잃어버렸어. _본문 중에서
무실 댁이 수혜와 태완의 관계를 알게 되고, 태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실 댁은 목을 매어 죽겠다고 협박했다. 태완은 그 일로 더는 수혜와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태완은 수혜의 눈빛에 감도는 슬픔 속에서 엄마 무실 댁의 슬픔이 보여서 괴롭고 심신이 지쳐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김살 없이 밝고 환한 세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태완은 수혜를 버리고 세아와 결혼하여 독일로 떠났다. 더는 세상을 살아낼 의욕을 잃어버린 수혜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탈진하여 의식을 잃게 되지만, 삶의 마지막 끈을 놓고 멀어지려는 수혜에게 손을 내밀어 다시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주는 정섭과 만나게 되었다. 늘 따뜻하게 감싸주고 수혜의 모든 상처도 함께 품어줄 수 있는 정섭의 사랑을 받아들인 수혜는 정섭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수혜는 마흔을 훌쩍 넘겨 고국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예전의 상처를 하나씩 되짚어갔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성북동 어머니의 마음을 중년이 된 수혜는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옷을 정리하던 수혜는 아버지가 마지막 입었던 옷 속에 자신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 함께 찍은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수혜는 자신이 결코 버려진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을 처절하게 지켜준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