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정월 대보름맞이 행사장에서 울엄니 모습입니다.

  어머니와 살아오며 써놓은 일기 글과 문예창작학과 편입 뒤 시 흉내를 낸 글들은 묶어 책으로 보내드릴 계획이다. 아마 이 글도 책에 넣어드릴 후보 중 하나가 될 듯하다. 엄니가 쓰고 있는 모자는 큰누나네 며느리가 손수 뜨게질로, 분홍색 스웨터는 작은누나가, 장갑은 내가 E-마트에서 사 드린 것이다. 바지는 보이지 않아. 무릎을 덮은 타월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때 쓰던 것이다. 엄닌, 하늘에서 그날의 추억을 기억하고 계실까?

 

 

 

그림은 문창과 다니면 회화과에 개설된 <손그림 일러스트레이션> 과목을 수강하며 과제(연습)로 제출했던 그림입니다.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추억하며 그려보려 했지만, 짧은 시간에 표현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맷돌>

 

드르륵 시르륵

드르륵 시르륵

윗방에서 맷돌 가는 소리 들리면

남포등 불빛 아래

육 남매 고이 잠들고

삼경 하늘에 별빛도 잠이 든 밤

어미는 *설운 밤을 퍼내며

강냉이 쌀을 만든다.

눈꺼풀에 내려앉은 졸음 귀신

떠날 줄 모르고

광목 적삼 소맷자락엔 소금꽃이 핀다.

자식 낳은 게 죄가 되어

새끼 딸린 어미의 죄가 커서

삼백 예순 날

어미는 맷돌에 죗값을 치른다.

 

" 그땐 맷돌도 지겹게 돌렸지!

  강냉이 쌀 대엿 되 만들라면

  매일 통강냉이 건중 한 말 갈아야 했지

  껍지(질) 나가지, 눈(씨눈) 발리지

* 도듬이로 치면 가루 빠지지

  그걸 여덟 식구가 입에 풀칠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도듬이 구멍에 걸린 *지치래비도

  아깝다고 다 먹어야 했으니까 "

 

때론 잊고 싶다던 질곡의 세월도 그리웠던지

강냉이밥이 그립다던 어미!

강냉이밥이 먹고싶다던 어미!

맷돌에 죗값을 다 치렀던지, 어미는

이승의 짐 훌훌 벗은 뒤 천상으로 떠나고

맷돌은 죗값을 잊었던지

쓸쓸히 홀로 남아 아무 말이 없다

 

맷돌을 안아주던 철부지가 울고 있다

참혹했던 지난날 당신의 세월이 그려진다며

수많았던 나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당신의 어깨에 짐 지운 죄 용서해 달라며

용서해 달라며 울부짓고 있다.

맷돌이 묻는다

이승의 한이 무엇이길래

이제 철이 들었느냐고!

 

2015년 03월 21일(토) 밤

죄많은 막내 올림.

 

괄호() 안에 덧붙인 글들은 방언(강릉사투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인용부호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엄니가 직접 들려준 말 입니다.

 

* 강냉이 (강릉사투리-옥수수)

* 설운 (울엄니가 쓰시던 말)-서럽다(서러운), 서러워 눈물이 난다,는 뜻이라고 했다.

* 지치래비 (강릉사투리로 옹골진 것을 추려낸 후 남은 찌꺼기)-좀더 구체적으로는 옥수수가 단단하게 여물지

  않아 맷돌에 들어가서도 옥수수 쌀이 안 되고 짓이겨져 나온 것을 말함.

  맛이 씁쓸하고 소나 개에게 끓여주어야 하는 것들임 (= 찌꺼기)

* 도듬이(체의 한 종류)- 쌀낱 크기의 알곡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체의 구멍이 커서 옥수수 알갱이를 맷돌

   에 타서 깨져 나오면 도듬이로 체질(걸러)하여 옥수수 쌀을 만들었음.

 

 

이 이야기는 6.25 전쟁이 끝난 뒤 1955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중 하나 입니다. 당시 저는 아주 어려서 어렴풋한 기억만으로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재구성하였습니다.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안방(아랫방)과 작은방(윗방) 사이에 드나드는 통문(문 없는)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남포등('호야불'이라고 불렀음)을 켜놓고 늦은 밤 엄닌 혼자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온종일 농사일 하랴 산채 뜯어와  밤이 이슥하도록 다듬어서 이른 아침 왕복 6km나 되는 약수터 하숙집을 찾아다니며 팔아오시랴! 줄줄이 식구들은 많고, 연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셔도 가족들 끼니 차려주시랴, 엄닌 매일 밤이 이슥하도록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홀로 맷돌을 돌려 다음 날 먹을 옥수수 쌀을 만들곤 하셨다. 연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셨으니, 마음의 짐은 짐 대로 몸은 몸 대로 얼마나 힘드셨을까! 누나들이 시집가기 전에 많이 도와주었다.

 

  엄니가 천상으로 떠난 지 벌써 1년 반이 되었다. 엄닌 그날의 아릿한 추억을 기억이나 하실까? ㅠㅠ

그리운 어머니, 꿈속에서라도 자주 보고싶습니다.

 

(2015.03.21 밤, 안방에 생전의 엄니가 주무시던 그 자리에 밥상을 펴놓고 앉아 울며 이 글(시)을 썼다. 참고로 이 글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책을 만들어드리기 위해 들어간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시쓰기 특강> 과목의 중간고사 작품으로 제출한(3편 이상) 것 중 하나입니다.

 

 

경인년(2010.02.28 일요일) 춘천시민 정월대보름축제 한마당에서 엄닌 내가 써 드린 소원문을 정성을 다해

달집에 묶어 달고 있다. 엄니의 소원이 무었이길래 저리도 진지하게 소원문을 엮어 달고 계실까?

 

소원문을 묶어 달곤 두 손을 합장하여 소원을 빌고 계신 울엄니. 이 날 달님은 엄니의 소원을 들어주셨을까?

 

 

        

            엄마 이름이 '금성'이라 애칭(H대병원 간호사 지어줌)인 '샛별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vgxn3TaJLQg

  어느 가을날, 어머니와 함께 베란다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다가 담은 집 앞 호숫가 풍경입니다. 여름밤이면

강둑에 나가 돗자리 펴고 어머니랑 별바라기 하며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추억이 그립습니다.

어머니 들리시나요? 기억나세요?  이 막내와 강둑에 누워 별빛을 바라보며  조잘대던 옛날이야기들을...ㅠㅠ

 

  2013년 추석 연휴, 어머니랑 전국 일주 여행 중 봉평 이효석문화마을 메밀밭 둘레길에서 어머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다음날 여행 경유지인 경북 안동에서 뇌동맥 출혈로 쓰러지셔서 안동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되셨지만, '회생 가능성 10%도 안 된다'는 담당 의사의 말을 듣고 다시 엠블런스를 타고 새벽녘 춘천 성심병원으로 올라오셔서 만 24시간 만에 어머니는 이 못난 막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恨) 많은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그곳에 가면

 

 

 

 

어머니!

천국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면

제게도 가르쳐 주세요

수억만 개의 계단과

수천만 개의 비밀의 문 있어도

오르고 싶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찐 옥수수와 고구마를

어머니가 아끼시던 삼십칠 년 된

낡은 양은 냄비에 담아

여름이면 해당화 핀 고향 마을

우물터 샘물을 길어

삼백예순 날이 하루같이

백 년이 달포같이

천 년이 되고 만 년이 되어도

기다려 주신다면

꼭 오르겠습니다.

 

별빛이 흐르는 밤이면

어머니와 집앞 호숫가 강둑에 누워

어린날의 꿈을 그리며 바라보았던

보름달 계수나무 아래서

한숨 눈을 붙인 뒤

오르고 또 오르겠습니다.

 

어머니!

그때 두레박을 내려주세요

그리고 그곳에서

꼭 한 번

어머니를 힘껏 안아 드린 뒤

선녀와 큰절 한 번 올리고

어머니 품에 안겨

딱, 한 번만이라도

" 엄마, 사랑합니다 " 라고

말해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2014.10.07 밤

 

 

 

  
  어머니가 하늘로 떠나신 뒤 마음의 짐이 한으로 쌓여 끄적여보았습니다. 마음은 늘 "엄마 사랑해~" 하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왜 그리 그 말이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두고두고 한으로 남습니다. 어머니가 몸이 불편해 휠체어에 타시거나 차에 오르시거나 또는 집에서 목욕하실 때 등 어머니를 안아드릴 기회는 많았지만, 진심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스하게 안아드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왜 이리 못난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싶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은 한없이 저립니다. 어머니에게 크게 마음 아프게 한 적도 없는데, 왜 그 말 한마디가, 그 포근하게 한 번 안아드리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을까요? ㅠㅠ

 

   

   https://www.youtube.com/embed/KO1Lu4JUurM

 

  지난 2009년 어린이날 연휴, 어머니랑 정선에 가서 뮤지컬을 본 뒤 정선아라리를 부른 주인공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주인공은 2012년(?)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에서 대상을 차지한 뒤 정선아라리 전수자로 거듭났다. 어머니 고향이 대관령 눈꽃마을이라 지역 정서가 같은 정선아라리를 아주 좋아하셨다. 어머니 세대의 삶이 오롯이 담긴 정선아라리는 그 세대들이 살아온 역사이자 한과 애환이 서린 구전민요이다. 어머니는 정선아라리를 즐겨 부르셨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이 곧 정선아리리다. 정선아라리만 들으면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FfZCskYBjME (김영임 명창의 정선아리랑 바로 듣기)

 

  어머니가 좋아했던 정선아리랑. 김영임 명창의 정선아라리는 언제 들어도 어머니 세대가 살아온 삶의 애환이 목소리에 녹아 있어 정선아라리만이 갖는 깊은 맛(恨)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국악은 언제 들어도 가슴으로 다가온다. 한국인의 애환을 담은 민요는 곧 우리 민족의 魂이나 다름없다. 김영임 명창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 같은 세대는 아니지만, 생의 한 구간에서 김영임 명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끈끈한 한(恨)을 담아 잇는 타고난 목소리여서 그 누구도, 특히 아리랑을 표현하는 데는 다른 이와 비교하거나 추종을 불허하는 국보급 명창이다. 전 세계를 돌며, 주한 외국사절 앞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김영임 명창의 정선아리랑은 세계 그 어느 음악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훌륭한 음악이다.

(편집 옮긴 이 추가)

 

 

♡ 2013.09.19 추석날 오전, 봉평 효석문화제 여행중에... 메밀밭 둘레길을 걷는데 가족들과 여행을 온 어여쁜

    낭자 (20대 중반 정도)가 다가와 " 할머니와 여행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함께 찍어드릴가요? " 하며

    담아준 모습이다. 이 사진이 엄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되어 가슴에 진한 아픔이 맺히고 가족사가 되었다.

    사진을 찍어주신 아가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주인공을 꼭 찾고 싶다.

혹여 사진을 찍어준 주인공이 이 글을 보시면 블로그 방명록에 꼭 연락처를 남겨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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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19 오후...울엄니 고향마을인 평창 '눈꽃마을'에 들려서... 강릉 단오제,봉평 효석문화제,정선아리랑제는 년중 꼭 찾아가곤 했다.
엄마의 정서가 담겨...
  ♡ 203.09.21 오전...
춘천성심병원 응급실엄닌 의식 없이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가 이야기를 해드려도 들으시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깝고 슬펐다.
  ♡ 2013.09.21 오후...사경을 헤매는 울엄니...생전 마지막 잡아드린 엄마의 손...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아... 평생 모진 고생하시며 6남매 키우느라 헌신한 손..ㅠ   ♡ 2013.09.29 울집 안방에서...수목장지로 떠나시기 전 마지막 인사하며... 담뱃대는 먼저 가신 아버지께 드리려고 강릉 오죽헌까지 찾아가서 만들어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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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9.29 일요일. 엄니가 계시던 안방 서랍장 위 엄니 유골과 엄니가 앉아 집 앞 호수를 바라보던 의자 위에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2013.09.29 일요일. 엄니 유골 앞에 생전에 좋아하셨던 한과 호박엿 두유 늘 챙기셨던 양말, 허리띠(큰누나 해줌),손
수건 등이 놓여 있다.
  ♡ 2012.09.09 1년 전. 봉평 '효석문화제' 메밀밭에서 잠시 포즈를 취하시며... 마치 열여섯 소녀 같은 울엄니.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   ♡ 2012.09.09 1년 전. 이때도 경상도 억양을 쓰는 아가씨가 다가와 사진을 담아주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다녀왔던 효석문화제였다

 

 

 

 

2013.07.08 16:54

봄내지기님 안녕하세요
KBS 인간극장에 ㅇㅇㅇ 작가입니다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좀 더 취재를 드리고 싶어서 방명록 남깁니다.^^
연락처나 일하시는 곳 정보가 없어서 전화를 못드리네요.ㅠㅠ
제 연락처 남겨 놓겠습니다. 언제든 편한 시간에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010.****.**** 이ㅇㅈ

 

 

2013.07.08 20:00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 ㅇㅇㅇ 작가님이 다녀가셨네요.^^
먼저 평범한 이웃들의 삶의 애환을 담아주시는 인간극장 제작진께 감사를 드립니다.
방송에 보여드릴 만큼 삶을 살아가는 모습도 아닌데. 많이 쑥스럽습니다.

  어머니가 2차 뇌출혈 후 기억력이 많이 감퇴되어 세살박이 어린애가 되셨답니다.
본능적인(배고프고, 아프고, 화내고, 웃음을 잃음 등등) 것 외엔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돼요.
그래서 마음이 더더욱 아프답니다.
아직도 어머니와 약속한 일들이 많이 남아 마음의 짐이 되어 달밤에 홀로 베란다에 나와
호수를 바라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언의 인사를 올리며 눈물 흘릴 때도 많습니다.

  어머니에게 못다 한 마음을 비우려고 머리도 삭발하고 살아갑니다.
이제 어머니가 제 곁에 머무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넘 슬프죠.ㅠㅠ
그동안 어머니와 살아가며 써놓은 일기를 그림을 넣어, 아님 컬러 양장본으로 확대하여
어느 가을날 집 앞 강둑에서 시화전(?)을 열어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마음의 여유가 없어 아직 실현하지 못했습니다.ㅠㅠ
올봄에 어머니 모시고 제주에도 한 번 더 가고 싶었는데... 어머니 컨디션이 안 좋아...
포기 아닌 숙제로 남겨놓았습니다.

  저도 인간극장을 즐겨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보기 힘들 정도로 어머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고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아침식사 시간을 이용해 인간극장을 보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우리 이웃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때론 눈물도 흘리고

때론 함께 잔잔한 웃음으로 다가와 행복함을 느끼곤 합니다.

  제 연락처는 010-0000-0000 입니다.
033-000-0000(일터)
솔직히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시원한 가을(10월 경)이 돌아오면 그 때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신다면

저도 어머니를 위한 생전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도록 기꺼이 동참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이 글은 KBS 인간극장 ㅇㅇㅇ 작가 님이 블로그 방명록에 남겨주신 이야기를 카피하여 옮겨왔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달만 더 살아계셨어도... 어머니의 모습을 방송 영상에 담아드릴 수 있었을 텐데...ㅠㅠ

    추석연휴 저와 함께 여행길에서 쓰러진 뒤 제 곁을 떠나셔서 더더욱 진한 아쉬움과 허전함에 올려봅니다.

    당시 이은주 작가님과 전화통화를 하며 빨리 가을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약속했었는데... ㅠㅠ

    이제 어머니는 제 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셨으니...ㅠㅠ

    어머니의 마음(영혼)을 달래드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으려는지...

    엄마 미안해요.ㅠㅠ

    엄마...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 한 제가 죄인입니다. ㅠㅠ

 

         2013년 12월 21일 (토) 맑음

          엄마를 그리워하는 막내가... 

 

  낭송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심순덕(낭송: 조미애)

출처: https://youtu.be/vgxn3TaJLQg

 

※ 장문의 일기글입니다. 인내를 요구하기에 바쁘신 분들은 읽기를 멈추고 되돌아가기를 클릭해 주세요 ^^

 

* 엄마 하늘나라에도 이 막내가 보이시나 *

 

 

   엄마가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내 곁을 훌쩍 떠난 지 벌써 넉 달이 되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아직도 어디선가 엄마가 고개를 내밀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  "엄마~ 뭐해~ 집에 왔는데. 막내 집에 왔네~ 막내가 집에 왔다고~. 엄마 어디 있어~? " 하며 안방 문을 열고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으며 왈칵 울음을 터트리던 날들. 하루 이틀, 100일이 지나고 멈추고 싶은 계절은 자꾸 멀어져 갔다.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듯 나무들도 하나둘 잎을 떨구고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 하얀 설원이 덮인 망각의 숲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생전의 엄마와 그 어떤 일도, 그 어느 곳에서도 늘 엄마와 함께했기에 내가 어디에 있든, 어디를 가든 엄마의 흔적은 눈에 밟힌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엄마 목욕을 시켜드리며 나누었던 일들이 떠올라 눈물짓곤 했다. 내 기억 속에 묻혀 있는 엄마와의 추억을 조금씩 조금씩 지우려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의 모습은 더 또렷이 살아났다.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써봐도, 슬픔을 억누르며 마음을 돌려봐도 뼛속까지 사무친 그리움을 털어내기엔 아직은 역부족이다.

 

  그래서 뭔가 내가 좋아하는 일에 미치도록 빠져보면 엄마가 보고 싶은 그리움을 덜어낼 수 있지 싶었다. 사색하고 끄적거리며 남기고. 그것이 글이든 사진이든 내가 즐기는 취미 중 가장 좋아하는 일이어서 평소 언젠가는 좀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었다. 며칠 인터넷 검색을 하며 여러 학교에 개설된 문예창작학과를 알아봤다. 그중에 일하는 틈틈이 글쓰기를 즐기며 공부할 수 있고 졸업 후 재능을 살려 농촌학교 방과 후 교실이나 문화센터에서 독서 지도, 동화구연, 글짓기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수여하는 학교를 찾아냈다.

  그런데 막상 학교와 학과를 찜해 두고도 내내 걱정과 갈등이 가시실 않았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살리는 공부라곤 해도 공부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 문을 나선 지 어언 20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기억력과 집중력은 접어두고라도 주경야독하는 환경에서 체력과 정신력이 버텨줄 수 있을지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아 며칠 고민을 거듭했다. 원서 마감 몇 시간을 남겨 두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부랴부랴 응시원서를 작성한 뒤 편입 서류도 동사무소 긴급 팩스로 공증받아 우편으로 제출했다.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내가 맨땅에 헤딩하듯 지원한 학과다.

사이버 대학교로는 유일하게 내가 원하는 순수 문예창작학과였고 비교적 인지도와 평판도 좋았다. 무엇보다 학과의 특성상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라 좋았다. 직업인 자동차를 공부하기 위해 오프라인 학교에서 죽기보다 싫은 기숙사에 처박혀 하루 7~8시간 스파르타식 수업을 들을 때보다 오히려 자유롭게 시간을 정해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지 싶었다. 또 커리큘럼(교과 과정)이 난해한 이론 위주의 수업이 아닌, 기성작가나 학생들이 제출한 작품을 다양한 문학 장르에서 다년간 경험을 쌓은 교수진이 직접 첨삭하며 창작기법을 지도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막상 내가 원하던 대학과 학과여서 주저 없이 응시원서를 제출했지만, 워낙 많은 지원자(특히 여학생 지원자가 많다고 했다)가 몰리는 학과여서 처음 신입생 응시원서를 쓰곤 내심 불리할 것 같았다. 결국 망설임 끝에 전공과목 중 내게 어려운(흥미가 적은) 과목은 피할 겸 등록금도 좀 아낄 목적으로 다시 편입학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곤 자포자기 심정으로 며칠 밤잠을 설쳐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편입학은 더욱 불리하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고 끄적이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아 휴대폰에 일기를 쓴다. 참 좋은 세상이다. 연필이 없어도, 노트가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휴대폰에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글로 옮길 수 있으니 말이다. 굳이 일기만을 끄적이는 건 아니다. 삶이 주는 희로애락을 순간순간 느낌이 다가오는 그대로 어린아이가 벽에 낙서하듯 옮겨 놓는다. 때론 시처럼, 수필처럼, A4용지 몇 장 분량의 단편소설처럼 장문이 되기도 한다. 길을 가면서도, 차 안에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심지어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도 일기를 쓰며 눈물을 흘리거나 히죽히죽 웃으며 머릿속을 스치는 이야기가 손끝에 묻어날 때면 난 늘 즐겁고 행복하다.

 

   설렘과 걱정스러움으로 지낸 며칠 뒤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오후 2시 정각에 합격자 발표를 한다고 했다. 생사가 걸린 일도 아닌데 괜스레 아침부터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발표를 기다리는 시간만 초조하게 기다리니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만약 떨어지면, 그냥 지금처럼 차나 고쳐야 하나! 뭐 별수 있겠어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아니면 이참에 이민이나 가버릴까! 해외로 봉사활동이나 가버릴까! 그럼 엄마와의 약속은 어떻게 하지?

 

-엄마와의 약속은 이렇다-

 

지난가을 엄마 장례식을 치른 후 마음속으로 엄마와 굳은 약속을 했다. 그동안 엄마와 지내며 써놓은 일기를 어느 가을날 단풍이 곱게 물든 집 앞 강둑에서 '시화전을 꼭 열어드리겠다'고 다짐했었다. 이 약속은 엄마 살아계실 때 엄마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추석 연휴 전국 일주 여행 중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뒤 병원 응급실에서 만 하루 만에 하늘로 훌쩍 떠나버려 엄마에게 약속을 들어드릴 수 없게 되어 늘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지난해 7월 KBS 인간극장의 모 작가가 어머니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내 개인 블로그를 돌아보고 연락을 했다. "블로그를 돌아보니 어머니와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고 왠지 모를 따스함과 마음이 편안하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며 좀 더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그땐 무더위가 시작되고 장마철이라 비도 계속 내리고 무엇보다 엄마의 몸 상태가 5월부터 많이 안 좋을 때였다. 그래서 작가에게 '날씨가 선선해지고 엄마의 컨디션이 좋아지는 10월쯤에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그 한 달을 못 버티고 하늘로 훌쩍 떠나시게 되어 안타까움과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아니 한 달만 더 살아계셨다면 엄마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보여드리고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두고두고 보았을 텐데. ㅠㅠ

 

  그때 작가에게 '그동안 엄마와 지내며 써놓은 일기 글을 집 앞 강둑에서 시화전을 열어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저희도 프로그램을 위해 더 좋은 일이죠." 하며 좋아했다. 어디 그뿐일까. 엄마가 보는 앞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며 '어머니 은혜'도 불러드리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아리랑 씨리즈'도 함께 불러보고 싶었다. 또 엄마랑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호수를 바라보며 '해바라기'를 할 때 가끔 흥얼거리며 즐겨 불렀던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도 불러드리고 싶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김종환이 부른 노래다. 엄마와 함께 베란다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세상에 더는 바랄 게 없이 마음이 평온해지며 온몸에 행복한 힘이 솟아나곤 했다. 노랫말이 내가 사는 곳 분위기에 정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시어 같아 십여 년 전 서울에 사는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IY이가 춘천에 놀러 왔을 때 같이 호숫가강변에 앉아 저녁노을이 물든 하늘 아래 조약돌을 던지며 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 작은 사진을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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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학안내 전단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내겐 모두 생소하다.
  ♡ 책상 앞에 앉아 이런
저런 궁상을 떨다가...
사실 아직도 걱정이다.
  ♡ 학교생활 안내책자
작은 수첩과 메모리 카
도 하나 보내왔다.
  ♡ 아직도 학번을 부여
받으려면 한 달을 기다
려야... 기다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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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집 앞 호
숫가 풍경은 언제나 신
비감과 감사함이... ^^
  ♡원주 박경리 문학관..
이젠 두 분 모두 고인ㅠ
박완서 선생님과 울엄니
  ♡ 남이섬에서... 엄닌
언제나 내곁에 늘 함께
있어주길 바랬다. ㅠㅠ
  ♡ 이젠 모두 내곁을 떠
난 엄니와 냥이... 녀석
어디에 살아있을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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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을빛에 물든 호수
인생의 사계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 강둑 산책로... 엄니
와 이 길을 걷던 추억도
이젠 그리움만 남아...
  ♡물안개 피는 호숫가
산책나온 소녀들의 발
걸음이 경쾌하다.

  ♡ 가을은 언제 봐도 평
화롭다.아빠 뒤에 탄 공
주님 표정이 더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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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월드레저축제...
미국 수상스키 단원과
단원의 표정을 따라...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아련한 추억만이 남아..
그리움의 눈물만 흐른다
  ♡ 이날 울엄니 사진을
담을 때 관람객들이 배
를 움켜쥐고 웃었다.
  ♡울엄니의 즉흥적인 연
기력에 사진작가들이 무
한 셔터를 눌러댔다.ㅎ

 

 

 

 

 

 

 

 

 

 

 

 

  합격자 발표 시간이 임박한데 여자 손님 차가 들어왔다. '아니 이런 눈치도 없지'속으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며 손님을 맞이하는데, 손님은 내 속사정도 모르고 차에 대한 요구사항을 줄줄이 늘어놓기 바쁘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얼버무리듯 겨우 손님 마음을 달래 돌려보내는데 무려 30여 분이 흘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휴대폰에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정확히 2014년 1월 15일 수요일 오후 2시 27분이었다.

"서울디지탈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편입학 입학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 맙소사! 하늘에 계신 엄마가 도와주셨나? 아니면 입학사정관들의 측은지심이 발동해 적선하듯 예쁘게 봐주셨나? 지원 동기를 작성하며 그냥 솔직하고 담담하게 나를 소개했는데, 경로우대였나? 예전 학교에서 두루두루 학점이 좋아서? 암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별의별 추측이 다 들었다. 음~ 새 학기 입학식 환영회 자리에 가면 선배님, 큰형님, 삼촌 아니 애송이들은 아버님,하고 부를 수도 있겠군. 그런데 문턱에 발을 디뎠다는 안도감은 잠시뿐, 과연 내가 잘 적응하며 수업에 차질없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저녁 무렵 학교 홈피에 접속하여 수강 신청을 하고 내친김에 입학금과 수업료도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바로 신입생 등록을 마쳤다. 용기가 나지 않아 등록도 못 하고 포기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왠지 이제부터 어깨가 슬슬 무겁게 느껴졌다. 일손이 잡히지 않아 평소보다 일찍 일터를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덩그런 집에 홀로 앉아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도 배고픔도 모르고 멍하니 티브만 지켜보았다. 느닷없이 조카 애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학교생활을 마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이라 그래도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뭔가 도움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싶었다.

 

" 얘들아 삼춘 서울디지탈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편입했는데 걱정돼 잠이 안 온다.

  과연 내가 등단 작가가 되겠니? 걍 차나 고칠까? "

잠시 후 휴대폰이 딩동딩동 울리며 답신문자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좋은 작가가 되실 거에요. 늦게나마 자신의 꿈을 가지시는 게 좋아보여요 " (? )"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용기라고 봅니다. 부디 뜻하신 바 이루시기 바랍니다. 젊은 친구들    하고도 잘 지내시구요 " (ㅎㄹ아빠)" 전 잘 모르지만 삼촌 블로그에 글 솜씨를 보면 잘 해내실 거라고 믿어요 힘내세요 삼촌!! " (ㅇㅇ이)" 삼촌 같으면 잘 하실 것 같은데요. 뭔가 보통 사람들 생각하곤 다른 면도 있고, 늦은 시작이지만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이거 나중에 밀리언 셀러 작가 되기 전에 싸인이라도 받아놔야 하는 건 아닌지~ 삼촌 화이  팅 응원할께요~ ㅋㅋㅋ" (ㄴㅇ아빠)" 축하드리고요~ 삼촌의 끈기와 인내력 배우고 싶네요~ 삼촌은 충분히 잘하실 거에용~^^ " (ㅎㄹ엄마)" 삼촌의 열정이 부럽네요~" (?)" 편입하셨어요? 그럼 서울로 가시는 거에요? 도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더  욱더...힘내세요 ^^ " (ㄴㅇ엄마)" 늦게 답장을 드렸네요. 만학이 쉽지만은 않지만 삼촌께선 잘하시리라 믿습니다.(ㅂㅎ아빠)  행복하고 늘 건강하시고 사랑 충만하시길 빌어요. 저도 멀리서 항상 기도드리겠습니다 "

 

   이밖에도 많은 조카 애들이 막냇삼촌 힘내라고 격려의 문자를 보내왔다. 형과 누나네 조카 애들을 합치면 모두 13명이나 되며 결혼한 애들까지 합하면 그 배수에 가깝다. 조카 애들에게 격려문자까지 받았으니 이젠 죽으나 사나 몸을 던져야 할 판이었다. 조카 애들에게 보낸 문자가 풍선처럼 부풀려져 오히려 부담이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좋은 격려 문자이긴 한데, 너무 거품이 들어 있어 내심 충격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ㅋㅋ 내가 문예창작학과에 편입한 목적은 엄마와 지내며 써놓은 일기를 책으로 묶어드리기 위한 것일 뿐인데. 등단 작가 운운하며 아이들을 들먹였으니! 영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다시 조카 애들에게 거품을 걷어내기 위한 개구멍(?) 문자를 보냈다.ㅎㅎㅎ

 

할머니 하늘로 떠나시고 슬픔을 뭔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덜어보려고. 신입생 전형은 4년이란 세월이 심리적으로 넘 지칠 것 같아. 글구 수업료도 부담되고. 경쟁률이 더 쎈 편입학을 미친 척 지원했는데. 사실 기대도 안 하고. 기회가 되면 내가 듣고 싶은 몇 과목만 별도로 신청해 들어봐야지 했는데. 지원동기를 감동적으로 받아드렸는지 덜컥 합격했다며 등록하라고 연락이 와서. 고민고민하다가 저녁무렵 수강 신청하려니. 내가 꼭 듣고 싶었던 '수상시 강독' 과 '어린이책 상상력' 는 이미 수강생이 다 차서 대기순번으로 밀려났구나. 뭐 장고의 길을 떠나는 마라톤이긴 하지만 아쉬움이. 서울에 올라가 모임(시, 수필, 소설,평론,동화 등 다양함)에도 참석하고 얼굴들도 익히면 더욱 좋겠지만, 아직은 할머니가 계시던 집을 지키고 싶어. 카센터를 지키며 추후 생각해 보기로. 창작이란 혼을 쏟듯 열정과 에너지를 모아 노력하야 하는 일인데...

 

그동안 할머니와 지내며 늘 일기를 남기며 끄적이는 것이 좋아...

어려서부터 삼춘은 책 읽고 그림 그리고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단다.

공부도 곧잘 했지. 초등학교 땐 우등상을 학년마다 받았으니. 이제 삼춘 나이에 학교에 가면 '아번님' 하고 부를 텐데.ㅎㅎㅎ. 얼마 전 춘천에 살고 계신 92세 되신 할머니가 일제시대 때 춘천여고를 다니셨는데. 한글을 잘 몰라(말살정책)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쳐 독학으로 시를 습작하여 시집을 출판해 화제가 됐었는데. 그 할머니 보고 동기 부여를 많이 받아. 제일 큰 동기는 할머니 돌아가신 슬픔이 너무 커서 좀 잊어보려고. 글구 일기도 묶어서 할머니 영전에라도 보여드릴려고. 생전에 아파트 앞 강둑에서 가을날 할머니 모시고 시화전을 열어드려고 싶었는데...

지난 10월 KBS 인간극장도 찍기로 했었는데. 할머니가 훌쩍 가시는 바람에...ㅠㅠ

또 눈물이 흘러... 암튼 모두 격려해줘 고맙구나 사랑한다~ 얘들아

~(이상은 거품을 덜어내기 개구멍(?) 문자 전문임)

 

   솔직히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뭔가 끄적이는 것을 좋아해 그동안 엄마와 살아온 일기 글을 묻어두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의 일기 글을 집 앞 강둑에서 시화전을 열어드리고 또 책으로 묶어 어머니 영전에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문예창작학과를 편입한 가장 큰 목적이었다. 덤으로 습작하는 즐거움을 찾아 좀 더 노후에 직업인 자동차 정비는 취미로 하고 작은 재능이나마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또 글을 쓰는 것이 치매 예방에도 도움된다고 하지 않던가! ㅎㅎ

 

" 하늘에 계신 엄마... 엄마에게 감사드려요.

 그리고 기뻐해 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 막내에게 온유하고 세상을 따스한 감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셔서 고마워요. 엄마!

 엄마와 함께 살아왔기에 일기를 쓸 수 있었고, 일기를 쓰며 취미를 기르고 문학적 소양을 키우고 싶은 동기부

 여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엄마. 엄마와의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

 오늘 밤은 엄마 사진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잠이 들고 싶습니다.

 엄마 감사해요. 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 은혜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해요.엄마!♡

 

         2014년 01월 18일(토) 맑음

 

 

 

 

 

가보처럼 여기던 신발도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한마디 말도, 단 1초의 눈맞춤도 없이 엄닌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다. 이 모습은 강촌 주변 오지 마을을 차를 타고 돌아보며 고갯길에서 담은 모습입니다. 강원도 촌넘이라 그런지 엄니를 닮아서 그런지 사람 많은 곳보단 자연과 교감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 좋다. 입안에는 엄니 군것질거리 중 하나인 '바나나킥' 과자를 녹이고 있다. 귀에 꽂아드린 꽃은 찔레꽃이다. 이곳은 '가평대교'에서 쭉 우측 강변으로 따라가다가 강촌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내가 난생처음 엄니에게 사드린 신발. 20여 년이 넘도록 아끼느라 신지 않아 바닥은 아직도 생생하다. 건강하실 땐 아끼느라 못 신고, 아픈 뒤론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느라 못 신었던 신발이다. 엄니의 흔적이 묻어 있어 두고 본다. 엄닌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몸인데도 신발이 낡으니 실로 꿰매도록 이 신발에 애정을 갖고 아끼셨다. 먼 훗날 나도 하늘로, 아니 엄니 곁으로 돌아가는 그 날 엄니 신발을 꼭 갖다 드릴 생각이다. 

 

 

   윗 사진을 보고 그려 본 왕초보 그림이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본 뒤 처음이다.

   엄니 마음이 묻은 낡은 신발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다. 새 신발이(신발에 표정이 없다) 되었다.

 

 

이 그림은 초등학교 6학년 늦가을 쯤 일이다. 김장한다고 안마당 부엌 앞에 커다란(한 아름 넘는) 항아리를 씻어놓은 걸 내가 건드려 그만 항아리가 넘어져 깨졌다. 그러자 아버지가 몽뭉이를 들고 쫓아와 삼십육계 줄행랑하여 논판으로 달아났다. 벼를 베어 말리려고 논에 쌓은 볏단 더미 구석에 숨어 앉아 훌쩍이니 그래도 늘 나를 따르던 우리집 '메리' 찾아와 위로하듯 지켜주었다, 워낙 큰일을 저질러 두려움에 밤이 이숙하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달이 떠서 기울도록 울고 울었다. 꼭 '내가 돈을 벌어서 항아리를 사드릴 테야' 다짐하면서도 서러움에 밤하늘 달을 보고 울었다.ㅎㅎ 그때 시골에서 아이들의 돈벌이는 마을 약수터에서 요양하는 사람을 상대로 뱀을 고아 파는 뱀집에 뱀을 잡아다 주면 한 마리에 몇 백원씩 주었다. 시골에서 자라 뱀 잡는 일은 곧잘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항아리 가격은 몇 천원 하였으니 시골살림엔 작은 돈이 아니었지 싶다. 늦은 밤(아마 9시쯤) 뒤란 울타리 사이에 난 쪽문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니 그때까지 엄닌 웃방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주무셨고 엄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항아리는 사드리지 못했지만 여름방학이면 뱀을 잡아 팔아 엄마에게 꼭 돈을 갖다 드리곤 했다. 돌이켜 보니 웃음도 나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ㅠㅠ

 

달도 잘못 그리고. 방향도 안 맞고...ㅋㅋ (교수님이 속으로 얼마나 웃으실까?) 애써 가르쳐주니 엉뚱한 그림만 그린다고 나무랄 듯싶다. 그러니 어떡한담! 이야기는 모두 이해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말이다.ㅋㅋㅋ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남포등 아래 엄닌 늘 늦은 밤까지 맷돌을 돌려 다음날 먹을 옥수수 쌀을 만드시곤 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벼농사는 지어도 워낙 식구가 많아 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75년도에 전기가 들아왔다. 전형적인 기억 자 집이었다. 안방과 윗방은 누나들과 엄마와 나, 사랑방은 형들과 아버지가 썼다. 아랫방과 윗방 사이에 벽을 두고 문이 없는 출입구만 있었다. 그려보려니 초보 실력으론 감당이 안 돼 방 하나에 다 추억을 담았다. 벽에 걸린 남포등(램프의 일본식 발음이라 함. 호야라고 부름) 아래 엄닌 윗방에서 매일 큰누나와 또는 홀로 맷돌을 돌리곤 했다. 육 남매 어미를 표현하기 위해 한 곳에... 벽에 붙은 작은 상자는 유선 스피커. 당시 마을에서 유선으로 라디오 방송을 했다, 주로 뉴스와 연속극을 들려준 것 같다.(아주 어려서 기억이 가물가물)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이면 엄마를 따라 집 뒤 밭에 따라다녔다. 고구마밭에 물도 길어다 주고 김매기를 도와드리기도. 이 그림은 고구마 밭에 북(고구마 덩쿨이 자라면서 마디에 내린 뿌리를 들추고 흙을 덮어줌)을 주기 위해 '후치'라는 작은 쟁기(사람이 끈다. 민속자료에서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만 썼다고)를 아버지가 앞에서 끌고 엄마가 뒤에서 밀며 흙을 돋우곤 북을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흥미롭고 신기했다.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는 기꺼이 소가 되어야 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도 모르고 홀로 자란 듯 아버지 말씀을 흘려듣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했으니...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하고 상처가 되었을까!

다시 잘 그리면 제목을 <만종>이라고 붙여주고 싶다. 이 장면을 기억하며 시 흉내를 내기도 했다. 충분히 연습하여 좀 더 그 날의 의미를 재현하여 책에 넣어드리고 싶다. 고구마 넝쿨을 그려보려 했는데 한 달도 더 걸릴 듯하여 포기했다.ㅎㅎㅎ

 

 

엄니가 거동이 불편한 뒤 집안에 계실 때 어느 봄날 엄니랑 롯데마트에 가서 분홍색 스웨터를 사 드렸더니 늦은 밤까지 좋아서 누웠다가는 다시 일어나 입어 보고 벗어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아래 글은 그날을 추억하며 쓴 글이다. 할머니를 그려야 하는데 젊은 엄마가 되었다. 난 늦둥이 막내로 자라 젊은 엄마를 보지 못했다. 다섯 살 때 엄마와 찍은 사진을 보면 할머니 같다. 이 그림은 실패작이다. 연습으로 그렸으니 다시 몇 번이고 그려야 될 듯하다. 고양이를 그린다는 게 큰 쥐가 태어났다. ㅋㅋㅋ

 

             서랍장

 

   텅 빈 안방 홀로 지키며 그리움에 지쳐 묵언 수행 하는 걸까. 차마 안쓰러워 눈길조차 줄 수 없는 너. 어느 가을날, 후미진 담벼락 아래 덩그러니 알몸으로 떨고 있는 너를 업둥이라 여기며 운명처럼 한 식구로 받아들인 네게, 참 예쁘다 곱다 하시며 고운 물수건으로 너의 온몸을 구석구석 닦아주시던 어머니. 행여 다친 곳은 없을까, 행여 다시 버림받을까 떨고 있는 너를 약손처럼 쓸어주며 안아주시던 어머니.

 

   세월이 가며 네게 쏟는 사랑이 깊어갈수록 속정까지 들어버린 너. " 버리면 죄 된다."는 어머니 말씀에 차마 너를 다시 보낼 수 없었지. 새 아파트로 이사 하면 예쁜 화장대 달린 서랍장 하나 사 드린다던, 그 약속 잊으시고 별이 되신 어머니. 죄인은 밤마다 별을 찾아 속죄의 길을 떠나지. 넌 이해할 수 있겠니? 나 대신 어머니께 용서를 빌어다오!

  

  기억나니? 연분홍 스웨터를 사 드리던 어느 봄날, 어머닌 네 품에 안긴 스웨터를 입었다 벗었다 하시며 달빛 물든 창가에 앉아 소녀처럼 흩날리는 벚꽃이 되어 밤새도록 좋아하셨지. 이십여 년 세월 어머니와 동고동락했던 너. 때론 신발장이 되어 흙 묻은 어머니 털신도 품어주고 인고의 세월 어머니 손때 묻은 기억 부스러기도 기꺼이 안아주었던 너. 그리움에 지친 텅 빈 몸으로 이젠 누구를 기다리길래, 그 빛나던 살결도 빛을 잃고 품속에 채웠던 모정(母情)의 세월도 비워버리고 온종일 창밖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니.

           

2015년 09월 05일 (토) 밤. 흐림 빗방울

 

 

 

엄마가 처음 쓰러지신 뒤 어느 날 엄마 손을 찍어드렸다. 육 남매 기른 거룩한 손이기에 먼훗날 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사진을 보고 그려봤는데 역시 한계를 느낀다. 닮지도 않았다. 글은 지우고 다시 쓰면 되는데, 그림은 한 번 그르치면 다시 지울 수 없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그림 그리는 분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마지막으로 잡아 드린 엄마의 손... 저 손으로 육 남매를 키우셨다.

손을 잡아드린 뒤 13시간 남짓 되어 하늘로...ㅠㅠ

 

이 사진만 보면 눈물이 난다.

수많았던 나날 당신의 헌신으로 육 남매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어 고맙고 마음아리고!

 

 

집에 식구들이 아프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엄닌 뒤란 장독 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천지신명께 축수(기도)를 올리시곤 했다. 자식 낳은 어미의 죄로 행여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늘 노심초사 어미의 걱정은 밤낮이 따로 없으셨지 싶다.

장독대 주변에는 늘 맨드라미와 봉숭아를 심었다. 빨간 색을 지닌 꽃들이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울타리는 장독대와 붙어 있었는데 초보라.ㅎㅎ 울타리에는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개나리, 뽕나무, 사철나무 등 나무도 많았지만, 왕초보라! 울타리에는 매년 나팔꽃, 강낭콩을 심어 올렸고 해라기도 해마다 심었다. 마음은 모두 넣어주고 싶었는데 겨우 해바라기와 복숭아나무만 흉내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이것 보다는 더 표현을 잘하던데!

그래도 난 그림을 그리며 추억여행을 떠날 때마다 행복하다.^^

 

 엄니가 아끼고 꿰매 신던 신발과 분홍색 스웨터. 늦둥이 막내가 사 준 거라고 꼭 그 신발, 그 스웨터만을 고집하셨다. 형과 누나들이 사 준 더 예쁜 옷과 신발도 있었는데. 엄닌 천상에서 기억이나 하실까? 이젠 모두 그리운 추억만 남을 뿐이다. 꽃과 인형, 동물과 아이들을 좋아하셨던 울엄니. 이 사진은 어린이날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 야외행사장에서 담은 사진이다.

 

 

 

  다큐맨터리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 김기덕> 삽입곡- 강원도 아리랑(울엄니 애창곡이었다)

  이 영화를 문예창작학과 <문학과 영화>강의시간에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며 얼마나 울었던지...ㅠㅠ

  인생의 사계를 대사(말) 없이 감동적으로 담은 김기적 감독의 작품성에 놀랐고 하늘로 떠난 엄니에게 좀

  더 살갑게 해드리지 못 한, 좀 더 함께 놀아주지 못 한 회한에 울었다. 그리운 어머니! 막내가 보이시나요? 

 

2016년 4월 01일  금 맑음

 

 

♡ 엄마가 하늘로 떠난 뒤 49일(7재, 2013. 11.09)째 되던 날 밤, 엄마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자정이 넘도록 솜씨도 없이 준비하여 다음날 아침 상에 올린 모습입니다. 엄마는 생전에 " 나는 이담에 죽거든 괜히 먹지도 않는 음식 이것 저것 하느라고 애쓰지 말고 막걸리에 설탕 타서 밥이나 말아 놓고 감이나 있으면 하나 올려다오 " 하셨다. 지난날 시어른들 제례 준비하며 겪은 어려움이었을까. 아님 홀로 남은 막내에게 부담지운다고 그리 말하셨을까. 엄마가 하늘로 떠난 뒤 명절이나 추모일이 돌아오면 같은 음식을 준비하여 막걸리랑 올려드린다.  홍시가 없는 계절에는 냉동감을 해동하여 올리거나 곳감으로 대신할 때도 있다. 엄마, 하늘에서 늘 막내를 지켜 봐주세요.^^

 

 

 

 

♡ 자정을 넘겨 음식 준비를 끝내 뒤 내 방에 엎드려 훌쩍이며 엄마에게 편지를 쓰고 나니 날이 환하게 밝았다. 살아계실 때 좀 더 살갑고 따스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 드렸어야 했는데. 지나고 보면 모두 아쉬움뿐. 엄마는 " 에미가 없더라도 끼니 거르지 말고 친구라도 하나 사귀어 외롭게 살지 마라, 형제지간에 폐 끼치지 말고 조카들에게 추하게 보이지 말고. " 하셨다. 그래서 '밥 잘 먹고 꿋꿋하게 살게요' 라고 편지에 써 드렸다.

 

 

♡ 고향 마을 성황당이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 가끔 산에 가서 나물도 뜯고 도토리도 줍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랑 성황당 앞에 앉아 잠시 쉬어 가면 그때마다 엄만 커다란 도토리나무를 바라보고 산신님께 기도를 올리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이곳으로 봄 소풍을 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노래 부르며 손수건 돌리기도 하고 벌칙을 받으면 가운데 나가서 율동을 곁들인 노래도 부르고 때론 보물찾기로 상품도 받았다. 어린 시절에도 같은 크기였으니 수백 년 되었지 싶다. 6.25전쟁 중에, 그 후 산불이 몇 번 발생했다는데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성황당을 지키는 나무는 굳건했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며칠 뒤 엄마의 발길이 닿은 성황당을 찾아 나무를 끌어안고 그 옛날 엄마처럼 인사했다.

" 산신님 고맙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이 산에서 나물을 뜯어 팔아 우리 육 남매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 후에도 가끔 이곳을 찾아 나무를 끌어안고

" 나무야 잘 있었어? 고마워, 아프지 말고 잘 지내 도토리 많이 열고~"

하며 인사하곤 한다.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 기형도(1960~89) '엄마 걱정' 중에서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읽고/봄내지기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하늘에 계신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난다. 엄마는 매일 새벽 아침 조반도 드시지 않은 채 전날 밤 채반에 안쳐두었던 산나물과 채소를 커다란 양푼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왕복 6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휴양지인 약수터 주변 하숙집을 찾아다니며 팔아오곤 하셨다. 지난밤 산나물과 채소를 씻고 다듬고 때론 데치고 헹궈 다시 물기를 짜고 털어 상품으로 만들기까지 엄마는 밤이 이슥해서야 잠자리에 들어 겨우 한숨이나 눈을 붙이셨을까.

 

  새벽 아침, 빈속에 잰걸음으로 약수터를 휘달려 돌아와야 했던 우리 엄마, 얼마나 허기졌을까! 약수터에서 나물을 팔고 오시면 잠시 앉아 숨돌릴 새도 없이 가족들의 아침상을 차린 뒤 국 말아 한 술 후루루 빈속을 채우곤 이내 또다시 산으로 밭으로 달려가야 했던 우리 엄마. 요즘처럼 전기밥솥이 있다면 타이머 스위치 하나 맞춰놓고 마음 편히 갔다 오시련만.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니 엄마가 얼마나 쫓기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고된 생활을 이어가셨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6.25 전쟁의 상흔이 널브러지고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던 50년대의 참혹했던 시절,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내야만 했던 고달프고 가난했던 6~70년대까지, 아마 '어미'가 아니었으면 엄마는 그 힘든 과정을 매일 아침 이겨낼 수 없었지 싶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을 읽으면 화자인 기형도는 시장에 간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미에 대한 본능적인 어린 화자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끈은 '이미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어린 기형도는 학교에서 돌아와 방에서 숙제하며 엄마를 기다려 보지만, 엄마는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 왜 엄마는 빨리 돌아오지 않는 걸까?  장에 나간 엄마는 집에 돌아와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어린 자식 생각에 마음은 더 급하고 타들어가지 싶다. 하지만 열무를 다 팔아야 하는 엄마, 열무를 다 팔아야 어린것에게 학용품 하나라도 사 줄 수 있는 엄마, 그래서 열무를 다 팔아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엄마. 나는 <엄마 생각>에서 이 그림이 그려질 때면 하늘에 계신 엄마 생각에 목에 통증을 느끼며 울컥 눈물이 솟는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나물을 빨리 팔아야 집에 돌아가서 식구들 아침밥을 차려줄 텐데. 나물을 조금이라도 팔아야 우리 애들 학용품도 사고 기성회비라도 낼 텐데, 하는 간절함과 쫓기는 마음에 때론 힘들게 뜯어온 나물을 헐값에 팔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의 그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을 생각하면 지난날 엄마에게 짐을 지운 죄가 너무 큰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저리다. 이처럼 <엄마 걱정>을 읽을 때면 어린 화자의 마음이 가슴으로 흐르며 어둡고 힘든 세월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육 남매를 위해 밤낮없이 헌신하셨던 엄마의 모습을 오롯이 떠오르게 한다. 

 

  시인은 왜 해를 '시든지 오래'라고 했을까? 왜, 해가 '진다'라는 표현을 버리고 굳이 '시든다'라고 말했을까? 아마 그것은 '시든다'는 시적 언어가 갖는 이미지화, 즉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가는 화자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리려고 시인만의 언어를 빌렸지 싶다.

  '시든지 오래'라는 시구를 읽으며 문득 초등학교 1학년 때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낮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른들은 모두 농사일로 밖에 나가시고 텅 빈 집엔 개와 닭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혼자 방안에서 크레파스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집엔 나 홀로 남아 있었다. 늘 익숙한 일인데도 그날은 왠지 서럽고 무서움에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그때 마침 밖에서 돌아오던 큰누나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우리 막내 혼자 있었어~ " 하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나를 안아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시 <엄마 걱정>에서 화자는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천천히 숙제하며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가는 어린 화자의 안쓰러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시든다'라는 것은 살아있는 식물이 물이 부족해 말라갈 때 쓰는 진행형 자동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자신의 심리상태를 '시든다' 한 단어로 회화적 응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엄마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며 이 시의 백미다.

 

 또 시 <엄마 걱정>에서 화자는 '찬밥처럼'이라고 표현했다. 찬밥은 어떤 의미인가? 따끈하고 말랑한 밥은 엄마의 관심이다. 밥이 식어 찬밥이 되어간다는 것은 관심에서 차츰 멀어진다는 이미지다. 화자가 엄마를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곧 따스한 밥이다. 처음엔 '숙제하는 동안 엄마가 오시겠지'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지 싶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는 즐거움은 서서히 걱정(두려움)으로 변한다. 어찌 보면 속 좁은 철부지의 원망 섞인 투정처럼 보이지만, 나는 엄마를 기다리는데 엄만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어린 화자의 엄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찬밥'이라는 심상적 이미지로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화자는 해가 지기까지 무시로 방문을 열고 문틈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엄마가 오시나' 내다보았지 싶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 해는 점차 기울어지고 어스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어린것을 집에 두고 열무를 팔러 간 어미의 마음은 더 무거웠지 싶다. 열무를 다 팔아야 한다, 는 조급한 마음에 애가 마르고 어둠이 깔린 들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엄마의 종종걸음은 더디기만 하여 천근만근이었지 싶다.

 

  이처럼 기형도 시인이 '방과 후 엄마를 기다리는 자신의 마음'을 시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시인 기형도뿐만 아니라 헐벗고 가난했던 당시 도시 근교의 농촌에서 살아가는 엄마들의 힘든 일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화자가 엄마를 기다리(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시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고귀한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엄마 걱정'이 곧 '어머니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이라는 시인의 애틋한 마음을 그려볼 수 있다.

 

이 감상문은 나름 기형도 시인과 비슷한 추억이 있어 끄적여 봤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EL1AQQU0MpY (꽃구경가요/장사익)

 

  아들 등에 엎혀 마을을 지나 산 속으로 들어가는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을 고려장하려고 집을 나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심에도 아들이 혼자 집으로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 봐 걱정이 되어 솔잎을 따서 가는 길마다뿌려주고 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부디 천년이고 만년이고 기다려주세요. 꼭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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