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처럼 여기던 신발도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한마디 말도, 단 1초의 눈맞춤도 없이 엄닌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다. 이 모습은 강촌 주변 오지 마을을 차를 타고 돌아보며 고갯길에서 담은 모습입니다. 강원도 촌넘이라 그런지 엄니를 닮아서 그런지 사람 많은 곳보단 자연과 교감하며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 좋다. 입안에는 엄니 군것질거리 중 하나인 '바나나킥' 과자를 녹이고 있다. 귀에 꽂아드린 꽃은 찔레꽃이다. 이곳은 '가평대교'에서 쭉 우측 강변으로 따라가다가 강촌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내가 난생처음 엄니에게 사드린 신발. 20여 년이 넘도록 아끼느라 신지 않아 바닥은 아직도 생생하다. 건강하실 땐 아끼느라 못 신고, 아픈 뒤론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느라 못 신었던 신발이다. 엄니의 흔적이 묻어 있어 두고 본다. 엄닌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몸인데도 신발이 낡으니 실로 꿰매도록 이 신발에 애정을 갖고 아끼셨다. 먼 훗날 나도 하늘로, 아니 엄니 곁으로 돌아가는 그 날 엄니 신발을 꼭 갖다 드릴 생각이다.
윗 사진을 보고 그려 본 왕초보 그림이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본 뒤 처음이다.
엄니 마음이 묻은 낡은 신발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다. 새 신발이(신발에 표정이 없다) 되었다.
이 그림은 초등학교 6학년 늦가을 쯤 일이다. 김장한다고 안마당 부엌 앞에 커다란(한 아름 넘는) 항아리를 씻어놓은 걸 내가 건드려 그만 항아리가 넘어져 깨졌다. 그러자 아버지가 몽뭉이를 들고 쫓아와 삼십육계 줄행랑하여 논판으로 달아났다. 벼를 베어 말리려고 논에 쌓은 볏단 더미 구석에 숨어 앉아 훌쩍이니 그래도 늘 나를 따르던 우리집 '메리' 찾아와 위로하듯 지켜주었다, 워낙 큰일을 저질러 두려움에 밤이 이숙하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달이 떠서 기울도록 울고 울었다. 꼭 '내가 돈을 벌어서 항아리를 사드릴 테야' 다짐하면서도 서러움에 밤하늘 달을 보고 울었다.ㅎㅎ 그때 시골에서 아이들의 돈벌이는 마을 약수터에서 요양하는 사람을 상대로 뱀을 고아 파는 뱀집에 뱀을 잡아다 주면 한 마리에 몇 백원씩 주었다. 시골에서 자라 뱀 잡는 일은 곧잘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항아리 가격은 몇 천원 하였으니 시골살림엔 작은 돈이 아니었지 싶다. 늦은 밤(아마 9시쯤) 뒤란 울타리 사이에 난 쪽문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니 그때까지 엄닌 웃방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주무셨고 엄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항아리는 사드리지 못했지만 여름방학이면 뱀을 잡아 팔아 엄마에게 꼭 돈을 갖다 드리곤 했다. 돌이켜 보니 웃음도 나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ㅠㅠ
달도 잘못 그리고. 방향도 안 맞고...ㅋㅋ (교수님이 속으로 얼마나 웃으실까?) 애써 가르쳐주니 엉뚱한 그림만 그린다고 나무랄 듯싶다. 그러니 어떡한담! 이야기는 모두 이해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말이다.ㅋㅋㅋ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남포등 아래 엄닌 늘 늦은 밤까지 맷돌을 돌려 다음날 먹을 옥수수 쌀을 만드시곤 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벼농사는 지어도 워낙 식구가 많아 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75년도에 전기가 들아왔다. 전형적인 기억 자 집이었다. 안방과 윗방은 누나들과 엄마와 나, 사랑방은 형들과 아버지가 썼다. 아랫방과 윗방 사이에 벽을 두고 문이 없는 출입구만 있었다. 그려보려니 초보 실력으론 감당이 안 돼 방 하나에 다 추억을 담았다. 벽에 걸린 남포등(램프의 일본식 발음이라 함. 호야라고 부름) 아래 엄닌 윗방에서 매일 큰누나와 또는 홀로 맷돌을 돌리곤 했다. 육 남매 어미를 표현하기 위해 한 곳에... 벽에 붙은 작은 상자는 유선 스피커. 당시 마을에서 유선으로 라디오 방송을 했다, 주로 뉴스와 연속극을 들려준 것 같다.(아주 어려서 기억이 가물가물)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이면 엄마를 따라 집 뒤 밭에 따라다녔다. 고구마밭에 물도 길어다 주고 김매기를 도와드리기도. 이 그림은 고구마 밭에 북(고구마 덩쿨이 자라면서 마디에 내린 뿌리를 들추고 흙을 덮어줌)을 주기 위해 '후치'라는 작은 쟁기(사람이 끈다. 민속자료에서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만 썼다고)를 아버지가 앞에서 끌고 엄마가 뒤에서 밀며 흙을 돋우곤 북을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흥미롭고 신기했다.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는 기꺼이 소가 되어야 했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도 모르고 홀로 자란 듯 아버지 말씀을 흘려듣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했으니...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하고 상처가 되었을까!
다시 잘 그리면 제목을 <만종>이라고 붙여주고 싶다. 이 장면을 기억하며 시 흉내를 내기도 했다. 충분히 연습하여 좀 더 그 날의 의미를 재현하여 책에 넣어드리고 싶다. 고구마 넝쿨을 그려보려 했는데 한 달도 더 걸릴 듯하여 포기했다.ㅎㅎㅎ
엄니가 거동이 불편한 뒤 집안에 계실 때 어느 봄날 엄니랑 롯데마트에 가서 분홍색 스웨터를 사 드렸더니 늦은 밤까지 좋아서 누웠다가는 다시 일어나 입어 보고 벗어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아래 글은 그날을 추억하며 쓴 글이다. 할머니를 그려야 하는데 젊은 엄마가 되었다. 난 늦둥이 막내로 자라 젊은 엄마를 보지 못했다. 다섯 살 때 엄마와 찍은 사진을 보면 할머니 같다. 이 그림은 실패작이다. 연습으로 그렸으니 다시 몇 번이고 그려야 될 듯하다. 고양이를 그린다는 게 큰 쥐가 태어났다. ㅋㅋㅋ
서랍장
텅 빈 안방 홀로 지키며 그리움에 지쳐 묵언 수행 하는 걸까. 차마 안쓰러워 눈길조차 줄 수 없는 너. 어느 가을날, 후미진 담벼락 아래 덩그러니 알몸으로 떨고 있는 너를 업둥이라 여기며 운명처럼 한 식구로 받아들인 네게, 참 예쁘다 곱다 하시며 고운 물수건으로 너의 온몸을 구석구석 닦아주시던 어머니. 행여 다친 곳은 없을까, 행여 다시 버림받을까 떨고 있는 너를 약손처럼 쓸어주며 안아주시던 어머니.
세월이 가며 네게 쏟는 사랑이 깊어갈수록 속정까지 들어버린 너. " 버리면 죄 된다."는 어머니 말씀에 차마 너를 다시 보낼 수 없었지. 새 아파트로 이사 하면 예쁜 화장대 달린 서랍장 하나 사 드린다던, 그 약속 잊으시고 별이 되신 어머니. 죄인은 밤마다 별을 찾아 속죄의 길을 떠나지. 넌 이해할 수 있겠니? 나 대신 어머니께 용서를 빌어다오!
기억나니? 연분홍 스웨터를 사 드리던 어느 봄날, 어머닌 네 품에 안긴 스웨터를 입었다 벗었다 하시며 달빛 물든 창가에 앉아 소녀처럼 흩날리는 벚꽃이 되어 밤새도록 좋아하셨지. 이십여 년 세월 어머니와 동고동락했던 너. 때론 신발장이 되어 흙 묻은 어머니 털신도 품어주고 인고의 세월 어머니 손때 묻은 기억 부스러기도 기꺼이 안아주었던 너. 그리움에 지친 텅 빈 몸으로 이젠 누구를 기다리길래, 그 빛나던 살결도 빛을 잃고 품속에 채웠던 모정(母情)의 세월도 비워버리고 온종일 창밖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니.
2015년 09월 05일 (토) 밤. 흐림 빗방울
엄마가 처음 쓰러지신 뒤 어느 날 엄마 손을 찍어드렸다. 육 남매 기른 거룩한 손이기에 먼훗날 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사진을 보고 그려봤는데 역시 한계를 느낀다. 닮지도 않았다. 글은 지우고 다시 쓰면 되는데, 그림은 한 번 그르치면 다시 지울 수 없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그림 그리는 분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마지막으로 잡아 드린 엄마의 손... 저 손으로 육 남매를 키우셨다.
손을 잡아드린 뒤 13시간 남짓 되어 하늘로...ㅠㅠ
이 사진만 보면 눈물이 난다.
수많았던 나날 당신의 헌신으로 육 남매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어 고맙고 마음아리고!
집에 식구들이 아프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엄닌 뒤란 장독 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천지신명께 축수(기도)를 올리시곤 했다. 자식 낳은 어미의 죄로 행여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늘 노심초사 어미의 걱정은 밤낮이 따로 없으셨지 싶다.
장독대 주변에는 늘 맨드라미와 봉숭아를 심었다. 빨간 색을 지닌 꽃들이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울타리는 장독대와 붙어 있었는데 초보라.ㅎㅎ 울타리에는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개나리, 뽕나무, 사철나무 등 나무도 많았지만, 왕초보라! 울타리에는 매년 나팔꽃, 강낭콩을 심어 올렸고 해라기도 해마다 심었다. 마음은 모두 넣어주고 싶었는데 겨우 해바라기와 복숭아나무만 흉내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이것 보다는 더 표현을 잘하던데!
그래도 난 그림을 그리며 추억여행을 떠날 때마다 행복하다.^^
엄니가 아끼고 꿰매 신던 신발과 분홍색 스웨터. 늦둥이 막내가 사 준 거라고 꼭 그 신발, 그 스웨터만을 고집하셨다. 형과 누나들이 사 준 더 예쁜 옷과 신발도 있었는데. 엄닌 천상에서 기억이나 하실까? 이젠 모두 그리운 추억만 남을 뿐이다. 꽃과 인형, 동물과 아이들을 좋아하셨던 울엄니. 이 사진은 어린이날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 야외행사장에서 담은 사진이다.
다큐맨터리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 김기덕> 삽입곡- 강원도 아리랑(울엄니 애창곡이었다)
이 영화를 문예창작학과 <문학과 영화>강의시간에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며 얼마나 울었던지...ㅠㅠ
인생의 사계를 대사(말) 없이 감동적으로 담은 김기적 감독의 작품성에 놀랐고 하늘로 떠난 엄니에게 좀
더 살갑게 해드리지 못 한, 좀 더 함께 놀아주지 못 한 회한에 울었다. 그리운 어머니! 막내가 보이시나요?
2016년 4월 01일 금 맑음
'♣ 웰컴 투 봄내골 ♣ > ♥어머니 영전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맷돌 (0) | 2013.10.08 |
---|---|
그곳에 가면... (0) | 2013.10.08 |
KBS 인간극장 '이ㅇㅈ' 작가님, 약속을 못 지켜... (0) | 2013.10.08 |
엄마, 하늘나라에서도 이 막내가 보이시나요? (0) | 2013.10.07 |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읽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0) | 2013.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