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라는 이름이 주는 유년의 기억들
간만에 그것도 아주 간만에 유년의 기억들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시골 깡촌인 고향이라는 곳을 다녀 왔습니다.
갈수록 인적 끊기고 사라지는 집들이 늘어나는 우리네 시골동네들...!
내 고향이였던 마을에서도 어김없이 폐허같은 빈집들과 허물어진 골목 담벼락들만
가슴 아린 허전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옛날 유년의 기억들을 되돌아보는 고향마실...!
오늘은 사라져가는 고향 뒷골목들을 거닐면서 옛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고향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태어나 자라난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지금의 내 아들 세대들에서는 이제 고향이라는 단어가 어떤 말인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짙은 추억들이 묻어나는 곳인지
절대로 모를 단어, 잊혀지는 단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이라는 이름을 들먹일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지금의 내가 아니던가...!
멸공방첩 포스터 : 삼천만이 살펴보면 오는 간첩 설땅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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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City ...?
가장 먼저 회자되는 곳이 완도의 청산도 일게다.
그리고는 담양의 덜 떨어진 허술한 담벼락마을인 창평..ㅎㅎ
적어도 Slow city 라고 하는것이 천천한 느림의 미학인지
아니면 소외되고 더딘 발전을 보였던 곳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할것이면...
분명
내고향의 시골마을도 느림의 미학을 담아낼수 있는 슬로 시티쯤 되지 않을까..ㅎㅎ
지금도 그렇지만
이곳 삼화마을이라는 곳은 문명의 발전이라는것이 해도 해도 더딘 곳이였던듯 싶다.
초등학교 다닐적에 이 마을에 전기라는 것이 들어 왔으니...
깡촌 중에서도 이런 깡촌이 또 있을까..ㅎㅎ
호랭이가 살고 있다던 화방산
마을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조그마한 산이다.
칡이나 다람쥐를 쫒아서 올라 다녔던 곳
어쩌다가 산 뒷편으로 넘어가면은 호랭이가 살았다는 깊은 동굴들도 만날수 있었는데
그곳은 우리들의 은밀한 숨은 아지트가 되곤 했었던듯 싶다.
시커먼 동굴속에서 느끼는 은밀한 공포감까지 더해서
우쭐하고 철없는 용맹스런 무용담까지 더해지곤 했었지...ㅎㅎ
지금은 정상적인 산행 등로들로 개발이 되어서 제법 찾는 산객들도 많은 모양인데...
정작 나이를 묵어버린 산꾼인 내가 아직껏 ...이곳이 미완의 등로라니..ㅎㅎ
아직도 고향이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허물어지고 누추한 시골집들도 더없이 정겹고 소중한 모양이다.
비록 유년의 기억들이 고스란이 남아있어야 하는 내 집들의 흔적들은
완벽하게 감춰지고 없다지만 고향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정겨운 모양이다.
이집은
고향이라는 끈을 연결하기 위해서 이번에 구입한 집이다.
귀농처럼 고향을 지키겠다는 거창한 객기도 아니고
유유자적한 노후를 텃밭을 가꾸면서 살아보겠다는 풍류의 계획도 아니다.
단지
어쩌다가 가끔은 고향에 들러서 하루쯤 유하고 싶을때 맘 편히 쉬어가고 싶을 뿐이다.
년중 ...몇번이나 갈런지는 미지수 이지만..ㅎㅎ
어쨌거나 기억마저 희미해져가시는 어머님한테는 더없이 좋은 쉼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앞에 보이는 것이 보리밭일까..?
예전같으면 지금쯤이면 보이는 모든 논들에서 보리들이 갈아져 있을텐데...
다른 농촌의 풍경들은 어떨런지 몰라도 지금의 내 고향에서는 한없이 푸르름을 보여야할 보리들이 보이질 않는다.
보이는 것은 소들에게 먹일 풀들 뿐이다.
이제는 애써 논밭에 보리를 갈지(심지) 않는다고 한다.
애써서 농사를 짖는것보다는
년중 수입을 창출할수 있는 공장으로 시골촌부들의 발길들이 옮겨버린 탓인게다.
강진읍내로 마을 아줌씨들이 농사들을 뒤로하고 미역공장 일을 하러 간다나...ㅎㅎ
그때는 단감이라는 것들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다.
온 동네를 뒤져도 몇구루 찾을수가 없었으니...!
떫디 떫은 땡감들이 먹을것들의 전부였을 것이면은 ...이 단감이라는 것은
이곳 아이들한테는 뿌리치기 힘든 대단한 유혹이였으리라..ㅎㅎ
차마 단물이 올라오기도 전에 몰래 숨어들어서 다 떠 먹어버리곤 했으니..ㅎㅎ
말이 단감나무이지 단감 지 맛을 보여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싶다.
아마
그때는 단감보다는 이땡감을 소금물에 우려( 소금물에 담아 놓으면)놓으면 아주 무심한 맛들이 만들어 지는데
이게 우리들이 먹었던 가장 사치한 먹거리들이 아니였었는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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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내 집터에서 보이는 동백들과 이름모를 방울꽃이다.
이동네의 가장 윗쪽에 터를 잡았던 어린시절의 우리집..!
지금은 애써 그 흔적들을 찾아 볼려 해도 결코 쉽지가 않다.
집 뒷에 거목처럼 버티고 있었던 땡감나무만이 간신히 찾을수 있을뿐...
이제는 완벽하게 자연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이건 건물이건 찾는 흔적이 끊기고 세월을 묵으면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것이거늘....!
왜 우리네 봉분들에서는 자연스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토록 거역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 이곳이 이마을의 윗골목이였구나...!
우에골목, 가운데골목, 아랫골목
이마을을 한복판으로 가르는 골목들이 이렇게 세군데나 되었던것을 보면
그때는 이 초라한 마을에서도 제법 사람들이 모여 살기는 했던 모양이다.
하긴 ...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30-40명쯤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을 보면은....
그렇게 작은 마을만은 아니였던듯 싶기도 하다.
지금은 다들 떠나고 빈집들과 허물어지는 담벼락들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그때는 이 골목길들에서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떠나질 않았었는데......
딱지치기, 반란순경, 상수리로 구슬치기, ....!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같은 창고건물..!
신기할뿐이다.
고향 떠난지가 30년은 훌쩍 넘었을진데도...
이 장승같은 창고건물은 아직껏 그자리 그 모습으로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니..ㅎㅎ
그래도 지붕은 그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지 무거운 기와에서 가벼운 양철지붕으로 바뀌였네..!
이곳은 한시간씩 걸어가야만 했던 국민학교 가는길의 1차 집합 장소이기도 했다.
늘상 이곳에서 동네 아그들이 모아지고 나면 그나마 고학년 형들의 인솔에 따라서
그 멀기만 했던 학교까지 쫄랑 쫄랑 따라가곤 했으니...ㅎㅎ
해서
이곳은 아그들의 가장 중요한 놀이터이도 했을뿐더러
놀이문화의 핵심공간이였던것은 당연했을터..
저 조그마한 처마밑에서 주머니에 코 묻은 딱지 가득 담고서 딱지치기할 다른 친구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촌시런 한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다.
아부지가 4남중 셋째이셨고...
또
고모들도 몇분 계셨던듯 싶은데..너무 어릴적 일이라서 그런지..기억이 선명치를 못하다.
그 큰아부지, 작은아부지들에서 태어난 형제들중 내가 가장 막내였다.
지금의 항렬이라는 잣대로 들이대면...
이곳 마을에서는 왠만한 사람들은 다 내 조카들이였는데..ㅎㅎ
그때 시절에는 나이묵은 할아버지 , 아저씨들이
나한테서 " 당숙이니" "아재니" 하는 소리들을 왜 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는 거북함이였었다.
사람흔적 떠난지 오래된 이 빈집은
어려서도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는 큰아부지 집이다.
사촌형을 큰아부지인줄 한참커서야 알았는데...
어쨌든
이곳 큰아부지 집은 장손집이면서 삼천석은 아닐지라도
이곳 마을에서 랭킹을 다투는 부자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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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이면 셀수도 없을만큼 이어졌던 장손집의 제사들...!
제사가 한번 치뤄지는 날에는 3일 밤낮을 준비하고 일가 친척들을 맞았으니..ㅎㅎ
참... 그 장손의 며느리( 한참을 할머니가 되신 형수님이제...)...!
하긴...그때는 손님도 아닌것이 삼일 밤낮을 이곳으로 드다들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놀았으니...!
그 대단했던 부자집의 궁궐같은 집들도
인적 떠나고 발길 끊기니 폐허처럼 무너지는것은 아주 순신간의 일인 모양이다.
반들 반들하던 토방도 , 앉을 자리 없었던 마루들도
한없이 튼튼할것만 같았던 사랑체들에서도...
부엌이라는 지방 사투리가 정게, 정재 라고 했던가...!
이제는 그 옛날의 부엌들의 모습들도 찾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이 조그마한 부엌에서 갈쿠나무, 석유곤로에 의지해서 그 많은 식솔들과 손님들의
삼일 밤낮의 식사들을 준비 했으니..ㅎㅎ
지금의 조그마한 집안 대소사를 치뤄내면서도 이러니 저러니 말들 많은
며느리들과 비하면...ㅎㅎ
하긴 그때는 그리들 살았으니까...!
초등학교를 다닐적에서야 이곳에 전기라는 것이 들어온 곳..!
어렸을적 초가집에서 호롱불이라는 것을 켜고 살았던 곳
낸중에 핸드폰 세상이 되어도 이곳 마을에 들어오면 늘상 불통이 되었던 곳
강진 읍내까지 나갈려면 군내버스를 타기위해 30분을 더 걸어나가야 했던 곳
바로 이곳이
내가 유년을 기억하는 고향이라는 마을이다.
지금에서야 이곳 깡촌 마을에도 도로 포장이 되었고
어쩌다가 조그마한 마을버스들도 드나드는 모양이지만...
그때는 이렇게 완벽하게 숨은 깡촌이 또 있었을까 싶은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자리가 한때는 잘나갔던 우리 아부지 집이였다는데...
또
멀리까지 펼쳐지는 들녁 어딘가에는 우리네 논댕이도 조금은 있었다는데...
사람 떠난 지금에서는 누가 이 많은 논댕이들을 벌어먹고 사는지...?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보는 마을의 가운데 골목과 마을 전경, 그리고 마을 뒷산들
해년마다 갈쿠나무( 소나무 마른 잎 )하러 저 뒷산을 오르내렸던 식구들...!
한뭉탱이씩 긁어모아서 머리에 이고 날랐던 갈쿠나무...ㅎㅎ
갈쿠나무 하러 온식구들이 떠난 빈집을 어린아들만 한없이 고픈배를 움켜쥐고 지키고 있었다는...!
그 갈쿠나무 산이 누군가의 불장난으로 온통 헐벗어서...아주 민망한 민둥산이 되어 버렸네
도데체 누가 그런거야..ㅎㅎ
이제는 갈쿠나무하던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보까...!
강대바구
그 옛날 어느 시점에 갈갈이 사건이 있었다는 전설같은 괴담에 이곳 강대바구(지금은 광대바위, 큰바위얼굴이라고 함)에
갈때마다 왠지 등골에서 찬바람이 일곤 했던 곳이다.
사람 얼굴형상을 하고 있어서 성제바위(형제바위)라고도 불렀던 이곳들이
때아닌 산객들의 인기를 불러 일으키는 모양이다.
강진읍내로 가는길들과 마을어귀에서도 큰바위 얼굴에 대한 이정표들이 든실하게 붙여져 있는것을 보면..ㅎㅎ
그때는 이곳 광대바위 가는 길옆들에도 척박한 전답들이 많이 있어서
굼주린 나락 몇섬을 위해 힘겨운 언덕들을 오르내리곤 했었는데...ㅎㅎ
깨금과 산딸기가 유독 많았던 이곳
이제는 이 전답들도 사람떠난 집들과 마찬가지로 흔적없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것은 아닌가 싶다.
다만
화방산 산행 들머리로 알려지면서 그나마 몇몇의 산객들이 찾아오는 것이 전부일뿐
어쨌든
조만간 이 성제바위와 화방산에도 유년의 기억들을 내가 직접 더듬어 보아야 하는것은 아닌지...!
그 유년의 그리움들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면서 지내는지...?
같이 했던 그리움들이 그 유년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과 연락이 없으니...!
보고 싶다.... 내 어린 유년의 기억속의 친구들아...!
촌시런 멀마들이였던 춘현, 인구, 정순, 그리고 나..!
또 한없이 곱던 기집아들인, 애경, 경심이였었지..?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일게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이
오늘따라 장황한 글들이 끝도없이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읽어주기보다는 나 자신의 유년의 기억들을 더듬어 보는 가슴 따뜻한 시간이였습니다.
공감하여 읽어주신 분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출처 : 돌머리의 산 길 헤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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