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으로 찾아가는 고향  풍경들

  고향....!

  모든 사람들이 고향이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닐진데...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라는 짐승들도 고향을 그리워 한다는데

  지금은 현대인들도 고향이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그리워

  하기는 하는 것일까...?

 

  하물며..

 지금의 내 아이들한테서 고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아니,

 고향이라는 단어는라는 것을 알기는 하는 것일까..?

 

 지가 그곳에서 나고 자라서,  깨복쟁이 유년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이름 할거면은

 분명, 요즘 아이들의 고향은 잊혀져가는 옛 단어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지 싶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아파트 숲속에서 자라고 

 이사라는 것을 밥먹듯이 자주하는  작금의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방식들...!

 유년의 기억이라고 해봐야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만나는 또래들이 일시적으로 만나서 아파트 숲속 조그만

 놀이터에서 아옹다옹 놀았던 기억이 전부일텐데..ㅎㅎ

 예네들한테서 고향이라는 것을 운운한다는 것은

 나이묵은 아저씨들의 캐캐묵고 덜떨어진  촌시러운

 넋두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어쨌든 고향이라는 단어들도

 386 세대라고 하는 지금의 세대가 지나고 나면

 사라져갈 그런 잊혀지는 문화나 단어들이 되지 않을까.?

 

 유교적인 제사의식도...

 부모님 계시는 시골집을 찾아서 그 힘겨운 고향방문을 

 하게되는   정겨운 명절날들의 추억들도...!

 또

 유년의 기억을 되돌아 볼수 있는  고향이라는 이름들도..

 

 해서..

 오늘은 허물어져가는 폐허같은 고향마을 뒷 골목들을

 추억삼아 살방 살방 둘러 봅니다. 

  그 옛날 언제쯤에는 고모집이였는데...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조그만 마을의 윗골목에는 이런 기와 얹힌 흙담길이 길게 이어졌었다.

마을 제일 윗집에 살았던 우리집이였을거면

윗길은 무던히도 많이 걸었겠지...!

 

이제 사람떠난 마을에는 허물어지는 담벼락도 무너져서 폐허가 되어가는 집들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젊은 사람 찾아보기 힘든 농촌 조그만 마을 풍경이고 보면

이런 고상한 담벼락에 신경쓸 심적 여유도 체력도 없겠지...!

ㅎㅎ..!

철지난 새집이네..

아주 쪼맨한것이 조그만 뱁새집이나 되는 것일까..!

아슬아슬한 나무들을 기어 올라서 이 새집들을 털어서 알을 훔쳐 내려오곤 했었는데..

먹을것 없었던 시절..이 새 알들 훔쳐서 쌂아 먹기도, 또 너른 돌판에 후라이를 해먹기도..ㅎㅎ

어쩌다가는

비둘기 알이나 꿩 알들을 훔쳐올수 있는  거의 대박같은 횡재를 한 날들도 있었다는....ㅎㅎ

 

 

마을 공동우물이 몇군데 있었는데 이곳 삼화정은  마을 윗쪽 살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을 했던 곳이다.

모든 일상생활이 다 이루어졌을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

대부분의 집들에서 개인적인 식수들을 해결할수 없었던 시절을 지나올 때였을 거면은

이 곳에서 각 집안들의 대소사가 전부 이루어 졌었던것은 당연 했겠지

단순한 샘물이 아닌 동네 어머니들의 중요한 생활의 필수공간으로서..

아마...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들어갔거나 들어가기 전부터서

이곳에서  양쪽으로 물통이 달린 물지게를 져 날랐던듯 싶다.... 물지게..ㅎㅎ

 

지금의 노모께서는 이곳에서 한겨울에도 맨손으로 늘상 빨래를 하시곤 했었는데...

 

강아지가 지키고 있는 멸공방첨 글귀가 써진 건물은 통샘이라는 샘으로 동네 목욕탕으로 변신을 한곳이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그때 박정희 정권시절에  새마을 사업 일환으로 정보 보조금으로 지어 졌다고 한다.

 

두 샘터들이 매워지고 허물어지질 않아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ㅎㅎ

     천년묵은 고목이 더없이 멋드러진 사찰...강진 화방

    화방사는 고려시대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가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보은산 고성암과 함께 지은 화방암이 그 시초이다.

    화방암은 뒤에 화방사로 고쳤으며, <강진현지>에 기록된 나한사(羅漢寺)가 곧 지금의 화방사로 나한도량 이었다.

    또한 화방암은 1876년(고종 13년) 화주 경신스님이 새로 중창하고 다시 1888년에 화산 스님이 중수했다.

    그리고 1912년에는 태흥 스님이 삼존묘상과 16진용을 모셨는데, 당시 절의 모습이 지금과는 달리 자못 화려했다고 한다.

    최근 새로 지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구조이며, 특기할만한 것으로 1917년에 세워진 천불산

    화암사 사적비가 있다. 이비는 대흥사 스님으로 초의선사 제자인 원응 계정(圓應戒定)스님이 지었는데 만덕산 백련사의

    연혁과 함께 화방암의 기록이 남아 있어 강진 불교 역사 연구에 귀중한자료가 되고 있다.

 

강진 화방사에 피여있는 황매화꽃이다.

절을 지키는 스님 한분없이 텅 비어버린 소담스런 절간

 

작년에 올때만 해도   폐허처럼  폐허처럼 나뒹굴던 스산함이 오늘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강진군에서 문화재 보상차원에서 청소를 할것은 절대 아닐것이면

분명 초파일이 가까워졌음이 아닌지...!

이 소담한 절간을 지켜야 할 노(老) 스님..!

젊은날의 방탕을 뒤로하고 지금은 초로의 노스님이 되어서 이 소담스런 절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절터 벼랑밑에 컨테이너 박스 한 동 옮겨놓고서  칩거를 하고 계신단다.

 

이제 초파일이 되면은 그날에는 절간으로 올라 오겠지만...!

 

오늘도 스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ㅎㅎ

      

 

 

 

 

 

 

 

 

 

 

 

 

돌담길 따라가는 길 끝에는 만개한 함박꽃이 화려게 피였다.

한때는 이곳이 아버지의 누님집이였었는데...

지금은 누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지

그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 돌담들과 감나무들이다.

빨간 양철지붕집은

한때 이마을의 모든 나락들을 찧었던 방앗간이면서 큰 아부지 집이였다.

그 어마어마했던 방앗간이 지금은 왜 이리 작고 초라하기만 한지..ㅎㅎ

 

 

 

 

 

        ▲ 함박꽃

 

살았던 집이 이 마을 가장 윗쪽에 자리를 했으니

이산은 완벽하게 우리집 뒷산이였네..ㅎㅎ

동네 꼬마녀석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 싸가지 바위를 오르곤 했었는데

참..!

 싸가지바위..!

이름이 어떻게 해서 붙여진것인지는 안타깝게 잘 모른다.

괜히 붙여진 이름은 아닐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늘 싸가지 바위라고 부른다.

 

그 오랜세월동안 한번도 불러보지 않았는데도

싸가지 바위라는  이름이 입에서 그 옛날처럼 불려져 나오는 것이 그저 신통할 따름이다.

 

이 바위를 기점으로 동네 아그들은 그들만의 숨은 아지트도 만들고

고작 꺽어진 나무가지를 총이랍시고 허리에 둘러차고서  총싸움 놀이에 열중 했었다.

장총도 만들고 따발총도 만들고 또 권총도 허리춤에는 하나씩 차야지

물론 대장도 , 소대장도 만들고  더 나이어린 동생들에게는  쫄병계급장도 만들어 주었다..ㅎㅎ

하긴...

활싸움도 했었네... 이 숲속에서..ㅎㅎ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수수깡 열매 줄기나 신우대로 살을 만들어서

싸가지 바위가 있던 산들을 온통 헤집고 다니곤 했었는데......

 

이싸가지 바위를 비롯한 마을 주변 산들이 작년에 마을 할머니의 실수로 이렇게 꼬실라져 부렀다

이제는 이  마을 뒷산을 헤집고 다닐 아이들이 한명도 없으니...

한없는 원시림 숲으로 변해 가는데...

어쩌면

불이라도 이렇게 난것이  잘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어온다.

 

 

 

 

 

 

마을 앞 너른 벌판에 푸른 목초지처럼 펼쳐져 있는 이것들

소먹이를 위한 여물로 변할 풀이란다.

예전이면 이곳에서 벌써부터 벼농사를 위한  물데기가 한창이였을텐데

그 기름졌던 논밭들이 쥔을 잃고 소들의  먹이를 위한 풀밭으로의 변신이라니..

 

그 여물들 가운데 붉은 꽃들은 자운영이다.

작년까지만해도 휴농기에 이 자운영을 권장 재배를 했던 모양이다.

그중 몇알의 씨가 남았던지 푸른 풀밭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너무 다가가지 않고서도 꽃들의 사진을 담아낼수 있는 생각의 전환쯤 ..ㅎㅎ

         ▲ 유체꽃

 

시골 장독대 옆에 곱게 자란 금창초란다.

그렇지 않아도 이것들을 눈여겨 보고 있는데

사진으로 담을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금창초는 땅바닥에 완벽하게 달라 붙어 있어서 뒷 배경처리를 깔끔하게 하거나

분리를 시키기가 힘이 드는 꽃이다.

 

이 장독대가 있는 조그만 집을 고향 그리울때 별장처럼 찾아볼수 있도록

구입을 해 두었으니...

 

앞으로는 이 촌시런 향수병으로부터 해방이라도 될른지..ㅎㅎ

▲ 대파 꽃

  

출처 : 돌머리의 산 길 헤매이기
글쓴이 : dolpak 원글보기
메모 : ㅎㅎ 넘 좋아요 특히 봄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언덕 위에 앉아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는 정취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년시절의 행복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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