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은 왜 술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을까?
경춘고속도로 하행선 동홍천IC를 지나 속초로 가는 국도변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 156번 길, 옛 행정명 상동리 415-1번지입니다. 60년부터 80년대까지 연정(戀情)에 빠졌던 분이라면 한 번쯤 읊어보았을 어느 멋쟁이의 시(詩) 한 수를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출처: https://youtu.be/uLlg5_7hbxs?si=6fi9QWVpTxvndrYi (영상시-편집 옮긴이 추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않는다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않아도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 시는 박인환(朴寅煥ㆍ1926~1956)이 쓴 ‘목마와 숙녀’입니다. 1926년 8월15일 소양강 상류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 강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평소 흠모했던 이들이 셋입니다. 영국 시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 프랑스 작가 장 콕토(1889~1963),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입니다. 저는 박인환의 시를 요즘 문체가 아닌 발표 당시 그대로 실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바지니아 울프’라는 표현이 더 정감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만가(輓歌)라고 하지요. 대체 박인환은 왜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이 시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고 넘어가지요.
목마와 숙녀를 쓴 아크릴판 한가운데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친다.
박인환이 한창 시인으로 재능을 꽃피우던 시기는 6ㆍ25의 상흔(傷痕)이 뚜렷이 남아있던 1950년대입니다. 그야말로 허무와 불안의 시기였습니다. 흔히 문학사를 보면 우리 세기말, 혹은 국가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페스트 같은 대규모 질병이 창궐했을 때 허무주의가 강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우리 문학사에는 ‘창조’ ‘폐허’ ‘개벽’같은 동인지들이 등장하는데, 이 창조나 폐허나 개벽이란 단어가 실은 같은 정조(情調)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00년 조선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자,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고 국토마저 일본에 빼앗기며 문학인들은 허무주의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광복의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살육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으며 국토가 잿더미로 변한 6ㆍ25 직후에 허무주의가 강하게 대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인환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강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 끊은 울프의 비극적 삶과 자신이 살던 시대를 동일시했습니다. 바로 그 불안과 허무의 상징물이 ‘목마’라고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쓸쓸한 가을 속으로 목마를 타고 떠난 울프(숙녀)를 애도하며 박인환은 떠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별은 비록 삶의 행로(行路)를 밝히는 좌표이자 희망의 상징이지만 술병에서 부서지고 말지요. 이렇게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늙은 여류작가의 눈’처럼 세상에는 ‘등대에 불’, 즉 길잡이가 보이지 않았지요.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뱀’으로 상징되는 통속적인 욕망뿐이었습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 있다.
시를 읽고 나니 제가 속초 가는 길에 보았던 인제로 156번 길 박인환 문학관으로 들어가 보고 싶으시겠지요. 저 역시 한참을 지나쳤다가 무엇에 홀린 듯 유턴해 박인환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4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박인환은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습니다. 그에게 ‘인제(麟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던 산간 벽촌에
나는 자라서 지금은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할까 부질없고나(…중략)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박인환 문학관 바로 옆, 속초~동홍천 국도에 ‘박인환의 거리’가 있습니다. 한 병원 장례식장 바로 옆에 조성된 100m남짓한 거리지요. ‘장례식장’이라는 말과 요절한 시인의 생애가 묘한 연상을 자아내는데, 거기 이 ‘인제’라는 시가 적힌 흰색 철제 의자가 있습니다. 마침 여름 햇살에 이 시구가 땅에 비쳤지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인제’라는 시는 시인의 머릿속에서 ‘산간 벽촌’과 ‘가난’의 상징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봄이여 빨리 오라’고 외치지만, 시인이 떠난 지 한참 됐는데도 인제는 여전히 산촌(山村)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목마와 숙녀’의 허무주의와는 또 다른 한국적 정서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시입니다.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Photo by 이서현
당시 명동 문인들 '모나리자파'와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서울로 올라온 박인환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 뒤 14살 때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합니다. 이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면 꽤 공부를 잘한 학생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덕수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그는 전체 66명 중 7등이었는데 학교장은 ‘최적(最適)’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아주 우수하다는 정도겠지요.
인제 박인환 문학관 동상 앞에서 관광객이 사진을 담는다. 뒷편으로 얼굴 사진이 보인다.
박인환은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 내수동에 잠시 살다 원서동 215번지로 이사 갔는데, 당시 살던 집이 바로 창덕궁 서쪽의 용수산 비원점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제가 가보니 얼마 전 허물어져 지금은 폐허이며 바로 옆은 원불교에서 지은 ‘은덕문화원’과 카페 마고가 있습니다. 용수산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분께 물어보니 “얼마 전에 재개발하려 없앤 건물인데 그냥 있었어도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고 했습니다.
시인 박인환 얘기를 꺼내자 이러시더군요. “한 6개월 살았나?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라에서 나서야지, 민간인이 어떻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문학사의 주요 인물들의 자취가 이렇게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에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박인환이 ‘의사의 길’을 버리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은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그만두고 ‘말리서사(茉莉書舍)’라는 책방을 시인 오장환에게서 인수합니다. 영재들만 간다는 경기중학과 평양의전마저 중퇴하면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왔던 박인환에게 말리서사(요즘은 마리서사라고 부름)는 문단(文壇)이라는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교두보였다고 하겠습니다. 말리서사를 인수할 때 박인환은 아버지에게 5만원, 작은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렸습니다. 박인환이 서점을 연 것은 오장환이 운영하던 ‘낭만서점’에서 힌트를 받은 바 크다는 게 중론입니다. 당시 오장환의 낭만서점은 김기림-김광균-이시우 같은 쟁쟁한 시인과 소설가가 몰려 교류하는 장(場)이었습니다.
박인환이 문학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말리서사라는 이름의 유래를 두고 양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여성 시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와 어울린 파리 예술계의 중심인물이었지요. ‘말리’란 한자어가 일본 시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이름이 ‘군함말리(軍艦茉莉)’이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바람대로 박인환의 말리서사는 시인-소설가-화가-영화감독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우정을 다지고 예술을 논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바람대로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합니다.
내친김에 저는 박인환의 말리서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주소로 서울시 종로3가 2번지 말리서사는 탑골공원 바로 옆 좁은 골목이 아닌 동쪽으로 30m쯤에 떨어진, 승용차가 두대 정도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입구에 있습니다. 지금은 대한보청기라는 회사가 들어서 있는 스무 평 남짓한 공간으로 빨간색 건물이지요. 한때 이 땅의 청년들의 문학의 메카였던 곳이 지금은 연세 드신 분들의 공간이 됐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일요일 한낮이었는데 벌써 술잔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더군요.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니 뭐니 하는, 언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종로거리의 영락(零落)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인제의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명동이나 충무로 혹은 종로에 있는 것들입니다. 박인환은 이 말리서사를 1948년 폐업합니다. 아무래도 김경인-양병식-김수영 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하느라 서점을 운영할 시간이 적었던 게 아닌가 싶지만, 시인 박인환은 전성기를 맞지요.
한 살 아래인 이정숙과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그가 거주한 곳은 세종로 135번지인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교보문고 옆쪽 주차장입구입니다. 제가 가보니 이번에는 도로포장 공사를 하느라 얼마 전까지 있던 박인환 거주지라는 돌비석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없어지는 게 많은지. 공사를 하는 분들께 물어보니 “포장이 끝날 때까지 대림건설 본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박인환이 결혼해 1956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산 곳입니다. 그곳이 지금의 교보문고가 된 것을 보면 뭔가 인간의 운명(運命)이라는 게 꼭 존재하는 것만 같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박인환은 자유신문사(1948년)-경향신문사(1949년) 기자로 일하며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아메리카의 영화시론’ ‘사르트르와 실천주의’ 같은 글들을 발표하며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시키지만 한참 솟아나던 청춘의 시심(詩心)이 무자비한 포화(砲火)에 짓밟히고 맙니다.
바로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6ㆍ25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박인환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지냈습니다. 서울 수복이 되기 사흘 전인 9월 25일에는 장녀 세화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서울에 다시 국군이 진입한 이후 비로소 박인환은 가솔을 이끌고 대구로 피난을 갑니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간 박인환은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둔 뒤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 옛집으로 돌아온 박인환은 우리가 잘 아는 ‘명동시대’의 주역이 됩니다. 당시 명동에서 그가 드나든 곳은 다방과 살롱과 대폿집입니다. 50년대의 정취를 되살리며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먼저 박인환과 처음 인연을 맺은 선술집, 지금의 대폿집은 ‘유명옥’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충무로 4가에서 운영하던 유명옥은 빈대떡 집인데 김수영-박인환-김경린-양병식 등이 모여 ‘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훗날 박인환 동인집 ‘신시론 1집’의 밑거름도 여기였지요. 박인환은 밤에 유명옥으로 가기 전 ‘봉선화다방’에 즐겨 들렀습니다. 광복이 되자 명동에서 초기에 생긴 다방 중 하나 라는 봉선화다방은 고전음악 전문점으로 차 마시는 공간일 뿐 아니라 시 낭송,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종군화가 전시회, 음악가들의 작곡발표회까지 열린,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이었습니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봉선화다방의 과거 모습 역시 인제 박인환 문학관에 복원돼 있는데 무섭게 생긴 남녀 인형들이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듭니다. 봉선화다방 못지않게 박인환이 자주 들렀던 곳이 다방 모나리자입니다. 문인들의 회고로는 시인들은 이런 다방에서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한번 들러주길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글 쓰는 게 유일한 생계수단인 시인들이 신문사 편집국장 만나는 게 곧 돈 버는 길이었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동의 문인들은 ‘모나리자파’와 인근의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모나리자가 얼마 되지 않아 없어지자 이번엔 옛 대한중석 본사 바로 옆 ‘동방싸롱’으로 우르르 몰려갔다고 합니다.
모나리자와 관련해 박인환에게는 이런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박인환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술값이 모자라 맡겨놓았던 만년필을 찾아 친구였지만 유파(類派)가 달랐던 김수영에게 선물로 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지막을 짐작할까요? 박인환의 사례를 보며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저는 모나리자 다방의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흔적을 뒤져도 명동에서 ‘소공동 조선호텔 가는 방향’이라는 말밖에 없었지요. 대신 동방싸롱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방싸롱은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 명동점 바로 옆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푸른색 가림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원서동 집도, 교보문고 뒤 집터라고 새겨진 돌비석도, 동방싸롱도 하나같이 없어졌거나 공사 중이니 웬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최불암 어머니 명동 은성 주점을 차린 이유는?
그런데 1957년 문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김동근이 어린 아들과 밤섬에 뱃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불행이 닥칩니다. 주인이 없어진 건물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돌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얼마 전까지 치킨집-호프-당구장이 입주한 건물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연극인 이해랑이 카페와 주점을 운영했다는 이 역사적인 건물 역시 이제 과거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됐으니 우리 역사는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박인환과 명동의 추억을 되새길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포엠이란 위스키 시음장입니다. 박인환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렸는데 굉장한 멋쟁이였다지요. 얼굴 자체도 미남형인데다 초콜릿색 싱글 양복에 홍시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커피색 양말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포엠에서 즐긴 위스키는 계절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를 마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봉구는 ‘명동’이라는 글에서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곳은 은성이라는 막걸릿집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가 운영하던 은성은 명동 파출소 맞은 편으로 지금은 신발 판매장으로 바뀌었는데 앞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이명숙 여사가 은성을 차리게 된 데는 일찍이 청상(靑霜)이 된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과로로 숨지자, 외동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막걸릿집을 연 것입니다. 은성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병상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최씨의 회고로는 천병상 씨는 항상 입구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리에 앉을 엄두를 못 낸 것인데 누군가 “이리와 한잔하라”고 부르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냉큼 달려가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명숙 씨는 박인환 일행이 외상 갚을 생각도 없이 술을 요구하자 외상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지요.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70년대 낭랑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린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도 유명한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시가 완성되자 박인환은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넘겨 곡이 완성되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서슬 푸르게 외상값을 요구했던 은성 주인이 펑펑 눈물을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인환이 쓴 시는 은성 주인의 슬프게 끝난 과거 연애(戀愛)를 시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이봉구의 단편소설 ‘명동’에 나옵니다.
※ 저의 추측으로는 은성 주인이 박인환에게 은연 중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기에 즉흥적으로 박인환이 주인의 마음을 시로 그렸지 싶습니다.(편집 옮긴이 추가)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탤런트 최불암은 이 은성을 부활시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기인이사 1편’에 등장한 한옥 아티스트 안영환씨를 찾아 복원 방법을 논의했다지요. 그 계기는 안씨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당시 유진룡 문화관광부장관였습니다. 최씨의 사연을 듣고 유장관이 절친한 동창이었던 안영환씨와 연결시키준거지요. 안씨가 운영하는 한식점 ‘진사댁’과 일식점 ‘제주미항’이 옛 은성 맞은편,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씨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사댁 지하를 은성처럼 꾸며 주막처럼 잔 막걸리를 팔 생각도 해봤는데, 최불암 씨가 전체를 쓰고 싶어했어요. 그러면 주방을 옮겨야 해서 고민 중입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명동은 온통 중국인 관광객들 천지이지요. 거리에는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어 걸어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분들이야 생계를 잇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옛 추억이 남아있는 명동을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성 하나 복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박원순 시장이 노점상 생존권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 본류(本流)인 명동을 고급으로 부활시킨다면 중국관광객 유커(遊客)들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거양득의 정책이 아니겠습니까? 사라져가는 명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해본 생각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글쓴이 문갑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편집 옮김]:봄내지기 (일부 띄어쓰기, 내용을 첨부하였음을 알립니다. 개인적으로 인제 박인환문학관에 몇 번 다녀왔는데, 상징적인 의미는 있어도 자료가 부실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인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인환이 한국전쟁을 끝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자료가 많이 남아있을 리 없겠지만 문갑식 기자가 쓴 이 글처럼 박인환과 얽힌 추억담이라도 좀 더 많이 비치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 느티나무 쉼터 ♣ > ♥문학은 내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벽은 문이다/정호승 (0) | 2017.09.26 |
---|---|
아버지의 등을 밀며/손택수(영상시) (0) | 2017.09.12 |
목마와 숙녀/박인환(낭송:박인희) (0) | 2017.09.01 |
[특집 MBC 다큐] 잊지 못할 윤동주...그리고 추억여행 (1) | 2017.06.14 |
3.1절 특집-윤동주 편- 유일한 혈육 윤혜원 씨 증언 (0) | 2017.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