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ttps://www.youtube.com/embed/rFa-l8yFLLI

 

   시대의 암울함에 울분을 느끼면서도 서정성이 짙은 시를 남기고 하늘로 떠난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 유일할 듯하다. 윤동주의 시는 저항성을 지니지만 감정을 토로하듯 격하거나 직설적이지 않은 문학적 토대 위에서 내면의 울분을 은유와 고백으로 표출한다.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식민통치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양심을 고백한 그는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어린 나이에 보여준 심덕이 깊은 한국 문학사에 둘도 없는 본받을 시인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를 단지 식민통치 수단에 거부하여 우리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두고 생체실험으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반인륜적이고 파렴치한 제국주의(군국주의)자들의 피를 타고 난 후대 일본의 양심인들조차 윤동주 시인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유다.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슬 퍼런 식민통치시대에 그토록 꽃다운 젊은 나이에도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인으로서 피 끓는 조국애를 불태운 문학도이자 훗날 독립운동가와 다름없는 '사후 시인'으로 조명되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살신성인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외쳤다면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정신과 문학의 정신으로 젊음을 불사른 평화의 사도였다. 

 

   97년 어머니와 함께 중국 북경을 거쳐 1주일 동안 백두산까지 돌아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연길에서 용정을 거쳐 백두산에 이르는 여정에서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시 대성중학교에 있는 윤동주기념관을 잠시 둘러봤다. 기념관엔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교내에서 학생들이 발표한 시화를 벽에 걸어놓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인의 맑고 순결한 시정신이 가슴에 닿아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서시>의 시구 중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읽으며 눈물이 맺힌 추억은 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백두산 천지까지 돌아오는 여정이었기에 서시 속의 그 구절은 가슴을 후벼팠다.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아~! 이 얼마나 고매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윤동주 시인만의 자기성찰인가?  나는 사는 날까지 시구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그저 닮고 싶을 뿐이다. 

 

  그뒤 한국에 돌아와 대성중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기념관 안내를 맡았던 김영ㅇ 선생님과 한동안 오누이로 호칭하며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우리와 달리 중국 연변, 특히 용정에 사는 동포들의 가슴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조국애가 깊어 윤동주 시인의 삶을 존경하며 받들고 있다는 것을 영ㅇ 선생님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언제 다시 기회가 된다면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안고 추억의 그 길을 따라 백두산을 돌아본 뒤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 들러 경배하며 시인의 맑고 순수한 시정신을 받고 싶다. 그때 이젠 40대 중반의 엄마가 되어 교단에 서 있을 영ㅇ 선생님의 두 손을 잡고 서신이 끊어지게 된 연유와 용서를 빌고 싶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변함없는 '그때'의 몸이라고. 비록 인연의 끈은 맺지 못했지만, 그 마음만은 아직도 변함없이 추억으로 간직하며 배반하지 않았다고...

그날을 기다려 본다.^^

 

글쓴이 겸 영상 편집인:meister59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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