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에 나타난 종교적 상상력 - 유성호(문학평론가)
1. 윤동주 시와 종교의 상관성
우리가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적 양상을 추출하여 그것을 종교적 차원으로 의미 부여할 때, 특별히 그것이 특정 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칭하여 ‘종교 문학’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신라의 향가 문학이나 한용운, 신석초 등의 시편에 나타나는 불교적 성격,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서 역력하게 감지되는 유불선적 성격, 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나 ?목공 요셉?, 김은국의 [순교자],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보이는 기독교적 성격 등 이른바 종교적 소재에 바탕을 두거나 종교적 이념의 육화에 집중적으로 착목한 작품들은 모두 그러한 ‘종교 문학’의 범주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의 하위 범주로서의 ‘종교 문학’이라는 범칭(汎稱)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 문학이 끊임없이 종교적 흐름과 교섭해왔다는 첨예한 예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기독교’는 우리 고대, 중세사와는 별 인연이 없었으나 근대 이후 폭 넓은 자장을 형성하면서 커다란 정신사적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 이후 이 땅에 기독교가 이념적, 사상적, 제의적(祭儀的) 뿌리를 내린 데에는 수많은 투쟁과 견인의 역사가 있었고, 그 투쟁의 행간에 ‘전통과 보수/서구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라는 서양 종교의 유입과 착근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정신사는 그만큼 초유의 생산적 갈등과 변증법적 진보의 토양을 준비한 셈이 된다. 따라서 자생적인 것이 아닌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을 토대로 이룩되기 시작한 우리 근대사에서 이 종교의 영향력은 매우 커다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문학의 하나인 ‘기독교 문학’은 기독교라는 역사적, 이념적, 윤리적 기반과 문학이라는 감각적, 체험적, 형상적 양식이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되어 현출한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 문학’이라든가 ‘이슬람 문학’ ‘샤머니즘 문학’이라는 종교 문학의 하위 범주의 설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딱히 과학적인 변별력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이념이나 사상이 우성적으로 작품 속에 나타날 경우 그것들을 편의적으로 부르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폭 넓은 기독교적 전통을 모태로 태어난 서구 문학의 경우 그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기독교 문학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우리 문학에서는 짧은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 문학의 무게는 서구의 그것에 비해 일천하고 질량 양면에서 빈곤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문학사에 ‘기독교 문학’이라는 범주에 실질적으로 해당하는 작가 또는 작품의 실례가 영성할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러면 ‘기독교 문학’을 말할 때 그것의 필요 조건인 ‘기독교’라는 말이 갖는 실제적인 내포는 무엇인가 ?
기독교에서 낙원의 창조와 상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복원은 하나의 일직선상의 사관을 낳는다. 그것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편집 사관과도 일치한다. 창조의 질서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변환, 이행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역사관에서 배태되는 인간관, 우주관, 가치 중심, 이념 등이 ‘기독교’라는 수사에 응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존적인 자기 각성이라는 메커니즘과 윤리적 완성이라는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게 되는데, 따라서 기독교 문학에서는 심미성이 부차화되고 종교가 지향하는 관념의 형상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사랑, 소명 의식, 희생 정신, 부끄러움, 죄의식, 구원, 소망, 종말론, 실존 의식 등이 이른바 종교적 상상력에서 배태될 수 있는 정서적 세목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의 ‘기독교 문학’이란 그러한 여러 성격이 담겨 있는 문학을 통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교성(護敎性) 선전물이나 신앙 미담 및 간증류 또는 종교적 소재가 작품의 표면에 등장하는 것들을 모두 기독교 문학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높은 형상적 성취와 이념적 내재화를 이룬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문학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시’ 또한 문학의 구조적 차이에서 정립된 장르적 개념이 아닌, 시인의 상상력, 가치관, 통찰력 등에서 기독교적 요소를 지니는 내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종의 문학외적 요소가 중시되거나 문학을 선교 활동의 매질로 보는 도구적 개념은 우리의 입론에 해당되지 않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원래 인간은 신적이며 세속적이고, 본체적인 동시에 현상적이라는 이중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 본성 때문에, 세계는 모순되고 역설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 때문에, 세계에서, 세속적인 성격에서, 인간의 비참함에서 보면 신은 부재하지만, 인간의 위대함과 의미, 정의, 진리에 대한 인간의 요구라는 면에서 볼 때면 그렇게 부재하는 신은 또 영원히 전체적으로 현존한다. 이렇듯 ‘부재하며 동시에 현존하는’ 신의 속성이 인간에게 이른바 ‘비극적 세계관’을 배태시킨다. 그러나 비극적 세계관이 이른바 ‘비관주의’로 곧바로 치환되지는 않는다는 데 삶의 비의(秘義)가 숨겨져 있다. 오히려 이러한 역동적인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서정적 주체들이 기독교의 또 하나의 속성인 ‘희망’의 세계관을 어김없이 가지고 갈등하며 고뇌하고 나아가서 그것들을 통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형상으로 창조하려는 열정을 우리로서는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일러 현대시의 ‘영적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는 기독교적 토대가 굳건했던 가정과 학교 그리고 죽음 때까지 자신을 그 범주 안에 살게 했던 신앙적 분위기로 하여 정신의 발생론이 비교적 투명하고 명징한 시인이다. 그에게는 생득적으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모태로 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근본 토양이 있었던 셈이고, 그 같은 조건은 그로 하여금 신앙의 원근법 안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현실적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적극적 참여의 의지를 주기도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적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파토스를 분출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시편들에 나타나는 종교적 상상력이 일정 정도 낭만주의적 성향에 빚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문예사조에 나타나는 낭만주의의 정신적 기조가 ‘동경(憧憬)’이고, 낭만주의 문학을 일러 ‘동경의 문학’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그 같은 동경의 철학적 배경에는 ‘극성(極性)의 원리’ 곧 생의 이념을 양극적인 대립에서 완성을 기하는 운동, 대립을 고차원적인 제삼자로 극복하는 운동이 깔려 있고, 따라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중심 사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유토피아적 열망을 토대로 통일을 지향하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종교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고, 여기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시적 파토스가 그의 시편에 나타나는 관념적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 관념적 진실이야말로 기독교적 토대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그의 삶 자체가 작품 세계와 견실하게 결합할 수 있는 개연성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2. 시를 통한 내적 성찰과 윤리적 자기 완성의 양상
윤동주의 시적 지향이 기독교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은 그간의 윤동주 연구에서 늘 따라붙었던 일종의 관행적 전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튼튼히 결합하고 있었던 간도의 정신적 풍토”가 윤동주의 시와 삶에 미친 영향은 족히 확인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작품 세계를 기독교라는 토대의 프리즘으로 읽어내는 것은 일견 전적으로 타당하지만 그의 복잡한 내면 세계를 응시하는 데 하나의 편견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로서는 윤동주가 기독교라는 하나의 세계를 시적으로 번안하거나 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언표하려 했던 시인이라기보다는, 내적 가능성이자 삶의 자양으로 숨쉬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시편의 곳곳에 삶의 고백으로 실어 보인 시인으로 보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종교적 상상력은 의식적으로 언표되어 있다기보다는 내면화되어 숨어 있고, 적극적으로 추구되고 있다기보다는 배면에서 무의식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내적 성찰의 기록이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전문
어조와 시적 구성에서 다분히 자기 고백적인 이 시는 윤동주의 시정신과 내적 치열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 시정신이란 다름아닌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윤리적 결백성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면에서 어김없이 기독교적 사유 패턴에 기초하고 있다. 일견 맹자의 “仰不愧於天”을 연상시키는 유교적 지절(志節)이라든가 운명적 소명 의식 같은 것이 전면화되어 있지만, 그것은 광의의 기독교적 인생관, 윤리 의식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수직과 수평이 만나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현장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 형상은 종교적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모든 자연은 우주적 신성성으로서 자신을 열어보일 능력을 갖는다는 사실 또한 체험케 한다. 하늘, 바람, 별, 또 바람 이런 것들이 조화와 길항의 세계를 열며 서정적 주체에게 우주적 신성성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아울러 매개하는 상징적 기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상당히 내면화되어 나타나던 그의 종교적 상상력은 다음 작품들에서 시적 모티프는 물론 주제 면에서 일정하게 표면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寢臺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 ?새벽이 올 때까지? 전문
이 작품은 윤동주의 작품 중 기독교적 종말 의식을 명징하게 반영한 시편으로 주목된다. 종말론(Eschatology)은 ‘마지막 일들(ta eschata)’에 관한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른 마지막이 있다는 일종의 사관으로서, 역사를 긴장하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관심과 동기를 부여하는 다이나믹한 역사관이다.
불교적 역사관이 순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라면, 기독교는 일직선적이고 신 중심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는데, 따라서 신의 심판과 더불어 인간에게는 윤리적인 것이 표나게 강조된다. 자연스럽게 윤동주에게 종말론적 관심은 윤리적 자기 강제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의 또 다른 시편 ?무서운 時間?에서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관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윤리적 의지와 종교적 사명감으로 극복해보려고 노력하는 시인의 인간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 - 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前날 밤에
그 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毒은 어린 꽃과 함께.
― ?太初의 아침? 전문
이 작품의 시각에 의하면, 세계는 근원적인 모순을 포함한 채 창조된 것이다. 태초의 아침에 세계는 이미 ‘사랑/뱀’ ‘독/어린 꽃’이라는 갈등의 세력들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진보적 사유나 실천 행위로 현실적 모순을 타개한다든가 진취적으로 열어 나간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지 시인의 예지는 운명에 대한 긍정과 자기 자신의 윤리적 완성이라는 경로를 밟게 될 뿐이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太初의 아침? 전문
이 작품 역시 구약성서의 창조 신화가 시사하는 상징적 계시의 요체를 시대적 질곡과 함께 통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원죄에 바탕을 둔 낙원 상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이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하고, 고통스럽지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일러준다. 이러한 윤리적 준거야말로 종교적 상상력이 일정하게 극점에 다다를 수 있는 ‘자기 희생’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十字架? 전문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가 반복되고 집요하게 착근되어 지속성과 안정성을 얻을 때 그 독특한 의미는 상징의 영역까지 획득한다고 볼 때, 이 작품에 나타난 ‘십자가’의 이미지는 기독교의 상징적 의미를 넉넉히 함축하고 있다. 더불어 이 시편은 고통을 감수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속에서만 인간이 참다운 인간일 수 있다는 기독교적 가르침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의 확인을 우리가 윤동주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 시사에 기독교가 정착한 뚜렷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윤동주 시의 저항 의식은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주조로 하는 소극적, 자책적 저항 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책감이 가장 높은 경지로 발전했을 때, 그것은 이 작품에서와 같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자기 희생과 속죄양 의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수난 의식과 속죄양 의식의 익숙한 상징이다. 1, 2연에서 ‘십자가’는 구원에 다다르는 길로 표상되고 있다. 그것은 ‘尖塔’의 날카롭고 높은 이미지와 연결되어서 좀처럼 다다르기 힘든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주체는 구원의 희망을 잃고 서성거릴 뿐이다. 그러나 4연에서 서정적 주체는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를 변화시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괴로움을 지고 괴로워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도 기꺼이 그리스도와 같은 속죄양이 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5연은 그 수난과 희생의 장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이 나타난 그의 속죄양 의식에는 튼튼한 역사적 종말관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종말적 신앙에 입각해서 씌어진 이 시는 훌륭한 하나의 예언시이기도 한데, 그 예언성은 다름아닌 민족의 수난과 영광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개체적 삶에 대한 준열한 다짐과 의지로 표상된다. 그 수난과 영광의 이미지는 기독교적 부활 사상의 세계를 덧입어 다음 작품에서 전면화된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별 헤는 밤? 8-10연
이상과 같이 윤동주에게 종교적 상상력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윤리적 자기 완성으로 치열하게 모아진다. 속죄양 의식, 종말론적 상상력, 부활 의식, 그리고 현실을 견뎌내는 견인과 의지의 목소리가 그의 시의 근본 추진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언표되는 소재적 기호로서의 종교성이 아니라 내적 기제로서, 숨겨진 삶의 원리로서, 그리고 자신의 시의 궁극적 파토스의 토대로서 그 종교성은 윤동주에게 오롯이 빛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종교란 “본질 그것(the substance)이고 터전 그것(the ground)”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어떻게 한 시인의 생존 감각과 더불어 순수한 직관을 통한 창조성을 획득하느냐가 기독교 시를 이 땅에 성립시키는 요인”이라고 할 때 윤동주의 기독교 시편들은 진실한 신앙적 체험과 심미적 가치가 통합되어 형상화된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기독교라는 정신사적 프리즘으로 보는 일은 그의 시적 정수를 살려내는 유용한 방법론이 되고 그와 같은 독법(讀法)은 좀 더 심화된 이론적 틀을 가지고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하리라고 본다.
3. 시와 종교적 상상력
우리는 이제까지 윤동주의 시적 궤적을 그의 시에 나타난 ‘종교적 상상력’이라는 준거를 토대로 읽어왔다. 우리는 종교적 이념이라는 배타적 토대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자신의 인문적 상상력과 현실 인식으로 통합하여 균형 잡힌 서정을 고전적 격조 속에 보여준 그의 시사적 공적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문학이 시간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면서 그 심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미의 형식적 요소가 경험적 내용으로부터 분리되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내용을 기초로 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이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학에서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 내용을 토대로 하는 소재적(stofflicher) 또는 주제적(motivisher)인 상태이지, 어떤 형식적인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학은 현대인의 경험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이념을 통해 종교적 충동을 자극하고,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급진적 세계성과 절대적 신앙을 종합하기 위하여, 복음을 뒷받침해 주며, 기독교 정신을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관과 성서적 신앙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곳에 그리고 신앙에 대한 모든 역사적 편견과 외식들을 벗어버리는 데 아마도 참된 기독교 문학의 새로운 본질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같은 비의(秘義) 추구의 열정이 기독교 문학 또는 종교적 상상력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윤동주의 기독교 시편들은 이러한 속성을 높은 차원에서 충족시킨 전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어 양식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종교’와 ‘문학’은 일정하게 동질적이다. 그것의 결합 형태인 ‘종교 문학’은 형상을 매개로 하는 미적 충동을 통해 잠재적인 종교적 충동을 현출시켜야 한다. 윤동주의 종교적 상상력은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소중하고도 다양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여준 종교 문학의 위대한 자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