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이콘은 어떻게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나
책에서 만난 사람 - 최진실의 삶과 예술이 남긴 유산
글 : 임현선 기자
1988년 삼성전자의 제품 광고 모델로 나온 최진실은 이 말 한마디로 스타가 되었다. 스무 살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새댁’으로 등장한 그는 1990년대 광고·영화·드라마의 ‘시청률 보증’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경제적으로는 고성장, 정치적으로는 여권의 신장과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있던 9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최진실의 패션을 따라 했고, 남성들은 그를 아내로 맞고 싶어 했다. 결혼 연령대의 아들을 둔 부모들은 최진실을 며느리 삼기 바랐고 청소년들은 말이 통하는 누나나 언니로 받아들였다.
한때 모든 연령대의 ‘워너비’였던 그는 결혼 후 불행한 사생활이 거의 실시간으로 언론에 공개되면서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안티팬들은 드라마 속 ‘똑순이’ 이미지와 다르게, 정작 본인의 가정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하는 그에게 무지막지한 돌을 던졌다.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 |
많은 이들이 지금도 최진실을 기억하지만 불행한 그의 사생활에 가려 대중문화예술인으로서 그가 남긴 성과에 대한 평가는 미흡하다. 추모 7주기를 맞아 최진실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책이 나왔다. 문화평론가 10명이 공동 작업한 《신데렐라 최진실, 신화의 탄생과 비극》(문화다북스)은 최진실이 출연한 광고·영화·드라마 비평을 통해 그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 책을 기획한 최강민 주간은 “최진실이라는 기억의 지도를 통해 지나온 1990년대와 2000년대라는 문화적 기억의 지형을 둘러보려 한다”고 밝혔다.
스타가 된 ‘수제비 소녀’
최진실이 출연해 히트한 작품들. 왼쪽부터 드라마 〈질투〉,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
10대 시절 최진실은 가난해서 학교 등록금도 제때에 내지 못했고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한다. 값싼 수제비는 최진실 가족에게 식사 대용이었다. 최진실은 선일여고에 다니면서 연예인이 되거나 미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지만 대학 진학은 불가능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동생인 최진영과 육촌인 탤런트 최재성의 도움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1988년 한국화장품 CF 조연으로 출연하며 광고계에 데뷔한 최진실은 삼성전자 관계자의 눈에 띄어 신제품 VTR의 광고 모델로 발탁됐다. 광고 모델료도 30만원에서 1500만원으로 뛰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지하 셋방을 벗어나 빌라로 주거 공간을 옮겼다.
CF광고로 유명해진 최진실은 드라마 섭외 1순위자였다. 1992년 시청률 50%대를 기록하며 그해 최고의 화제가 된 드라마 〈질투〉는 최진실에게 ‘신세대 청춘’이라는 아이콘을 선사했다. 〈질투〉는 당대 젊은이들의 사랑 풍속도를 감각적으로 보여준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였다. 최진실은 드라마에서 똑똑한 직장 여성으로, 남자친구에게는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적극적인 신세대 여성을 연기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에서 착용한 머리띠와 수영복이 완판되었고, 최진실을 대상으로 한 시나 단행본도 여러 권 나왔다. 시인 유하는 시 〈수제비의 미학, 최진실론〉을 썼고 한 일간지에 공개적으로 최진실을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정미의 《최진실 신드롬》, 이요나의 《최루탄 같은 여자 최진실 서정시 같은 남자 서태지》, 이호규의 《신데렐라는 없다》 등은 최진실의 인기에 힘입어 발간된 단행본들이다. 90년대 최진실은 남성들에게 애교 만점의 요정으로, 여자들에게는 현모양처의 신세대 주부로 인식됐다. 영화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흥행의 요소로 작용했다. 생전에 모두 18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마누라 죽이기〉에서 능력 있고 당찬 신세대 여성을 연기했을 때 대중은 호응했다. 1997년 출연한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는 중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최초의 한류 드라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30대 중후반이 된 최진실은 〈장미빛 인생〉을 통해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 드라마였던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는 첫사랑과의 사랑에 성공하는 아줌마 역을 연기하며 ‘줌마렐라’(아줌마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라는 신조어의 원조가 되었다.
연기와 삶의 불일치가 품은 비극
최진실은 서른두 살이던 2000년 야구스타 조성민과 결혼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결혼은 3년 9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이혼 과정 중에 알려진 남편의 외도와 폭력은 최진실을 가정폭력 피해자로 인식시키기보다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와 불일치함에 대한 확인과 냉소로 이어졌다. 인터넷에는 안티카페도 생겼다. 한 누리꾼은 “이혼 문제로 진실성이 없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활동하는 게 싫다”고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최진실은 그동안 연기자의 모습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저축왕을 수차례 수상한 덕에 알뜰하고 야무진 여성으로 비춰졌었다. 그의 이미지는 결혼 후 파경과 이혼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급속히 힘을 잃고 말았다. 2005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사랑받았던 그 이유가 지금 내게 오히려 상처가 되고 있다”며 “이혼녀란 말이 너무 싫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수없이 맹세했지만, 어느새 나도 엄마가 걸어간 길 위에 서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안티팬들은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최진실은 어느새 가정폭력과 이혼의 대명사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를 찾는 드라마 제작자가 줄었다. 광고 섭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한 광고주는 최진실을 상대로 30억5000만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사생활 관리를 잘못해 기업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사업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소송은 우여곡절 끝에 소속사가 1억원, 최진실 가족이 1억원을 광고주에 배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법원이 광고주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연예인의 사생활이 광고주의 소유물’임을 법적으로 인정한 사례로 남았다.
문화평론가 김혜연은 최진실의 죽음이 남긴 결과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분석했는데 가장 큰 변화는 친권법 개정이었다.
기존 친권법에 따르면 최진실의 사망에 따라 조성민이 자동으로 아이들의 친권자가 되었다. 조성민이 엄청난 유산과 함께 친권을 넘겨받고, 두 자녀는 전 남편의 새 아내와 같이 살게 될 수도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조성민 친권 반대 카페’가 생겼다. ‘아이들의 법적 권리를 위한 실천 모임’은 친권법 개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료 배우, 여성학자, 문화인류학자, 법조인, 국회의원 등이 모임에 참여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친권자가 사망할 경우 법원이 다음 친권자나 후견인을 심사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친부모라 해도 법원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친권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부적절한 친권자가 아이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는 상황도 막을 수 있게 됐다.
이혼 후 최진실은 여러 차례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쓰는 여성 단체들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돕고 싶다”고 밝혔다. 죽기 전날에도 친한 친구에게 “이제 연예계 은퇴하고 아프리카 같은 데서 오드리 헵번처럼 봉사하면서 살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계속 살아 있었더라면 소외당한 사람들을 돕는 인권운동가가 되지 않았을까.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이 마흔에, 악성 루머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스타의 죽음이 아쉬울 뿐이다.
출처:탑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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