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유튜브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지은


생일 축하해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시 당선소감] 안지은 / 불면에 시달린 날들 이제 푹 자고 싶어요

 

 

극심한 불면증이었다. 열대야를 기르는 나날. 지옥에는 다 자란 내가 있다고 믿으며 매일을 버텼다. 내게 죄를 부여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하루에 삼켜야 할 알약이 늘어나는 만큼 내가 소화해야 할 내일이 쌓였다. 하루 열두 시간 노동을 해야 서울살이가 가능했다. 퇴근길 버스는 늘 기분 나쁠 정도로 따뜻하고, 나는 언제나 잠깐의 사람. 버스에서 내리면 가야 할 집은 있지만 정착할 수 있는 집은 없는 사람. 나는 꿈에서조차 잠이 든 척을 했다.

 

이런 제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신 정호승, 문정희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려요. 명지대학교 김석환·이재명 교수님, 품에 넘치도록 저를 꼬옥 안아주시는 신수정 교수님, 다정한 편혜영 교수님, 감사합니다. 늘 저를 예뻐해 주시는 남진우 선생님, 부족한 제 언어에 힘을 실어 주시고 다듬어 주셨어요. 영원한 나의 캡틴, 이영주 선생님께는 언어라는 틀에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할 마음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마음 써주신 천수호, 박상수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 올립니다.

 

빛나는 순간에 항상 함께해준 윤수, 지윤, 주혜, 은혜, 예솔. 나의 꽃들. 앞으로도 함께하자. 나의 안식처 희정 언니, 애틋한 선화. 계속 글 쓰자. 오래오래 축하해준 태우 오빠, 고마워. 보고 싶은 민용 오빠, 인영, 보배 언니. 지원, 유경, 지애, 양정. 너희를 떠올리면 내 마음은 이미 대구야. 나보다 더 기뻐해준 지향, 보람 언니 고마워요. 건강하자, 지수. 내 대학생활의 즐거움, 흑풍. 제 시의 처음을 읽어준 선희, 혜민, 은희 언니. 용준 오빠. 명지대 시모임, 이미 나에겐 최고의 시인들. 그리고 내 영혼의 쌍둥이 우선. 내가 심해로 가라앉을 때 넌 내 산소통이었어.

 

엄마, 기철. 당신들은 나의 원동력. 내가 시를 쓰는 이유. 나의 수호천사 이모, 고마워. 이모부도. 할머니, 고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당신들의 기도 덕분에 제가 숨을 쉽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제야 답합니다. 사랑해요.

 

-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시 부문 심사평] 정호승 시인· 문정희 시인 / 소통의 詩… 삶· 죽음에 대한 역설적 인식 돋보여

 

 

최종심까지 올라온 16명의 시 50여 편을 읽고 느낀 공통점은 '소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를 읽게 되는 고통은 무척 컸다.

 

"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귀, 귀(鬼),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 부분)

 

한 예에 불과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시는 대부분 시 스스로 독자의 이해를 거부한다.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시의 심장이 은유라면 그 은유의 심장이 피를 흘리다 멈춘 듯하다. 다양성이 미덕인 시대에 그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마치 관념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지 않는 꽉 막힌 수도관을 통해서는 물 단 한 잔도 받아 마실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오늘의 현상은 한국 현대시가 어떤 한계에 다다른 부정적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종심에서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박은지의 〈공유지〉, 박진경의 〈다이빙〉, 이종호의 〈작은 방〉, 이현정의 〈북극점 한 바퀴〉 등이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며 그 언어가 지닌 구체의 본질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출처 : 찻잔속에 달이뜨네
글쓴이 : 桃源 裵英一 원글보기
메모 :


출처: 유투브


출처: https://youtu.be/nSbfWpY2OwI



출처: https://youtu.be/YuDt0koMXTI



출처: https://youtu.be/vgxn3TaJLQg


출처: 유투브


출처: 유투브

뜰에 해바라기가 피었네/법정스님



  자다가 깨어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이내 털고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일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더라도 일단 깨어났으면 뭉갤 필요가 없다. 눈이 떠졌는데도 잠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면 게으른 버릇밖에 길러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다음 고이 잠들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살 만큼 살다가 신체적인 동작이 멎었을 때, 친지들이 검은 의식을 치르면서 '고이 잠드소서' 어쩌고 하면서 작별의 인사를 할 것이다. 그때 가면 평생에 모자라던 잠을 온몸이 다 삭아질 때까지 실컷 잘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깨어 있는 맑은 정신으로 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기상나팔'은 이만 불고, 오늘 마음에 고인 말을 풀어놓으려고 한다. 며칠 비워두었다가 오두막에 돌아오니 뜰가에 해바라기가 피어있었다. 손수 씨를 뿌려 가꾼 보람이 해바라기로 피어난 것이다. 부풀어오르는 이런 기쁨은 스스로 가꾸어보아야만 누릴 수 있다.

  이 해바라기의 고향은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이다. 해바라기를 즐겨 그린 태양의 화가,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나오다가 매점에서 파는 씨앗을 샀다. 내가 이 오두막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해마다 꽃이 피는 해바리기인데, 처음 피어난 꽃을 대하면 마음이 사뭇 설렌다. 철새들의 첫소리를 들을 때처럼. 나는 이런 사소한 일에서, 살아가는 잔잔한 기쁨을 누리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해질녘이면 커다란 떡두꺼비 한 마리가 섬돌에 엉금엉금 기어나와 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오, 네가 또 왔구나'하고 아는 체를 한다. 낮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해질녘이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나는 이 두꺼비한테 '너는 무슨 재미로 이 산중에 혼자 사느냐'고 두러두런 이야기를 한다. 두꺼비는 아무 대꾸도 없이 내 말을 끔벅끔벅 들어주기만 한다. 이렇게 지내온 사이에 우리는 한집안 식구처럼 길이 들었다.

  두꺼비는 내가 바싹 다가서도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나는 두꺼비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은데 그의 식성을 몰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땅에 엎드린 채 그 동작이 굼뜬 이 두꺼비도 파리나 물것을 잡아먹을 때만은 그 입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

  '넙죽넙죽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가만히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다가 파리나 물것이 가까이 오면, 날름 혀를 내밀어 순식간에 잡아먹는다.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가 있다더니, 이 두꺼비한테도 물것을 잡아먹는 재주가 아주 비상하다. 모든 생물은 저마다 살아가는 묘기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산중은 아침 저녁으로 많이 서늘해졌다. 이제는 거르지 않고 날마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 할 때가 되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영롱하게 돋아나고 은하수도 선명하게 흐른다. 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도 가을임을 알려오고 있다.

  별밤 아래서 나는 밤이 이슥하도록 노래를 불렀다. 곁에 들을 사람도 없으니 마음놓고 18번,19번을 죄다 쏟아 놓았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즉흥적으로 작사, 작곡을 해서 부른다. 그날 일어났던 일을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로 부르고 있으면 아주 즐거워진다. 반주는 시냇물 소리가 알아서 해준다.

  이런 별밤이 아니라도 나는 설거지를 할 때 곧잘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흥에 겨우면 목청을 돋워 오두막이 들썩거리도록 창을 부르기도 한다.

  영화 <서편제>를 보고 나서 한때는 입버릇처럼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로 시작되는 <사철가>를 불렀다. 한참을 부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슬퍼져서 목소리가 촉촉이 젖을 때도 있었다.

  슬플 때는 슬픈 노래로 위로를 삼고, 기쁠 때는 기쁜 노래로써 그 기쁨을 드러낸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은 저마다 노래를 지니고 있다. 사람과 새들만 아니라 나무도 풀잎도 바람을 타고 노래를 한다.

  인간의 입에서 살벌하고 비릿한 정치와 경제만 쏟아져 나오고 시와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가슴은 이미 병들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마신 그 입에서 꽃향기 같은 노래가 나와야 한다.

  사는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즐거움은 누가 가져다 주는가. 즐거움은 우리 스스로 만들고 찾아내야 한다. 사는 일이 재미없고 시들하고 짜증스럽고 따분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대로 그 삶은 재미없고 시들하고 짜증스럽고 따분한 일로 가득 채워진다.

  우리들의 일상이 따분할수록 사는 즐거움을 우리가 몸소 만들어내야 한다. 즐거운 삶의 소재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무수히 널려 있다. 우리가 만들고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잠자리에서 뭉그적거리지 않고 털고 일어나 이 '글 쓰는 숙제'를 식전에 마치고 나니 아주 개운하다. 이 개운함이 오늘 하루의 내 삶을 받쳐줄 것이다.

  당신은 사는 일이 즐겁지 않은가. 1996


출처: 유투브   "우리 헤어져"... " 사랑이 변하니" 란 명대사를 남긴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 유지태

유지태가 배우로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시사회 작

품을 본 뒤 유지태가 직접 나와 관객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는데(물론 다른 영화였죠)



출처: 유투브

한때 수많은 영화팬들의 가슴을 울린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 자우림의 보컬리스트였던 김윤아. 그의

노래하는 모습은 꾸미지 않고 맑고 투명한 공기처럼 다가와 좋아한다.

       

눈물의 미학 / 장영희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감정의 기복이 심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크게 웃어 남의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또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잘한다. 특히 우는 버릇은 어렸을 적부터 고질적이어서, 어머니는 아직도 가끔씩 “자식 여섯 키우면서 너같이 울음 끝 질긴 애는 처음 봤다. 도대체 한번 울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자지도 먹지도 않고 울어댔으니... ” 하고 혀를 내두르신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어렸을 때 나는 꽤 자주 울었고, 일단 울기 시작하면 빨리 그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우는 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만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왜 우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순전히 울기로 한 나의 결정에 충실하기 위해 일부러 슬픈 생각까지 해가며 우는 일에 열중했었다.

  어머니는 항상 “넌 한평생 흘릴 눈물을 어렸을 때 다 흘렸으니 네 팔자에 이제는 울 일이 없을 거다” 라며 말씀을 맺곤 하신다. 그러니 이제는 ‘웃는 일만 남은‘ 내 팔자지만, 그리고 이제는 체면 때문에 드러내놓고 잘 울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사는 게 그게 아닌지 여전히 찔끔거리기를 잘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어렸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정말로 어른답게, 그리고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답게,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나누는 연민의 눈물이나 세상의 불의를 보고 흘리는 비탄의 눈물 아니면 내가 범한 잘못을 뉘우치는 통회의 눈물이 아니다. 그저 갑자기 발작처럼 사는 게 슬퍼져서 우는 감상의 눈물이거나, 삶을 내 맘대로 휘두르지 못해 억울해서 우는 오만의 눈물이거나, 아니면 문득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우는 두려움의 눈물이다. 또 감상적인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는 ’참 웃기지도 않네, 사람 울리려고 별 짓 다 하네‘ 하고 욕하면서도 어느새 눈에 맺히는 그저 습관적인 눈물일 뿐이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 떽 쥐베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눈물은 그저 눈물을 흘리기 위한 눈물이요, 순전히 자기 연민의 의미 없는 눈물이니 보석은커녕 아마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자갈쯤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나는 진정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리는 세 사람을 보았다. 얼마 전 ‘체험, 삶의 현장’ 이라는 텔레비전 프로에는 유진 박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흑염소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염소에게 먹이를 주고, 우리의 배설물을 치우고, 염소를 몰고 다니며 바이올린도 켜고 , 목동이 하는 여러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때가 되자 농장으로 트럭 한 대가 왔고, 유진 박은 트럭에 실리기 위해 철창에 갇힌 염소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미국에서 자라나 우리말이 어눌한 그는 목멘 소리로 “잘 가, 친구“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나는 트럭 뒤에 대고 유진 박은 ”도망가, 너네들 다 도망가 !” 하고 소리쳤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어떤 기준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평가하는지 잘 모르지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을 보고 가슴 아파 눈물 흘리는 그 마음이야말로 그의 연주를 아름답게 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출처: 장영희 팬 카페        ( The Puppet Show / Victor Gabriel Gilbert) 


   또 한 사람, 우리 과 조교 은주는 자원봉사로 고아원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어느 날 한 살 난 어린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비비 꼬며 심하게 경련을 했다. 너무 놀라고 겁이 난 나머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은주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울었다. 마침내 수녀님이 와서, 그저 아이가 간질 증세의 발작을 보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아이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아이만 살려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기도했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본 적이 없어요.” 내게 얘기하면서도 은주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고, 그런 은주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마지막으로,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다룬 텔레비전 프로에서 말기 암 환자인 한 젊은 엄마의 마지막 몇 달을 취재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젊은 엄마가 아홉 살과 일곱 살짜리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은 “언제나 씩씩하고, 아빠가 새엄마를 모시고 오면 새엄마에게 잘 해 드려라." 라는 것이었다. 엄마를 묻고 온 날 밤 두 어린 형제는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 우리 항상 씩씩할게요. 그러니 제발 새엄마 데리고 오지 마세요‘

  며칠 후 기자가 다시 형제를 찾아갔을 때 아홉 살짜리 형은 웃는 얼굴로 “안녕하세요?” 하며 기자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엄마 보고 싶지 않니?” 기자가 묻자 아이는 갑자기 군인처럼 손을 양옆에 붙이고 꼿꼿이 서더니 목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넷,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저 씩씩해요.!” 순간 나는 분명히 카메라가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그래 참 씩씩하구나.” 대답하는 기자의 목소리도 떨렸다. 군인 같은 자세로 고함 지르는 것이 아이가 생각하는 ‘씩씩함’이었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오래전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했지만 거꾸로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 아닌지, 진정 남을 위해 흘리는 이들의 눈물이 자갈밭같이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 장영희 교수님이 쓴 <내 생에 단 한 번>에서 직접 자판으로 옮겨봤습니다.


  

    출처: 유투브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동자승이 노승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사계절에 비유하여 욕망과 업보를 통해 삶의 윤회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2003년 대한민국 청룡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과 동시에 미국의 대표적인 10대 청소년 잡지가 선정한 '2004년의 베스트 영화 톱 10'에 들기도 했고 몇몇 국가에서 그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만들어지기도 한 작품입니다. 

  영화 전편이 나오는 동영상은 중국어 버젼밖에 없어. 굳이 자막이나 말이 필요치 않은 영화이기에 올려드리니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문창과 재학 중 <문학과 영화>과목을 수강하며 강의 시간에 이 영화를 울면서 보았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무엇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하는지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학과 영화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시문학과 소설에 관심이 많은 님은 <문학과 영화>에 관한 자료를 읽어보시면 도움되실 겁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