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청국장! 이만한 식당, 드물겁니다.

풍수원식당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279-6 / 033-342-0151

 

참 주관적인 글로서,

최고의 식당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맛난 청국장은

없을 것 입니다.

지금처럼, 정직한 먹거리로

남아있기를 기대합니다.

 

 

 

 

끝까지 숨겨두려 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고 모르시는 분들은 전혀 모르는 식당입니다. 강원도의 여행길에서 한번이라도 스쳐 지나갔을 법한 식당입니다. 그러나 속이 그토록 알찬 식당이었습니다.

주인장의 성품, 음식의 가격, 먹거리에 대한 믿음, 그리고 !’ 무엇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가족 모두 지금도 식당에 다시 가고 싶어 합니다. 동해 바다를 가려는 데도 횡성을 들려서 가자고 할 정도입니다. 먹거리라는 것이 주관적인 입맛으로 호불호가 극명히 갈라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행자는 풍수원 식당을 최고의 맛집, 최고의 착한식당이라 감히 자부합니다.

 

 

 

 

청국장된장찌개를 먹기 위해 어디까지 가실 수 있습니까.

어지간한 식당이라면 차림표에 늘 자리하고 있는 차림입니다. 평일이면 여행자도 사무실 근처에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여느 백반집, 그곳에도 된장찌개청국장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행자는 청국장된장찌개를 먹기 위해 2시간여를 달려 강원도 횡성에 갈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가고 싶습니다.

사실 강원도 횡성지역은 산간지방으로 옥수수, 감자, , 보리등의 밭 작물을 주로 농사짓고 있으며 더하여 질 좋은 이 자라는 곳입니다. 그 이유로 콩으로 할 수 있는 음식들이 발전 한 곳이기도 합니다. 갖가지의 두부가 음식으로 만들어 집니다. 또한 콩은 의 발전을 가져옵니다. 된장, 간장, 청국장, 고추장등입니다.

사실 풍수원성당 마을 안쪽에는 예전부터 유명한 청국장과 된장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그 집의 장맛은 전국으로 알려져 많은 분들이 구입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풍수원 장맛’, 말 하지 않아도 좋겠지요.

 

 

 

 

, 이제 식당의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양평 끄트머리의 도덕고개를 넘어서고 5분이면 풍수원성당의 입구에 닿습니다.

풍수원 식당은 풍수원 성당의 들머리 대로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풍수원 휴게소, 기사식당이라는 입간판으로 말이지요.

내부로 들어서면 매점과도 같은 분위기와 서너개의 테이블로 매점과 식당이 반반입니다. 그 중앙에 넓게 자리 잡은 주방이 있습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청국장된장찌개, 도토리묵을 주문합니다.

 

우선 도토리묵이 먼저 나옵니다.

밑반찬을 그때그때 만드는 이유입니다. 갖은 채소에 들깨와 들기름, 묵을 함께 무쳐냈습니다. 조금은 투박하다 싶을 정도의 묵의 툰탁한 맛이 기분이 좋고 고소하고 아삭한 채소의 식감이 좋습니다. 결국 막걸리 한통을 주문하게 됩니다.

    

 

 

 

이제 밑반찬을 내어 주십니다.

솔직히 이 식당의 밑반찬이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화학조미료를 아예 쓰지 않거나 거의 사용하지 않은 찬의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습니다. 재료가 가진 고유의 그 맛을 잃지 않으면서 고유의 식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반찬으로만 보약밥상이 됩니다. 전체적으로 간이 강하지 않다는 것도 먹으면서 건강해지는 느낌입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더덕무침을 먼저 맛봅니다.

약하게 간이 되었습니다. 풍부한 더덕의 향은 그대로이고 아삭한 식감이 아주 좋습니다. 깻잎절임은 적당히 짠맛입니다. 밥 한수에 하나 담으면 강하지 않은 양념장과 깻잎의 향이 살작 올라옵니다. 늙은 오이라 부르는 노각무침은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고 버무려졌는데요. 역시 무르지 않는 아삭한 식감이 좋습니다. 열무김치마저도 적당한 간에 아삭한 식감이 너무 훌륭합니다. 아마도 더덕무침과 함께 가장 많이 리필을 한 것 같습니다. 가지나물의 맛도 싱거운듯하면서 고소한 가지 고유의 맛이 있는데 다른 반찬들의 비주얼 덕에 그 빛을 잃었습니다.

참비듬나물’, ‘아주까리나물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깨끗이 씻어낸 나물을 가볍게 양념하여 참기름 둘러 살짝 볶아낸 딱 그 맛입니다. 더도 덜도 아닌 나물 고유의 그 맛과 향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재료들이 참 익숙합니다.

바로 풍수원성당 주차장에서 무인 판매되고 있는 풍수원성당 교우 농산물 직판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농산물들입니다. 교우들이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판매하는 곳으로 여행자도 몇몇의 농산물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꽁치조림입니다.

산촌에 들어와서 맛 본 꽁치조림’, 아주 맛있습니다. 비린내 하나 없는 깔끔하면서도 간 베인 양념장의 맛이 좋습니다.

 

 

 

 

엄마, 이것 좀 드셔봐요.”

아범아, 이거 들어, 정말 잘 끓였다.”

청국장과 된장찌개를 두고 하는 안사람과 장모님의 대화입니다. 무슨 청국장과 된장찌개까지고 이리 호들갑을 떠나 싶지만, 정말 맛있습니다.

 

짭조롬 하면서도 깊은 맛이 좋은 된장찌개와 그 보다는 덜 짜면서도 은은한 청국장의 향, 그리고 부드러운 맛이 너무 좋은 청국장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먹어 왔던 차림들과는 다른, 달라도 많이 다른 맛으로 여행자는 감히 착한 식단이라고 표현합니다.

된장찌개는 맑습니다.

깊은 된장의 맛에 깔끔한 짠맛입니다. 넉넉하게 들어 간 두부와 호박의 부드러움이 참 좋습니다.

청국장은 진합니다.

들어간 재료는 된장찌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부드러움이라 할까요? 국물과 함께 떠먹는 청국장의 콩맛이 기가 막힙니다. 거기에 어울린 부드러운 두부, 가자, 호박의 조화가 참 좋습니다. 제가 맛 본 청국장 중에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8살부터 69세까지, 남녀노소 9명의 가족이 함께 들어 선 풍수원 식당,

모두가 크게 만족하고 식당문을 나서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잘 먹었다는 인사와 고맙다는 인를 연신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찬 하나하나와 된장찌개와 청국장의 맛이 정말 맛있는 맛집입니다. 이제는 차림표에 있는 김치찌개비빔밥의 맛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식구 중에는 콩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콩은 물론, 두부 심지어 두유도 먹지 않지요. 그런 그가 바닥의 국물까지 밥에 비벼 싹 해치우고는 정말 좋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여행자는 물론이고 모두가 좋아한 차림이었습니다.

 

 

 

 

풍수원 식당,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두 분 모두 풍수원 성당의 신자이십니다.

말씀이 조분조분하고 조용하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좀 느리십니다. 게으른 것이 아니라 서두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수녀? 천주교신자?, 딱 그 모습 입니다.

 

여행자도 사전 전화통화에서

아침 10시는 되어야 식사가 가능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아침 9시부터 성당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식당으로 향했는데, 그때서야 부부는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아침에 일이 있어 늦어 졌다고 하시며

“12시는 되어야...”하십니다.

여행자 혼자면 다음을 기약하겠지만, 가족들이 동반 되고 코스를 맞춰야하기에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식사 후에 바로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나와 식당 주변을 구경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바로 뒤 따라 나오시면서

지금 해드릴 테니 들어와서 앉으세요.”하십니다.

아니요, 식사하시고 천천히 해주셔도 됩니다.”하니 웃으시며,

밥이 안 넘어가요.”

그렇게 하게 된 식사입니다.

더욱이 특별하지 않다면 밑반찬들의 대부분은 주문 후에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시간이 좀 걸립니다. 여행자의 생각으로 동시간대에 다섯팀만 몰리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한 느림입니다.

사정이 생기시면 식당의 문을 닫기도 합니다. 장사에 의미를 두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식당의 차림을 보면 찌개 종류는 기본2인 이상만 주문이 됩니다. 혼자일 경우 비빔밥이 있는데 이 역시도 내는 반찬은 같다고 하십니다

 

 

 

 

횡성여행을 다녀 온지도 벌써 3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횡성여행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풍수원 식당의 영향력이지 싶습니다. 먹거리에 대한 만족감은 여행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즐거움이지요. 그로 인하여 전체적인 여행의 색이 달라집니다.

 

풍수원 식당, 변하지 않는 지금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착한 먹거리에 대한 기대감은 다음 여행에서도 횡성을 찾게 할 것입니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

출처 : 길손의 韓國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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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그 곳, 여전한 사람 사는 맛, 화천식당,

화천순대국밥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하리 화천시장 나열 25/ 033-441-2151

 

시원하고 칼칼한 김치와

잘 익은 깍두기,

그리고 펄펄 끓는 순대 국입니다.

비록 한 여름이지만,

개운한 국물 맛이 그리워 다시 찾았습니다.

여전한 그 때의 그 맛,

국밥 한 그릇에 행복해집니다.

 




한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초,

강원도 화천을 찾았습니다. 길손은 화천을 참 좋아합니다.

몇몇의 강원도 지방을 두고 고민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는 화천이 길손의 제2의 고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찾으니 뭔가 허전하기도 합니다. 철원을 둘러보고 넘어 선 길, 우선 요기부터 채워봅니다.

 

한 낯의 수온주가 35도를 넘어선 오후,

소나기가 내릴 듯, 습한 기운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군요. 개인적으로 화천을 찾은 지가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입맛은 그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천 순대국밥

화천시장 안에 자리한 화천식당은 인터넷의 입소문보다는 화천 현지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식당입니다. 평상시에 식사시간이면 자리가 꽉 들어차기도 합니다만 그 외의 시간이면 한산합니다. 여유 있는 식사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 깔끔하게 변한 화천시장



그 전 보다 더욱 깔끔해진 시장에 들어섭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갑니다. 사내면 사창리에는 토마토축제가 열리고 있고, 가까이 화천강변에서는 화천 쪽배축제도 있거니와 오늘이 화천5일장이 서는 날이네요. 참고로 매 3일과 8일로 끝나는 날마다 화천시장의 뒤로 화천장이 섭니다.


워낙에 날이 습하고 더워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화천시장에는 나름의 활기가 돌고 있습니다. 화장실등의 편의시설과 반듯하게 늘어선 점포들의 모습에서 상인들은 안정감을 갖습니다. 군청의 많은 도움으로 전통시장의 활성화 되어지는 것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 길손이 참 좋아하는 화천국밥집


 


△ 아삭함이 일품인 배추김치와 잘 익은 깍두기, 그리고 기본 양념들



화천식당 화천순대국밥

힌 그릇에 6천원입니다. 따로 순대만 1인분씩도 판매합니다. 식당의 차림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돼지국밥, 순대국밥, 곱창국밥, 그리고 순대가 주 차림입니다. 그 외에 닭볶음탕이나 제육볶음등도 있지만, 화천식당에서는 역시 순대국밥입니다. 참고로 돼지국밥은 순대를 빼고 고기를 더 넣은 것입니다.

 

내어주는 기본 찬은 4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아삭한 식감을 주는 화천김치, 시원하고 칼칼한 맛으로 희한하게 화천의 식당들은 모두 김치 맛이 참 좋았습니다. 모두 맛은 달라 저마다의 손맛이 담기지만 시원하게 잘 익은 김치 맛이 지금까지 화천 어느 식당을 찾아도 실망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함께 내어주는 깍두기는 익숙한 맛으로 국밥과 함게 일 때 더 맛이 납니다.

마늘 다진 것과 얼큰한 양념장, 새우젓과 들깨가루, 그리고 부추를 함께 내어 알아서 가감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차려진 찬의 수보다 정갈함이 더 기분이 좋습니다.

 


△ 깔끔함과 개운함이 참 좋은 화천순대국밥


그리고 잠시 후 펄펄 끓는 순대국과 밥을 내어 줍니다.

진한 육수에 순대와 머리고기가 어울려 있습니다. 맨 입에 맛을 보아도 구수함이 돌 정도로 깊은 맛입니다. 한소끔 끓여 낸 것이 아니라 우려내고 우려낸 그러한 맛입니다.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부추를 쏟아 붓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야유나 청양고추, 양념장을 넣었을 텐데 오늘은 너무도 더운 날씨로 개운하게 즐기기로 합니다.

 

새우젓 콕 찍어 먹는 머리고기의 쫄깃함이 기분 좋습니다. 후루룩~! 마시는 국물 맛의 개운함이 정말 좋습니다. 공기 밥을 말고 김치를 얹고, 깍두기를 얹어 먹습니다.

밥 먹으면서 행복해지는 기분, 개운한 뒷맛이 더욱 좋은 화천순대국밥입니다. 뚝배기채로 국물까지 들이켜고 나면 기분 좋은 땀이 흐릅니다.

    




변하지 않은 맛과 가격이 기분이 좋습니다.

흘린 땀을 닦아내고 시원한 냉수 한 사발 들이킵니다. 식당을 나서니 시원해집니다.

기분 좋은 땀을 흘리며 먹는 화천순대국밥, 여전히 사람 사는 맛이 납니다.


특별함이 없는 평범함이 만들어 내는 살아가는 맛, 이것저것 더 넣고 빼고가 아닌 시간으로 끓여 낸 작은 정성의 맛, 이러한 것들이 화천을 좋아하게 되는 것들 중의 한가지입니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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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벽은 문이다/정호승



  영화 '해리포터'를 떠올리면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열한 살 고아 소년 해리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 킹스크로스역 벽을 뚫고 들어가던 장면입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차단된 벽 속으로 해리가 성큼 발을 내디뎌 들어서자 벽 속에는 마법학교로 가는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승강장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저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것은 벽이 문이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모든 벽 속에는 문이 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벽은 항상 굳게 막혀 이곳과 저곳을 차단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벽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에게도 '해리포터 시리즈'는 인생의 벽 앞에서 작가 자신이 연 용기의 문이었습니다. 이혼 후 어린 딸을 데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벽 앞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해리포터를 씀으로써 벽을 문으로 만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제 인생의 벽 앞에서 돌아서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벽을 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꿈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어서, 내 인생이라는 시간을 내가 주인이 되어 오로지 시를 쓰는 일에 사용하게 되는 것이어서, 잘 다니던 직장을 두 번이나 스스로 그만둔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회에 나와 국어교사 생활을 3념 넘게 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남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갈수록 큰 고통으로 다가와 아무런 대책 없이 그만둬버린 일이 그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오랫동안 잡지사 기자 생활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그만둔 일입니다. 당시 제 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가장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늘 생계라는 벽에 가로막혀 번번이 되돌아서곤 했습니다. 좀처럼 그 벽을 뚫고 나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흔한 살 되던 해에 사라져가는 그 꿈을 찾고 싶어 친지들 모두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나마 벽을 뚫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류 중에는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삶의 벽 앞에서 문을 여는 존재입니다. 독소리의 평균 수명이 인간과 비슷한 까닭은 늙음과 죽음의 벽 앞에서 독수리가 스스로 새 삶의 문을 열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는 30년 좀 넘게 살게 되면 무뎌진 부리가 자라 목을 찌르고 날개의 깃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합니다. 날카롭게 자란 발톱마저 살 속을 파고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뼈를 깍는 고통의 과정을 밟아 새롭게 태어날 것인가 선택하게 됩니다. 만일 새 삶을 선택하면 6개월 정도 먹는 것도 포기하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합니다. 높은 산정에 둥지를 틀고 암벽에 수도 없이 부리를 쳐 깨트리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새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부리가 나면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고는 그 새 부리로 낡은 날개의 기털도 뽑아내고 새 깃털이 자라 날개짓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때 독수리의 몸은 피범벅이 됩니다. 그런데도 독수리는 그 고통의 벽 앞에서 자신을 전부 새롭게 갈고 새 삶의 문을 엽니다. 만일 독수리가 벽 속에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면 결코 인간과 같은 수명을 누리는 새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벽 앞에서 내일이라는 새로운 삶을 위해 독수리처럼 선택과 결단의 문을 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독수리와 같은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2007년에 말기암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마지막 강연'이라는 동영상을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던진 미국의 랜디 포시 교수는 인생의 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벽이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준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앞에 멈춰 서라는 뜻으로 벽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인생의 벽을 절망의 벽으로만 생각하면 그 벽 속에 있는 희망의 문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벽을 벽으로만 보면 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능한 일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벽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보면 결국 문이 보입니다. 벽 속에 있는 문을 보는 눈만 있으면 누구의 벽이든 문이 될 수 잇습니다. 그 문이 굳이 클 필요는 업습니다. 좁은 문이라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넓은 희망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 지니고 있어도 그 문을 굳게 닫고 벽으로 사용하면 이미 문이 아닙니다.


  문 없는 벽은 없습니다. 모든 벽은 문입니다.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벽 없이 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쓴 시 '벽'을 함께 읽으면서 내 마음의 벽에 있는 문을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벽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 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원문 발췌 자판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GGuvK00DEIE(노래 듣기)


  이 노래가 90년대 초반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부초'를 듣는 순간 노랫말에 들어 있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혼절할 만큼 열창하는 박윤경에게 영혼을 내줄 만큼 빠졌었다. 풋풋하고 앳된 얼굴에 처음 얼굴을 알리는 가수로는 가요 팬들의 마음을 빼앗을 만큼의 미모와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이선희와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가창력으로 '박윤경'이란 이름을 음악팬들에게 각인시키며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지 싶다.

  그가 혜성처럼 나타나 가요대상을 타고 음악팬들의 가슴을 울리며 사랑받게 된 밑바탕에는 지방에서 여고생 신분으로 서울에 올라와 작곡가 임종수 선생 밑에서 1년간은 발성 연습만을, 3년간 음악 공부를 한 뒤 이 곡을 데뷔곡으로 받아 불렀다고 한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도는 한 여인의 이미지가 아릿하게 그려진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충격에 집을 뛰쳐나와 자포자기 심정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남자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이자 눈물일지도 모르는 노랫말이 드라마처럼 가슴을 싸하게 울리기도 한다. 어찌 됐든 부초의 노랫말은 또 다른 상상력을 갖게 하는 한 편의 시처럼 느껴져 아직도 뭇 사람들이 잃버버린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편집 겸 옮긴 이 추가)


박윤경-부초

화려한 불빛 그늘에 숨어 사랑을 잊고 살지만 / 울고 싶은 밤이면 당신 생각합니다

진정 나 하나만 사랑한 당신 / 강물 같은 세월에 나는 꽃잎이 되어

떠다니는 사랑이 되어 / 차가운 거리를 떠돌다 가지만 / 당신 모습 따라오네요.

2 .바람이 불어 쓸쓸한 거리 / 어둠을 먹고 살지만 / 외로워진 밤이면 당신 생각합니다

진정 소중했던 나만의 당신 / 눈물 같은 세월에 나는 꽃잎이 되어 /

떠다니는 슬품이 되어 / 차가운 거리를 떠돌다 가지만 / 당신 모습 따라오네요.


편집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앗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다섯살 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여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여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자식에게 볼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기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

 

 

 

[아버지의 추억] <20> 시인 손택수

아들과 대중탕 못 간 이유, 이제서야…
40년간 지게일로 시커멓게 죽은 등…병수발 때 드러나

아버지의 추억 

  누가 물으면 여섯 살이라고 해야 한다. 알았지? 어머니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꼭 이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싫어요.’ 목젖까지 올라오는 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네” 하고 시무룩하게 대답을 해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정색을 하고 거듭 확인 절차를 거치곤 하셨다. 너, 몇 살이니? 여섯 살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목욕가방을 챙기셨다. 그러면 옆에서 또랑또랑한 두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누이동생들이 마구 놀려대기 시작했다. 오빠는 거짓말쟁이래, 거짓말쟁이. 우리 오빠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대요.
  주말마다 한 번씩 목욕탕에 가는 게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머니와 공범이 되는 것도 싫었고, 앙큼한 누이들에게 매번 꿀밤을 먹이면서 싸우는 것도 싫었다. 속으론 여섯 살, 여섯 살 하고 몇 번이나 되새겼는데 잔뜩 긴장한 목에서 내 의지와는 정반대로 저번처럼 갑자기 여덟 살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내 고추를 잡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정말 여섯 살 맞니?’ 하고 묻던 그 돼지 같은 아줌마를 또 만나면 안 되는데, 이런 공포감에 떠는 것도 싫었다. 다른 애들처럼 내놓고 뛰어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하게 목욕탕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온갖 찜부럭이 다 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아버지 탓이야.’ 급기야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따라다닐 수 없을 만큼 커버린 뒤론 하릴없이 혼자서 목욕을 다녀야 했다. 여탕의 악몽에서 해방된 게 나는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도 잠시뿐이었다. 여탕을 벗어난 것까진 좋았는데 남탕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끙끙거리며 때를 밀 때마다 함께 와서 등을 밀어주는 부자(父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매번 등 밀어줄 사람을 탐색해야 하는 내 처지란 것이 생각하면 참 딱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졸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 중에서). 그랬다.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지 않는 이상한 위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꽤 오랫동안 적대감을 부러 숨기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뭔 놈의 소설 시 나부랭이냐 이놈아, 늬 애비가 시장에서 지게질 하고 번 돈이 어떤 돈인데!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오셔서 하는 푸념을 나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술주정을 대놓고 저주하곤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건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걸, 술힘을 빌리지 않곤 지게를 질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노쇠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알코올성 간경화 말기로 아버지가 쓰러져 누웠을 때 나는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보았다. 40년 가까운 지게 짐에 화인처럼 찍힌 자국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자국이었고, 아들에겐 더군다나 어떤 식으로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관장을 하고 아버지가 아기 때의 내게 그랬듯 나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다. 그리곤 아버지를 업고 병원 욕실을 찾았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적막한 등짝이 드러났다. 아버지,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 지게 자국이 제겐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과 같아요.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아버지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삶의 무게들을 비로소 쓰다듬기 시작했다.

▲ 손택수는…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당선돼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등이 있다.

 

출처: 아버지 학교

편집 겸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이 시는 한국전쟁을 치른 뒤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기까지 이어진 아버지 세대의 삶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엔 싸한 아픔이 밀려온다. 평생 지게를 지고 농사일에 파묻혀 새우등이 되도록 허리 한번 마음껏 펴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홀연히 찾아온 중풍으로 3년 9개월 동안 기어 다니셨던, 육 남매 낳아 기르며 고생하시다가 생의 끝자락을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하셨던 아버지. 몸이 무거우면 하늘로 오르지 못하실까 봐 그러셨을까. 끝내는 누워서 자신의 몸뚱이까지 어린 새끼들에게 다 나눠주고 떠나는 거미처럼 살가죽이 뼈에 맞닿은 뒤에야 벽제 승화원에서 지게 자국을 지우고 하늘로 떠나신 나의 아버지.ㅠㅠ

 

  어린 시절 여름날, 아버지가 집 뒤 울 옆으로 흐르는 도랑 가에 엎드려 누나들이 씻겨드리는 등목을 하실 때면 등과 어깨엔 평생 숙명처럼 짊어져야 했던, 농경사회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지게질로 피부가 혈액순환이 안 돼 마치 검은 참깨를 뿌려놓은 듯이 6남매를 거느린 가장이 진 삶의 무게가 참혹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 나의 아버지,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지 못한 철부지 막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깨닫습니다.

' 내가 아버지의 짐이었다고...' (봄내지기 추가)

 

이 자료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손택수 시인의 여러 자료들을 모아 다시 편집한 것임을 알립니다. 하여 일부 정보의 오류가 있을수 있으니 읽고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편집 겸 옮긴 이)

 


박인환은 왜 술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을까?
   경춘고속도로 하행선 동홍천IC를 지나 속초로 가는 국도변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 156번 길, 옛 행정명 상동리 415-1번지입니다. 60년부터 80년대까지 연정(戀情)에 빠졌던 분이라면 한 번쯤 읊어보았을 어느 멋쟁이의 시(詩) 한 수를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출처: https://youtu.be/uLlg5_7hbxs?si=6fi9QWVpTxvndrYi (영상시-편집 옮긴이 추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않는다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않아도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 시는 박인환(朴寅煥ㆍ1926~1956)이 쓴 ‘목마와 숙녀’입니다. 1926년 8월15일 소양강 상류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 강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평소 흠모했던 이들이 셋입니다. 영국 시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 프랑스 작가 장 콕토(1889~1963),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입니다. 저는 박인환의 시를 요즘 문체가 아닌 발표 당시 그대로 실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바지니아 울프’라는 표현이 더 정감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만가(輓歌)라고 하지요. 대체 박인환은 왜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이 시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고 넘어가지요.

 

목마와 숙녀를 적어놓은 아크릴판 한가운데로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쳐 보인다.

목마와 숙녀를 쓴 아크릴판 한가운데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친다.

 

   박인환이 한창 시인으로 재능을 꽃피우던 시기는 6ㆍ25의 상흔(傷痕)이 뚜렷이 남아있던 1950년대입니다. 그야말로 허무와 불안의 시기였습니다. 흔히 문학사를 보면 우리 세기말, 혹은 국가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페스트 같은 대규모 질병이 창궐했을 때 허무주의가 강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우리 문학사에는 ‘창조’ ‘폐허’ ‘개벽’같은 동인지들이 등장하는데, 이 창조나 폐허나 개벽이란 단어가 실은 같은 정조(情調)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00년 조선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자,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고 국토마저 일본에 빼앗기며 문학인들은 허무주의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광복의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살육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으며 국토가 잿더미로 변한 6ㆍ25 직후에 허무주의가 강하게 대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인환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강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 끊은 울프의 비극적 삶과 자신이 살던 시대를 동일시했습니다. 바로 그 불안과 허무의 상징물이 ‘목마’라고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쓸쓸한 가을 속으로 목마를 타고 떠난 울프(숙녀)를 애도하며 박인환은 떠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별은 비록 삶의 행로(行路)를 밝히는 좌표이자 희망의 상징이지만 술병에서 부서지고 말지요. 이렇게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늙은 여류작가의 눈’처럼 세상에는 ‘등대에 불’, 즉 길잡이가 보이지 않았지요.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뱀’으로 상징되는 통속적인 욕망뿐이었습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 있다.

 

   시를 읽고 나니 제가 속초 가는 길에 보았던 인제로 156번 길 박인환 문학관으로 들어가 보고 싶으시겠지요. 저 역시 한참을 지나쳤다가 무엇에 홀린 듯 유턴해 박인환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4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박인환은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습니다. 그에게 ‘인제(麟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던 산간 벽촌에
나는 자라서 지금은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할까 부질없고나(…중략)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박인환 문학관 바로 옆, 속초~동홍천 국도에 ‘박인환의 거리’가 있습니다. 한 병원 장례식장 바로 옆에 조성된 100m남짓한 거리지요. ‘장례식장’이라는 말과 요절한 시인의 생애가 묘한 연상을 자아내는데, 거기 이 ‘인제’라는 시가 적힌 흰색 철제 의자가 있습니다. 마침 여름 햇살에 이 시구가 땅에 비쳤지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인제’라는 시는 시인의 머릿속에서 ‘산간 벽촌’과 ‘가난’의 상징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봄이여 빨리 오라’고 외치지만, 시인이 떠난 지 한참 됐는데도 인제는 여전히 산촌(山村)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목마와 숙녀’의 허무주의와는 또 다른 한국적 정서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시입니다.

<中편에계속>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Photo by 이서현

 

당시 명동 문인들 '모나리자파'와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2012년 만들어졌다는 박인환 문학관은 모두 2층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층에는 그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명동의 옛 모습을 재현해놓았고, 2층에는 그가 한때 운영했던 ‘마리서사’라는 책방 이름을 딴 마을도서관 ‘마리서사’가 있습니다. 그 한쪽에는 인제 어린이들이 그리고 쓴 박인환의 시와 그림이 자리해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박인환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 뒤 14살 때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합니다. 이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면 꽤 공부를 잘한 학생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덕수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그는 전체 66명 중 7등이었는데 학교장은 ‘최적(最適)’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아주 우수하다는 정도겠지요.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오른쪽 뒷편으로 박인환의 생전의 얼굴사진이 보인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동상 앞에서 관광객이 사진을 담는다. 뒷편으로 얼굴 사진이 보인다.


  박인환은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 내수동에 잠시 살다 원서동 215번지로 이사 갔는데, 당시 살던 집이 바로 창덕궁 서쪽의 용수산 비원점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제가 가보니 얼마 전 허물어져 지금은 폐허이며 바로 옆은 원불교에서 지은 ‘은덕문화원’과 카페 마고가 있습니다. 용수산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분께 물어보니 “얼마 전에 재개발하려 없앤 건물인데 그냥 있었어도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고 했습니다.

  시인 박인환 얘기를 꺼내자 이러시더군요. “한 6개월 살았나?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라에서 나서야지, 민간인이 어떻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문학사의 주요 인물들의 자취가 이렇게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에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박인환이 ‘의사의 길’을 버리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은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그만두고 ‘말리서사(茉莉書舍)’라는 책방을 시인 오장환에게서 인수합니다. 영재들만 간다는 경기중학과 평양의전마저 중퇴하면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왔던 박인환에게 말리서사(요즘은 마리서사라고 부름)는 문단(文壇)이라는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교두보였다고 하겠습니다. 말리서사를 인수할 때 박인환은 아버지에게 5만원, 작은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렸습니다. 박인환이 서점을 연 것은 오장환이 운영하던 ‘낭만서점’에서 힌트를 받은 바 크다는 게 중론입니다. 당시 오장환의 낭만서점은 김기림-김광균-이시우 같은 쟁쟁한 시인과 소설가가 몰려 교류하는 장(場)이었습니다.

 

박인환이 문학에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박인환이 문학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말리서사라는 이름의 유래를 두고 양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여성 시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와 어울린 파리 예술계의 중심인물이었지요. ‘말리’란 한자어가 일본 시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이름이 ‘군함말리(軍艦茉莉)’이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바람대로 박인환의 말리서사는 시인-소설가-화가-영화감독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우정을 다지고 예술을 논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바람대로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합니다.

  내친김에 저는 박인환의 말리서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주소로 서울시 종로3가 2번지 말리서사는 탑골공원 바로 옆 좁은 골목이 아닌 동쪽으로 30m쯤에 떨어진, 승용차가 두대 정도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입구에 있습니다. 지금은 대한보청기라는 회사가 들어서 있는 스무 평 남짓한 공간으로 빨간색 건물이지요. 한때 이 땅의 청년들의 문학의 메카였던 곳이 지금은 연세 드신 분들의 공간이 됐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일요일 한낮이었는데 벌써 술잔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더군요.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니 뭐니 하는, 언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종로거리의 영락(零落)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인제의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명동이나 충무로 혹은 종로에 있는 것들입니다. 박인환은 이 말리서사를 1948년 폐업합니다. 아무래도 김경인-양병식-김수영 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하느라 서점을 운영할 시간이 적었던 게 아닌가 싶지만, 시인 박인환은 전성기를 맞지요.

  한 살 아래인 이정숙과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그가 거주한 곳은 세종로 135번지인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교보문고 옆쪽 주차장입구입니다. 제가 가보니 이번에는 도로포장 공사를 하느라 얼마 전까지 있던 박인환 거주지라는 돌비석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없어지는 게 많은지. 공사를 하는 분들께 물어보니 “포장이 끝날 때까지 대림건설 본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박인환이 결혼해 1956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산 곳입니다. 그곳이 지금의 교보문고가 된 것을 보면 뭔가 인간의 운명(運命)이라는 게 꼭 존재하는 것만 같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박인환은 자유신문사(1948년)-경향신문사(1949년) 기자로 일하며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아메리카의 영화시론’ ‘사르트르와 실천주의’ 같은 글들을 발표하며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시키지만 한참 솟아나던 청춘의 시심(詩心)이 무자비한 포화(砲火)에 짓밟히고 맙니다.

  바로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6ㆍ25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박인환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지냈습니다. 서울 수복이 되기 사흘 전인 9월 25일에는 장녀 세화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서울에 다시 국군이 진입한 이후 비로소 박인환은 가솔을 이끌고 대구로 피난을 갑니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간 박인환은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둔 뒤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 옛집으로 돌아온 박인환은 우리가 잘 아는 ‘명동시대’의 주역이 됩니다. 당시 명동에서 그가 드나든 곳은 다방과 살롱과 대폿집입니다. 50년대의 정취를 되살리며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먼저 박인환과 처음 인연을 맺은 선술집, 지금의 대폿집은 ‘유명옥’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충무로 4가에서 운영하던 유명옥은 빈대떡 집인데 김수영-박인환-김경린-양병식 등이 모여 ‘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훗날 박인환 동인집 ‘신시론 1집’의 밑거름도 여기였지요. 박인환은 밤에 유명옥으로 가기 전 ‘봉선화다방’에 즐겨 들렀습니다. 광복이 되자 명동에서 초기에 생긴 다방 중 하나 라는 봉선화다방은 고전음악 전문점으로 차 마시는 공간일 뿐 아니라 시 낭송,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종군화가 전시회, 음악가들의 작곡발표회까지 열린,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이었습니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봉선화다방의 과거 모습 역시 인제 박인환 문학관에 복원돼 있는데 무섭게 생긴 남녀 인형들이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듭니다. 봉선화다방 못지않게 박인환이 자주 들렀던 곳이 다방 모나리자입니다. 문인들의 회고로는 시인들은 이런 다방에서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한번 들러주길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글 쓰는 게 유일한 생계수단인 시인들이 신문사 편집국장 만나는 게 곧 돈 버는 길이었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동의 문인들은 ‘모나리자파’와 인근의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모나리자가 얼마 되지 않아 없어지자 이번엔 옛 대한중석 본사 바로 옆 ‘동방싸롱’으로 우르르 몰려갔다고 합니다.

  모나리자와 관련해 박인환에게는 이런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박인환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술값이 모자라 맡겨놓았던 만년필을 찾아 친구였지만 유파(類派)가 달랐던 김수영에게 선물로 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지막을 짐작할까요? 박인환의 사례를 보며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저는 모나리자 다방의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흔적을 뒤져도 명동에서 ‘소공동 조선호텔 가는 방향’이라는 말밖에 없었지요. 대신 동방싸롱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방싸롱은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 명동점 바로 옆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푸른색 가림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원서동 집도, 교보문고 뒤 집터라고 새겨진 돌비석도, 동방싸롱도 하나같이 없어졌거나 공사 중이니 웬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최불암 어머니 명동 은성 주점을 차린 이유는?

  동방싸롱이 입주한 동방문화회관 건물은 1955년 완공된 것으로 당시로써는 최첨단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사업가 김동근이 희사한 것입니다. 1층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싸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다방이나 선술집을 전전하던 문인들에게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1957년 문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김동근이 어린 아들과 밤섬에 뱃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불행이 닥칩니다. 주인이 없어진 건물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돌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얼마 전까지 치킨집-호프-당구장이 입주한 건물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연극인 이해랑이 카페와 주점을 운영했다는 이 역사적인 건물 역시 이제 과거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됐으니 우리 역사는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박인환과 명동의 추억을 되새길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포엠이란 위스키 시음장입니다. 박인환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렸는데 굉장한 멋쟁이였다지요. 얼굴 자체도 미남형인데다 초콜릿색 싱글 양복에 홍시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커피색 양말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포엠에서 즐긴 위스키는 계절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를 마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봉구는 ‘명동’이라는 글에서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곳은 은성이라는 막걸릿집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가 운영하던 은성은 명동 파출소 맞은 편으로 지금은 신발 판매장으로 바뀌었는데 앞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이명숙 여사가 은성을 차리게 된 데는 일찍이 청상(靑霜)이 된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과로로 숨지자, 외동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막걸릿집을 연 것입니다. 은성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병상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최씨의 회고로는 천병상 씨는 항상 입구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리에 앉을 엄두를 못 낸 것인데 누군가 “이리와 한잔하라”고 부르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냉큼 달려가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명숙 씨는 박인환 일행이 외상 갚을 생각도 없이 술을 요구하자 외상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지요.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70년대 낭랑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린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도 유명한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시가 완성되자 박인환은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넘겨 곡이 완성되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서슬 푸르게 외상값을 요구했던 은성 주인이 펑펑 눈물을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인환이 쓴 시는 은성 주인의 슬프게 끝난 과거 연애(戀愛)를 시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이봉구의 단편소설 ‘명동’에 나옵니다.

 ※  저의 추측으로는 은성 주인이 박인환에게 은연 중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기에 즉흥적으로 박인환이 주인의 마음을 시로 그렸지 싶습니다.(편집 옮긴이 추가)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탤런트 최불암은 이 은성을 부활시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기인이사 1편’에 등장한 한옥 아티스트 안영환씨를 찾아 복원 방법을 논의했다지요. 그 계기는 안씨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당시 유진룡 문화관광부장관였습니다. 최씨의 사연을 듣고 유장관이 절친한 동창이었던 안영환씨와 연결시키준거지요. 안씨가 운영하는 한식점 ‘진사댁’과 일식점 ‘제주미항’이 옛 은성 맞은편,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씨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사댁 지하를 은성처럼 꾸며 주막처럼 잔 막걸리를 팔 생각도 해봤는데, 최불암 씨가 전체를 쓰고 싶어했어요. 그러면 주방을 옮겨야 해서 고민 중입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명동은 온통 중국인 관광객들 천지이지요. 거리에는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어 걸어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분들이야 생계를 잇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옛 추억이 남아있는 명동을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성 하나 복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박원순 시장이 노점상 생존권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 본류(本流)인 명동을 고급으로 부활시킨다면 중국관광객 유커(遊客)들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거양득의 정책이 아니겠습니까? 사라져가는 명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해본 생각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글쓴이  문갑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편집 옮김]:봄내지기 (일부 띄어쓰기, 내용을 첨부하였음을 알립니다. 개인적으로 인제 박인환문학관에 몇 번 다녀왔는데, 상징적인 의미는 있어도 자료가 부실해 아쉬움이 컸습니다. 인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인환이 한국전쟁을 끝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자료가 많이 남아있을 리 없겠지만 문갑식 기자가 쓴 이 글처럼 박인환과 얽힌 추억담이라도 좀 더 많이 비치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5yBfHwKzHZE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v6NarYtcfno


박인환은 왜 술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을까?


  경춘고속도로 하행선 동홍천IC를 지나 속초로 가는 국도변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 156번 길, 옛 행정명 상동리 415-1번지입니다. 60년부터 80년대까지 연정(戀情)에 빠졌던 분이라면 한 번쯤 읊어보았을 어느 멋쟁이의 시(詩) 한 수를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5yBfHwKzHZE(영상 시-편집 옮긴 이 추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않는다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않아도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바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 시는 박인환(朴寅煥ㆍ1926~1956)이 쓴 ‘목마와 숙녀’입니다. 1926년 8월15일 소양강 상류 인제읍 상동리 159번지 강촌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평소 흠모했던 이들이 셋입니다. 영국 시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 프랑스 작가 장 콕토(1889~1963),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입니다. 저는 박인환의 시를 요즘 문체가 아닌 발표 당시 그대로 실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바지니아 울프’라는 표현이 더 정감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만가(輓歌)라고 하지요. 대체 박인환은 왜 울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이 시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고 넘어가지요.


목마와 숙녀를 적어놓은 아크릴판 한가운데로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쳐 보인다.

목마와 숙녀를 적어놓은 아크릴판 한가운데로 박인환이 흠모했던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비쳐 보인다.


  박인환이 한창 시인으로 재능을 꽃피우던 시기는 6ㆍ25의 상흔(傷痕)이 뚜렷이 남아있던 1950년대입니다. 그야말로 허무와 불안의 시기였습니다. 흔히 문학사를 보면 우리 세기말, 혹은 국가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페스트 같은 대규모 질병이 창궐했을 때 허무주의가 강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우리 문학사에는 ‘창조’ ‘폐허’ ‘개벽’같은 동인지들이 등장하는데 이 창조나 폐허나 개벽이란 단어가 실은 같은 정조(情調)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500년 조선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자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고 국토마저 일본에 빼앗기며 문학인들은 허무주의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광복의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살육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으며 국토가 잿더미로 변한 6ㆍ25 직후에 허무주의가 강하게 대두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박인환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강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 끊은 울프의 비극적 삶과 자신이 살던 시대를 동일시했습니다. 바로 그 불안과 허무의 상징물이 ‘목마’라고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쓸쓸한 가을 속으로 목마를 타고 떠난 울프(숙녀)를 애도하며 박인환은 떠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별은 비록 삶의 행로(行路)를 밝히는 좌표이자 희망의 상징이지만 술병에서 부서지고 말지요. 이렇게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늙은 여류작가의 눈’처럼 세상에는 ‘등대에 불’, 즉 길잡이가 보이지 않았지요.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뱀’으로 상징되는 통속적인 욕망뿐이었습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있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한켠에 있는 목마. 안에는 책들이 비치돼있다.


시를 읽고 나니 제가 속초 가는 길에 보았던 인제로 156번 길 박인환 문학관으로 들어가 보고 싶으시겠지요. 저 역시 한참을 지나쳤다가 무엇에 홀린 듯 유턴해 박인환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4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박인환은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습니다. 그에게 ‘인제(麟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던 산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지금은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할까 부질없고나(…중략)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인제 박인환 거리에는 박인환의 시를 새긴 구조물들이 많다.


  박인환 문학관 바로 옆, 속초~동홍천 국도에 ‘박인환의 거리’가 있습니다. 한 병원 장례식장 바로 옆에 조성된 100m남짓한 거리지요. ‘장례식장’이라는 말과 요절한 시인의 생애가 묘한 연상을 자아내는데 거기 이 ‘인제’라는 시가 적힌 흰색 철제 의자가 있습니다. 마침 여름 햇살에 이 시구가 땅에 비쳤지요.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인제’라는 시는 시인의 머릿속에서 ‘산간 벽촌’과 ‘가난’의 상징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봄이여 빨리 오라’고 외치지만 시인이 떠난 지 한참 됐는데도 인제는 여전히 산촌(山村)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목마와 숙녀’의 허무주의와는 또 다른 한국적 정서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시입니다. <中편에계속>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박인환 거리에 있는 부조는 음각으로 돼있어 보는 각도마다 표정이 바뀐다.

Photo by 이서현


당시 명동 문인들 '모나리자파'와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2012년 만들어졌다는 박인환 문학관은 모두 2층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층에는 그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명동의 옛 모습을 재현해놓았고 2층에는 그가 한때 운영했던 ‘마리서사’라는 책방 이름을 딴 마을도서관 ‘마리서사’가 있습니다. 그 한쪽에는 인제 어린이들이 그리고 쓴 박인환의 시와 그림이 자리해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박인환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 뒤 14살 때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합니다. 이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면 꽤 공부를 잘한 학생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실제로 덕수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그는 전체 66명 중 7등이었는데 학교장은 ‘최적(最適)’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아주 우수하다는 정도겠지요.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오른쪽 뒷편으로 박인환의 생전의 얼굴사진이 보인다.
인제 박인환 문학관 마당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오른쪽 뒷편으로 박인환의 생전의 얼굴사진이 보인다.

  박인환은 서울로 올라와 종로구 내수동에 잠시 살다 원서동 215번지로 이사 갔는데 당시 살던 집이 바로 창덕궁 서쪽의 용수산 비원점 바로 뒤에 있었습니다. 제가 가보니 얼마 전 허물어져 지금은 폐허이며 바로 옆은 원불교에서 지은 ‘은덕문화원’과 카페 마고가 있습니다. 용수산에서 주차관리를 하는 분께 물어보니 “얼마 전에 재개발하려 없앤 건물인데 그냥 있었어도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고 했습니다.

   시인 박인환 얘기를 꺼내자 이러시더군요. “한 6개월 살았나?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라에서 나서야지, 민간인이 어떻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 문학사의 주요 인물들의 자취가 이렇게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박인환이 ‘의사의 길’을 버리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은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이 서울로 올라와 머물던 종로구 원서동의 집이 최근 재개발에 들어갔다.
앞에는 용수산 비원점, 뒤로는 카페 마고다.


  박인환은 평양의전을 그만두고 ‘말리서사(茉莉書舍)’라는 책방을 시인 오장환에게서 인수합니다. 영재들만 간다는 경기중학과 평양의전마저 중퇴하면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왔던 박인환에게 말리서사(요즘은 마리서사라고 부릅니다)는 문단(文壇)이라는 전장을 향해 돌진하는 교두보였다고 하겠습니다. 말리서사를 인수할 때 박인환은 아버지에게 5만원, 작은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렸습니다. 박인환이 서점을 연 것은 오장환이 운영하던 ‘낭만서점’에서 힌트를 받은바 크다는 게 중론입니다. 당시 오장환의 낭만서점은 김기림-김광균-이시우 같은 쟁쟁한 시인과 소설가가 몰려 교류하는 장(場)이었습니다.


박인환이 문학에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박인환이 문학에의 꿈을 키우며 만든 말리서사(마리서사)책방을 문학관 안에 재현해놓았다.


   말리서사라는 이름의 유래를 두고 양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랑스 여성 시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와 어울린 파리 예술계의 중심인물이었지요. ‘말리’란 한자어가 일본시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이름이 ‘군함말리(軍艦茉莉)’이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바람대로 박인환의 말리서사는 시인-소설가-화가-영화감독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우정을 다지고 예술을 논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바람대로 박인환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합니다.

   내친김에 저는 박인환의 말리서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주소로 서울시 종로3가 2번지 말리서사는 탑골공원 바로 옆 좁은 골목이 아닌 동쪽으로 30m쯤에 떨어진, 승용차가 두대 정도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입구에 있습니다. 지금은 대한보청기라는 회사가 들어서 있는 스무평 남짓한 공간으로 빨간색 건물이지요. 한때 이 땅의 청년 문학의 메카였던 곳이 지금은 연세 드신 분들의 공간이 됐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일요일 한낮이었는데 벌써 술잔을 기울이는 분들이 많더군요.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니 뭐니 하는, 언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종로거리의 영락(零落)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인제의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건물들은 하나같이 명동이나 충무로 혹은 종로에 있는 것들입니다. 박인환은 이 말리서사를 1948년 폐업합니다. 아무래도 김경인-양병식-김수영 등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을 발간하느라 서점을 운영할 시간이 적었던 게 아닌가 싶지만, 시인 박인환은 전성기를 맞지요.

   한 살 아래인 이정숙과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그가 거주한 곳은 세종로 135번지인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교보문고 옆쪽 주차장입구입니다. 제가 가보니 이번에는 도로포장 공사를 하느라 얼마 전까지 있던 박인환 거주지라는 돌비석이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없어지는 게 많은지. 공사를 하는 분들께 물어보니 “포장이 끝날 때까지 대림건설 본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박인환이 결혼해 1956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산 곳입니다. 그곳이 지금의 교보문고가 된 것을 보면 뭔가 인간의 운명(運命)이라는 게 꼭 존재하는 것만 같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종로구 교보문고 뒷골목이다. 오른쪽 주차장에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박인환은 자유신문사(1948년)-경향신문사(1949년) 기자로 일하며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아메리카의 영화시론’ ‘사르트르와 실천주의’ 같은 글들을 발표하며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시키지만 한참 솟아나던 청춘의 시심(詩心)이 무자비한 포화(砲火)에 짓밟히고 맙니다.

   바로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6ㆍ25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박인환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지냈습니다. 서울 수복이 되기 사흘 전인 9월 25일에는 장녀 세화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서울에 다시 국군이 진입한 이후 비로소 박인환은 가솔을 이끌고 대구로 피난을 갑니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간 박인환은 1952년 경향신문사를 그만둔 뒤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 옛집으로 돌아온 박인환은 우리가 잘 아는 ‘명동시대’의 주역이 됩니다. 당시 명동에서 그가 드나든 곳은 다방과 살롱과 대폿집입니다. 50년대의 정취를 되살리며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먼저 박인환과 처음 인연을 맺은 선술집, 지금의 대폿집은 ‘유명옥’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충무로 4가에서 운영하던 유명옥은 빈대떡 집인데 김수영-박인환-김경린-양병식 등이 모여 ‘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훗날 박인환 동인집 ‘신시론 1집’의 밑거름도 여기였지요. 박인환은 밤에 유명옥으로 가기 전 ‘봉선화다방’에 즐겨 들렀습니다. 광복이 되자 명동에서 초기에 생긴 다방 중 하나라는 봉선화다방은 고전음악 전문점으로 차 마시는 공간일 뿐 아니라 시 낭송,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종군화가 전시회, 음악가들의 작곡발표회까지 열린, 이른바 복합문화공간이었습니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유명옥과 동방싸롱의 재현된 모습은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추억을 떠오르게한다.


   봉선화다방의 과거 모습 역시 인제 박인환 문학관에 복원돼 있는데 무섭게 생긴 남녀 인형들이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듭니다. 봉선화다방 못지않게 박인환이 자주 들렀던 곳이 다방 모나리자입니다. 문인들의 회고로는 시인들은 이런 다방에서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한번 들러주길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글 쓰는 게 유일한 생계수단인지라 신문사 편집국장 만나는 게 곧 돈 버는 길이었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동의 문인들은 ‘모나리자파’와 인근의 ‘문예싸롱파’로 나뉘었다는데 모나리자가 얼마 되지않아 없어지자 이번엔 옛 대한중석 본사 바로 옆 ‘동방싸롱’으로 우르르 몰려갔다고 합니다.

   모나리자와 관련해 박인환에게는 이런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박인환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술값이 모자라 맡겨놓았던 만년필을 찾아 친구였지만 유파(類派)가 달랐던 김수영에게 선물로 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지막을 짐작할까요? 박인환의 사례를 보며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이번에 저는 모나리자 다방의 위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흔적을 뒤져도 명동에서 ‘소공동 조선호텔 가는 방향’이라는 말밖에 없었지요. 대신 동방싸롱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방싸롱은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 명동점 바로 옆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푸른색 가림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원서동 집도, 교보문고 뒤 집터라고 새겨진 돌비석도, 동방싸롱도 하나같이 없어졌거나 공사 중이니 웬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최불암 어머니 명동 은성 주점을 차린 이유는?

   동방싸롱이 입주한 동방문화회관 건물은 1955년 완공된 것으로 당시로써는 최첨단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사업가 김동근이 희사한 것입니다. 1층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싸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다방이나 선술집을 전전하던 문인들에게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1957년 문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던 김동근이 어린 아들과 밤섬에서 뱃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불행이 닥칩니다. 주인이 없어진 건물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돌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기 얼마 전까지 치킨집-호프-당구장이 입주한 건물인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연극인 이해랑이 카페와 주점을 운영했다는 이 역사적인 건물 역시 이제 과거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됐으니 우리 역사는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박인환과 명동의 추억을 되새길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포엠이란 위스키시음장입니다. 박인환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렸는데 굉장한 멋쟁이였다지요. 얼굴 자체도 미남형인데다 초콜릿색 싱글 양복에 홍시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커피색 양말에 초콜릿색 구두, 검정 박쥐우산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포엠에서 즐긴 위스키는 계절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조니워커를 마신 것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봉구는 ‘명동’이라는 글에서 “펜과 종이, 술병이 명동 행차의 필수품이었으며 명동이 있고, 문학이 있고 술이 있었기에 우리는 행복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곳은 은성이라는 막걸릿집입니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가 운영하던 은성은 명동 파출소 맞은 편으로 지금은 신발판매장으로 바뀌었는데 앞에 작은 돌비석이 있습니다. 이명숙 여사가 은성을 차리게 된 데는 일찍이 청상(靑霜)이 된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최불암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 과로로 숨지자 외동아들과 생계를 잇기 위해 막걸릿집을 연 것입니다. 은성에는 당대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병상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최씨의 회고로는 천병상씨는 항상 입구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자리에 앉을 엄두를 못 낸 것인데 누군가 “이리와 한잔하라”고 부르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냉큼 달려가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명숙씨는 박인환 일행이 외상 갚을 생각도 없이 술을 요구하자 외상을 갚으라 합니다. 그러자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지요.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명동 한복판에 있는 옛 은성주점 터. 작은 기념비가 서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70년대 낭랑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린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도 유명한 ‘세월이 가면’을 즉석에서 써내려간 것입니다. 시가 완성되자 박인환은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넘겨 곡이 완성되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서슬 푸르게 외상값을 요구했던 은성 주인이 펑펑 눈물을 쏟으며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인환이 쓴 시는 은성 주인의 슬프게 끝난 과거 연애(戀愛)를 시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이봉구의 단편소설 ‘명동’에 나옵니다.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박인환 문학관에 재현된 막걸리집 은성.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다.

  탤런트 최불암은 이 은성을 부활시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기인이사 1편’에 등장한 한옥 아티스트 안영환씨를 찾아 복원방법을 논의했다지요. 그 계기는 안씨와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당시 유진룡 문화관광부장관였습니다. 최씨의 사연을 듣고 유장관이 절친한 동창이었던 안영환씨와 연결시키준거지요. 안씨가 운영하는 한식점 ‘진사댁’과 일식점 ‘제주미항’이 옛 은성 맞은편,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씨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사댁 지하를 은성처럼 꾸며 주막처럼 잔 막걸리를 팔 생각도 해봤는데 최불암씨가 전체를 쓰고 싶어했어요. 그러면 주방을 옮겨야 해서 고민 중입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배우 최불암이 자필로 쓴 은성의 단골손님 명단.

그는 어느 시인이 어느 자리에 주로 앉았었는지까지 표시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명동은 온통 중국인관광객들 천지이지요. 거리에는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어 걸어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분들이야 생계를 잇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옛 추억이 남아있는 명동을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성 하나 복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박원순 시장이 노점상 생존권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 본류(本流)인 명동을 고급으로 부활시킨다면 중국관광객 유커(遊客)들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거양득의 정책이 아니겠습니까? 사라져가는 명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해본 생각이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글쓴이  문갑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편집 옮김]:봄내지기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0UiQOAFSTMA (진달래꽃/마야 원곡)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Mb_KkrJIkxY (슬픈 인연/나미 원곡)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v2-AUNhrneU (사랑했지만/김광석 원곡)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x9eS1sjJizQ (기억속으로/ 이은미 원곡)



외모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만큼이나 쏘냐의 가창력은 음악팬들에게 개성적이고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쏘냐를 좋아하는 것은 가수이기 전에 뮤지컬배우로서 탄탄한 연기와 보컬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쏘냐의 노래하는 표정을 바라보면 그녀의 영혼 속으로 빠져드는 나만의 음악여행을 떠날 수 있어 행복하다.

무더운 여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도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이지 싶어 편집해 올립니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큰 화면으로 보시면 쏘냐의 다른 노래와 멋진 모습을 좀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페에쑤~!

노래 못하는 사람들이 명곡은 빠짐 없이 찾아 듣는 이상 야릇한 버릇을 갖고 있죠. 저도 그 중의 한 사람 ㅎㅎ

그러나 원곡의 맛을 음미하며 퍼포먼스만큼은 그 누구 못지 않게 격정적으로, 절절하게 따라 흉내 내는데

모니터 앞이라 봐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ㅋㅋ 음악을 좋아하면 우리 뇌는 긍정의 신호를

보내 건강에 좋다는군요. 참, 노래하며 에너지 소비도 만만치 않아 다이어트 효과도 있어 일석이조 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176/65~7kg에 38-29-38 inch 체형을 수십 년간 유지할 수 있나 봅니다. ㅋㅋㅋ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04-M3n_mViE


    정호승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 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정서를 잘 드러내는 시가 또 있을까. 정호승 시인이 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김태근 낭송가의 맛갈스런 낭송으로 시가 날개를 달았다. (옮긴이 추가)


                                                              수선화에게

                                                   글/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흐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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