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유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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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전투 그 결정적 3일!(대한민국을 구한 6사단 장병들과 김종오 장군) 2016.11.16
- 2014 춘천지구전투 전승행사(명량 패러디) 2016.11.16
- 인디언 '구르는 천둥'의 말/법정 2016.10.31
- 우리가 외로운 이유/혜민 스님 2016.10.28
- 하필이면/장영희 교수님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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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랩] 평창군 미탄면의 백룡동굴 2016.07.02
- [스크랩] 혜민 마음치유학교 교장 " 내 생각과는 다른 모습, 창피할 때 있다 " 2016.05.13
- 젊은날의 초상(최인호 회고록) 2016.04.11
춘천 전투 그 결정적 3일!(대한민국을 구한 6사단 장병들과 김종오 장군)
2014 춘천지구전투 전승행사(명량 패러디)
출처: 유투브
인디언 '구르는 천둥'의 말/법정
인디언 '구르는 천둥' 의 말/법정
여기저기서 꽃이 피고 잎이 열린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귀에 익은 새소리들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난다. 자연의 질서, 순환의 흐름은 이렇듯 어김없다.
먼지와 소음과 온갖 공해로 뒤덮인 번잡한 길거리에서, 그래도 철을 어기지 않고 꽃과 잎을 펼쳐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 반갑고 기특하면서도 안스럽기 그지없다. 누가 피어나라고 재촉한 것도 아니지만 때가 되니 스스로 살아 있는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 생명의 신비다.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그 모진 추위 속에서도 얼어죽지 않고 살아 있다. 겉으로 보면 깊은 잠에라도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뿌리와 줄기는 그 침묵 속에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한다. 흙을 의지해 서서 햇볕을 받아들이고 바람을 받아들이고 물기를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은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나무만의 일이 아니다. 사람도 이 '지, 수. 화, 풍'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 흙과 물과 햇볕과 공기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이런 고마운 은혜를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있고 또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흙大地 이 없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마실 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햇볕을 전혀 볼 수 없고, 숨쉴 공기가 없다고 가정해 보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지, 수 , 화, 풍, 즉 우리 환경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가.
잔인한 백인들에 의해서 현재는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지만, 지혜로운 영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일찍이 물질문명에 눈이 먼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우려와 두려움을 나타내 왔다.
체로키족의 추장, '구르는 천둥'은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한 장소를 더럽히면 그 더러움은 전체로 퍼진다. 마치 암세포가 온몸으로 번지는 것과 같다. 대지는 지금 병들어 있다. 인간들이 대지를 너무도 잘못 대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많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큰 자연재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현상은 대지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대지 위에 세워진 많은 것들은 대지에 속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체에 침투한 병균처럼 대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이물질들이다. 당신들은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대지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시도로 크게 몸을 뒤흔들 것이다."
요 근래에 이르러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과 기상이변으로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는 자연의 재해는 무엇을 뜻하는가. 짐승들은 뭄에 물것이나 이물질이 달라붙으면 온몸을 움직여 그걸 털어 버린다. 그건 일종의 자기정화 활동이다. 커다란 생명체인 이 지구도 자정 활동의 일환으로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구르는 천둥'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보자.
"지구는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다. 지구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의지를 가진, 보다 높은 차원의 인격체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지구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상처를 주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며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는 것은 곧 지구에게 상처를 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뿌리를 잊어버리고 가지에만 매달린 병든 문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우주적인 눈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경고에 공감한다.
올바른 이해는 책이나 선생으로부터 얻어듣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움튼다. 인디언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위대한 정령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위대한 정령이란 무엇인가. 풀이나 바위나 나무 또는 물과 바람 등 세상 만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 그 자체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의 느낌이나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의 방식이고, 우리 자신과 우리 둘레의 수많은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신성한 의무이기도 하다.
문명인들이라고 자처하는 현재의 우리들 삶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비정하고 냉혹한 일들을 경쟁이란 논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무한경쟁시대'니 '일류가 아니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주장의 배후에는 남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파괴적인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제일주의에 도취된 오늘의 우리들은 생명의 원천인 자연을 자연의 방식이 아닌,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 만 급급한 나머지 요즘 같은 지구 환경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삶의 기본적인 진리는 이웃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뿐 아니라 온갖 형태의 생명이 포함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편의나 이익을 위해 남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개체와 전체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으로 이뤄질 때 가장 바람직하다. 이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거기 이변이 생긴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무너져 오늘날의 지구는 온갖 환경 재난에 시덜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거듭 흙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물에 대해서, 따뜻한 햇볕에 대해서, 그리고 공기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은덕으로 숨을 쉬며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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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로운 이유/혜민 스님
<마음 산책>-우리가 외로운 이유/혜민 스님 2016.10.28 중앙일보 오피니언
사람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같이 살고 있는 부모나 배우자 · 아이들이 있고,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매일 보는 직장 동료도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살아도 외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돈이나 권력, 유명세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을 더 의심하고 더 외로워하는 것 같다. 마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한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낀다. 왜 그럴까?
인간 중심 치료 아버지라라고 할 수 잇는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우리가 외로운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상대가 수용해 주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만약 그랬을 때 상대가 자신이 나를 따뜻하게 지지해 주는 게 아니라 내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평가하고 상처 내고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에게 떠벌리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한다.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춘 채 사회적 시각에서 봤을 때 비난받지 않을 수준에서 안전하고 피상적인 만남만을 가진다. 그런 만남은 깊은 유대감이나 연결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누굴 만나도 마음은 공허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믿지 못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남도 아닌 가족한테까지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고립돼 외로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부모 · 자식 사이나 부부 사이, 형제자매 간에도 심리적인 벽이 생기는 것일까?
칼 로저스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에게 안전한 분위기에서 긍정적 지지와 조건 없는 사랑을 주지 못한 경우에서 비롯된다는 한다. 부모도 자신의 부모로부터 존중받아 본 경험이 없는 경우 본인도 모르게 자기 아이의 생각이나 결정을 마음대로 평가하고 컨트롤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가 행동해 줬을 때만 인정해 주면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자기 스스로의 느낌이나 결정을 신뢰하기보다는 부모의 바람이나 결정을 더 살피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감정을 부모 앞에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는 게 일상화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감정을 숨기고 모든 것이 문제가 없는 듯 가면을 쓰게 된다.
부부 사이나 형제자매 간에도 비슷하다. 가까운 사이이니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이미 다 안다는 생각에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솔직한 민낯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배우자나 형제자매가 내 편이 돼 내 마음을 알아주고 푸근하게 나를 수용해 주길 바라지만 그렇게 해 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보다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지고 긴밀하게 소통하지 못하니 서로에 대해 점점 잘 모르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가까운 주변 친지와 속마음을 나누고 더 친밀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만약 부모나 형제, 가까운 친구가 내 모습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존중해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칼 로저스에 따르면 만약 그런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가면 뒤에 숨길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만한 것이구나,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서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한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존중을 받아 본 사람만이 다른 이도 존중할 줄 알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존중받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가 성장하면 아이는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마음껏 발휘해 인생의 꽃을 피우려 한다는 점이다. 자기의 선택을 긍정하며 다른 이들의 의견에 끌려다니지 않고, 실패를 해도 책임지려 하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곧 회복한다. 만약 자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존중해 주는 부모나 형제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런 사람을 찾아 만나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좋은 인생 선배나 자비한 친구, 아니면 심리상담 선생님도 좋으니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수용하고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 보길 권한다. 훨씬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리적 부담감도 줄어들 것이다.
사람은 외로운 존재다. 특히 자기의 진실된 속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 가을에 혹시라도 친한 이가 자기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를 한다면 내 기준으로 섣불리 재단하지 말고 따뜻하게 경청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한다면 상대도 역시 자기 속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2016년 10월 28일 중앙일보 오피니언에서 발췌 옮김
옮긴이:meister59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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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장영희 교수님
(독자 감상- 박재식 ) <하필이면 / 장영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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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작자인 장영희(張英姬, 1952~2009)는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이다. 역시 영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부친 장왕록(’91년 작고) 박사와 소아마비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 조차 못한 그를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등에 업고 통학시킨 평생의 보호자였던 어머니, 이길자 여사 사이 1남 5녀 중 둘째 딸로 서울에서 태어난다. 두 다리를 못 쓰는 1급장애자로 평생을 목발에 의지하여 산 그는 ’75년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77년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85년에는 미국 뉴욕주립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모교인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 재직중에 향년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09년 5월 간암으로 서거하자 국내 매스 미디어는 일제히 그의 생애에 대한 자취를 기리며 애도하는 기사를 대서 특필로 보도했다. 그러나 그의 남다르게 두드러진 생애 행적은 이미 생전에 장애우의 귀감으로, 또 삶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안겨 주는 지성의 메신저로 늘 밝은 웃음을 띤 초상과 함께 널리 세인에게 알려진 터이기도 하다. 미상불 장영희의 남다른 생애는 마치 부실한 꽃대가 피운 한 송이 아름다운 꽃과 같은 기적의 삶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1급 장애의 부실한 신체적 조건을 이기고 깔축 없는 학업 과정과 박사 학위까지 마치고 대학의 유수한 영문학 교수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한층 돋보인 것은 이런 기특한 성취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국내 여러 일간지를 통해 에세이성 칼럼을 연재하여 빼어난 문필적 소양을 드러내고, 특히 ≪샘터≫지에 <새벽 창가에서>라는 표제의 고정 칼럼을 통해 주로 부정적인 운명을 극복해 온 자신의 정신적인 체험을 기조로 하여 참다운 인생이 갖는 행복과 희망 의 의미를 주제로 한 수필을 연재함으로써 독자의 공감과 심금을 울린 문학적인 작품활동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01년 유방암을 시작으로 척추암, 간암을 차례로 앓은 9년간의 가혹한 투병생활 중에도 의연히 붓을 놓지 않고 이전에 못지 않은 왕성한 저작활동을 지속한 초인적인 행적은 세인의 마음을 숙연케 한 바가 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이같은 초인적인 힘의 연원을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의지나 노력의 소산이 아닌 “본능의 힘”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그의 마지막 저서이자 유작집이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된 삶에 대한 철학의 고백이자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 한 모티브와 주제의식의 실체를 말해 준 것과 다름 아니다. 그가 남기고 간 저서는 숱하게 많다. 전공인 영문학의 소양을 바탕으로 낸 영미 문학작품 번역과 해설서는 말할 것도 없고, 김현승 시집을 영역하여 ‘한국문학번역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중적인 성가를 모은 책은 두 권의 수필집이다. 2000년 첫 수필집으로 낸 ≪내 생애 단 한번≫(‘샘터사’ 간)은 이미 50쇄를 넘어설 만큼 장기간 베스트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그의 운명 직후에 발간된 유작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09년 ‘샘터’사 간) 도 지대한 인기 속에 쇄를 거듭할 기세이다. 감상할<하필이면>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수필적인 형식과 기지가 돋보인 글로 서 ≪내 생애 단 한번≫의 첫머리에 수록된 수필이다.
❍ 해설
이 글은 ‘하필이면’이라는 부사가 사용되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통해 자아상自我像의 정체를 해학적으로 모색한 철학성 수필이다. 작자는 짓궂은 운명의 조화를 ‘하필이면"이라는 표현례表現例에 잡고 10대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 가사를 화두로 삼는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 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한 노래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소외감이나 패배의식은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자격지심이다. 그런데 내가 남만 못하고 불행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불평등한 외적 조화의 탓이라고 여길 때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회적인 부조리에 기인한다고 보면 계급의식이나 혁명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자기 혼자만의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시킬 때 “왜 하필이면 나만” 하고 팔자소관으로 돌려 한탄할 밖에는 없다.
‘머피의 법칙’은 이런 운명론자의 심리를 꼬집은 운수 타령에 불과하다. 미상불 작자도 살아가면서 ‘머피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한 예로 내 열쇠고리에는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열쇠가 두 개 달려 있는데, 하나는 연구 실, 또 하나는 과 사무실 열쇠이다. 열쇠에 유성 펜으로 방 번호를 표시해 놓으면 그만이지 만, 그러기도 귀찮고 또 그냥 재미도 있고 해서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둘 중 아무거나 꽂아 본다 .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수학적으로 따져 볼 때 확률은 분명히 반반인데, ‘하필이면’ 연구실 열쇠가 아니라 거의 과 사무실 열쇠가 먼저 손에 잡혀 두 번씩 열쇠를 돌려야 하는 일이 열이면 아홉이다.
확률을 크게 벗어나는 일은 운수의 불공정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뿐이 아니라 모처럼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는가 하면, 무엇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 다리면 바로 자기 앞에서 매진된다. 한번은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다. 작자는 어이가 없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1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하고 망연자실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머피의 법칙’에 견주어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인 운수의 조화로 치부할 수 있지만, 작자에게는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 이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재능을 골고루 나눠 주 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물론 “깜빡하신” 것은 아니다.
현실로 작자는 잘 팔리는 월간 잡지의 포퓰러 작가로 글을 연재하는 필재의 소유자이지만, 다른 어떤 유능한 작가처럼 펜을 잡으면 일기가성으로 글을 쓰는 재능을 갖지 못했다고 자신을 비하한다. 이것은 그만큼 자기의 글쓰기가 신중을 기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천부의 장애자가 된 불공평한 운명의 조화와 연쇄하여 그 사실을 강조하는 대구적對句的인 구실을 한다. 그리고는 어느 여배우가 화장품 광고의 출연료로 3억 원을 받았다는 여성지의 기사를 읽고 불공평한 세 태의 거품 현상을 꼬집는다. 3억 원이면 교수인 작자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새워 페이퍼에 매달려 읽고 쓰며 10년 쯤 일해야 버는 돈인데, 그 돈을 여배우는 단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고난 생김새 때문인데, 그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 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 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작자에게는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한심하고 슬픈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작자 장영희는 평소 천형天刑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할 만큼 자신의 신체적인 장애에는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희망’이라는 정신적인 지표를 보람 삼아 언제나 긍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정서와 지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므로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갖는 운명의 부정적인 속성의 나열은 그와 같은 자아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설정한 역설적인 전주곡에 불과하다. 아무튼 작자가 하필이면 ‘하필이면’이라는 제재로 글을 쓰게 된 아이러니컬한 동기는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사건에 있다.
작자가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 곰 인형을 하나 사서 주자 눈이 똥그래진 아름이가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나름대로의 고마움의 표시로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한 것이다. 그래서 작자는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의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하고 짓궂은 운명의 악몽에서 깨어나 홀연히 진정한 자아의 긍정적인 세계로 돌아온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 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이렇게 가정적으로 혜택받은 행복한 운명을 필두로, 세상에는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하고 많은데 왜 ‘하필이면’ 자기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교수로서의 지체에 대한 충만감을 섬기고, 게다가 하는 짓이 어쭙잖기만 하고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자기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사랑해 주는가.” 하고 따뜻한 세정 속에서 소외감 없이 살아가는 행운을 꼽으면서 그것이 “양순하고 웃기 좋아하는 나의 성격 때문”이라는 어머니의 견해를 좇아 “그렇다면 잘빠진 육체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일찍이 3억짜리 여배우의 ‘잘 빠진 육체’에 견주어 3백 원짜리로 폄하한 ‘아름다운 영혼’의 평가를 절상한다.
그리고는 하 필이면’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하고 깨치면서, 문득 '창문을 여니, 우리 학생들이랑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가기로 한 오늘, ‘하필이면’ 날씨가 유난히 청명하고 따뜻하다. ' 하고 단원을 맺는다.
❍ 후평
문학 장르 중에서도 특히 수필을 두고 말할 때 ‘글은 곧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글을 읽으면 인간 장영희의 참모습을 그 생애와 함께 바로 가까이에서 보는 느낌이 드는 수필이다. 글의 중심 포인트가 되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달리 하거나 달리 되지 않고 어찌하여 '꼭’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 보편적인 기대나 예상에서 어긋나는 현상이 생겼을 때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작자의 조카가 다른 조카들을 두고 자기에게만 주어진 선물을 받고 다소 ‘부적합한’ 대로 뜻밖에 기쁨 표시로 사용한 경우처럼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이렇게 ‘하필이면’이라는 표현이 갖는 이중적인 의미 속에 작자는 자신이 타고난 운명과 삶의 모습을 투사하여 묘사한 글이 수필 <하필이면>이다. 정작 작자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성한 몸으로 운신하는 가운데 ‘하필이면’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목발에 의지해 살아가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세상에는 빈곤과 무지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유복한 가정에서 명석한 두뇌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 태어나 유수한 대학의 교수와 문필가로 행세하며 추앙받는 이중의 운명적인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작자는 그 두 운명에서 전자의 불행을 사상 捨象하고 후자의 행운을 취하여 삶의 본질로 삶고 그것을 글로 써서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메시지가 한층 감명적인 진실로 리얼하게 와닿는 요인은 여느 필자의 경우와는 달리 전자의 불우한 운명과 더불어 작용하는 상승 효과에 있는 사실도 배제할 수 없지만, 거의 완벽한 경지로 구상된 수필적 기법이 자아내는 문학성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전자의 부정적인 명운을 다루면서도 마치 남의 얘기라도 하듯 담담하게 엮어가는 문장 속에 번득이는 기지와 해학기법은 가히 수필가로서의 장영희의 진면목을 과시하고도 남음이 있는 작품이다. ("수필과 비평" 2010년 1월호)
※ 장영희 교수님의 글을 좋아하고 애독하던 한 독자로서 일찍이 우리곁을 떠난 아쉬움이 크다. 장영희 교수님이 쓴 에세이집을 거의 다 읽어보고 소장하고 있다. 하늘에서도 또다른 이웃들과 따스한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지 싶다. 부디 천상에서도 아름다운 이야기 많이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훗날 저도 그곳에서 교수님의 애독자가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오자와 탈자, 띠어 쓰기 수정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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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방을 만들며/법정 스님
흙방을 만들며/법정
올 봄에 흙방을 하나 만들었다. 지난해 가을 도자기를 빚는 이당거사(利堂居士)의 호의로 흙벽돌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가 산골에 얼음이 풀리자 실어왔다. 4월 한 달을 꼬박 방 한 칸 만드는 일에 골몰했다. 산 아래 20리 밖에 사는 성실한 일꾼 두 사람과 함께 일을 했다.
이전까지는 나뭇광으로 쓰던 자리에다 방을 들였는데, 이번에는 아궁이를 기존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잡았다. 새로 만든 방의 위치도 위치지만 어떤 바람에도 방 하나만은 군불을 지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 살면서 거센 바람 때문에 군불을 지피는 데 너무나 애를 먹어 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에 겪어 온 경험과 두뇌 회전이 빠른 일꾼의 솜씨로 이번에 만든 방은 불이 제대로 들인다. 나는 당초부터 에상한 바였지만, 처음 방구들을 놓아본다는 일꾼이 불이 제대로 들일지 내심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써 만들어 놓은 방에 불이 안 들이면 말짱 헛일이기 때문이다.
방이 완성되어 처음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날 우리는 기대 반 불안 반이었다. 그러나 불길이 훨훨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는 걸 보고 함께 손뼉을 쳤다. 그때 일꾼은 장난말로 불이 잘 들이면 구둘장 놓는 '쯩'하나 써달라고 했는데, 형식적인 종이쪽지보다도 나는 그의 솜씨를 믿을 수 있게 됐다. 방이 고루 따뜻해졌으니 성공한 것이다.
개울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은 불이 너무 잘 들여, 굴뚝으로 열기가 그대로 빠져나갈 염려가 있다. 그래서 굴뚝 위에 바닥 기왓장을 하나 엎어 놓았다. 방 안의 보온을 위해 필요한 장치다.
이 방은 시멘트를 전혀 쓰지 않고 구들장을 비롯해 모두 돌과 찰흙으로만 되었다. 구둘장 위에 흙을 한 자쯤 덮었기 때문에 군불을 지핀 지 네댓 시간이 지나야 방바닥이 뜨듯해 온다. 이렇게 되면 사나흘 동안은 불을 지피지 않아도 방 안이 훈훈하다. 특히 이런 방은 추운 겨울철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구들장 위에 흙을 두텁게 깔지 않으면, 군불을 지피자마자 이내 더워진다. 아랫목은 프라이팬처럼 뜨거워 발을 디딜 수조차 없다. 아랫목 장판이 까맣게 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 안은 초저녁만 반짝 더워졌다가 새벽녘이면 식어 버린다. 한때 갑자기 뜨거워졌다가 이내 냉랭해지는 세상 인심처럼, 우리 모두가 어렵게 살던 지난날 나그네길에서 하룻밤 묵어 가던 여인숙 방들이 대부분 그랬었다.
며칠 전 새로 만든 흙방에 도배를 했다. 찰흙으로만 다지고 발랐기 때문에 벽과 바닥 사이에 틈이 생겨 연기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초배를 하기 전에 질긴 닥종이를 오려 두세 겹씩 틈을 바른 후에 덧발랐더니 연기가 잡혔다. 연기와 물은 조그만 틈만 있어도 새어나온다.
벽과 천장은 티가 섞인 한지로 바르고 바닥은 장판으로 발랐다. 장판 아홉 장 깔이 방이니 한 평 반쯤 될까. 빈 방에 방석 한 장 깔고 앉아 있으니 새로 중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 거치적거리는 것 없어 홀가분해서 좋다.
장판방이지만 시멘트를 쓰지 않고 흙으로만 발랐기 때문에 바닥이 매끄럽지 않고 우툴두툴하다. 그런데 이 우툴두툴한 질감이 나는 너무 좋다. 요즘은 어떤 방이든지 한결같이 매끄럽고 평탄하기만 한데, 오랜만에 이런 질박하고 수수한 방바닥을 대하니 마음이 참으로 느긋해진다.
요즘처럼 닳아져 가는 세상에서는 '질박함'이나 '수수함'이란 말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다. 현재의 우리들 삶이 질박과 수수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하루 세 끼 먹는 음식만 하더라도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기름지고 걸쭉하고 느끼한 것만을 좋아하는 세태이므로, 담백하고 깔끔한 음식을 대하기가 어렵다. 이런 음식 문화 속에서 살아가노라면 학처럼 곱게 늙기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몸에 걸치는 옷도 질박하고 수수한 모습을 이제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요란한 색상과 과장된 디자인, 그 안에서 움직이는 몸짓도 살갗도 그 위에 바르는 화장도 그런 의상에 걸맞게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주거형태는 어떤가. 거의 규격화된 주거공간으로 인해 그 형태나 마찬가지로 삶의 내용도 두부모처럼 개성을 잃고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질박하고 수수한 것을 낡아빠진 옛것으로 물리친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미덕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미끈하고 반짝거리고 화려하고 화끈함이, 물건이건 인간관계이건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우툴두툴한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씀다듬고 있으면 창밖으로 지나가는 미친 바람 소리도 한결 부드럽게 들린다. 이 방에 나는 방석 한 장과 등잔 하나말고는 아무것도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안에서 나는 잔잔한 삶의 여백을 음미해 보고 싶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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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에 나타난 종교의 상관성/유성호 교수님
윤동주 시에 나타난 종교적 상상력 - 유성호(문학평론가)
1. 윤동주 시와 종교의 상관성
우리가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적 양상을 추출하여 그것을 종교적 차원으로 의미 부여할 때, 특별히 그것이 특정 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칭하여 ‘종교 문학’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신라의 향가 문학이나 한용운, 신석초 등의 시편에 나타나는 불교적 성격,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서 역력하게 감지되는 유불선적 성격, 또는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나 ?목공 요셉?, 김은국의 [순교자],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 보이는 기독교적 성격 등 이른바 종교적 소재에 바탕을 두거나 종교적 이념의 육화에 집중적으로 착목한 작품들은 모두 그러한 ‘종교 문학’의 범주에 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의 하위 범주로서의 ‘종교 문학’이라는 범칭(汎稱)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 문학이 끊임없이 종교적 흐름과 교섭해왔다는 첨예한 예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기독교’는 우리 고대, 중세사와는 별 인연이 없었으나 근대 이후 폭 넓은 자장을 형성하면서 커다란 정신사적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 이후 이 땅에 기독교가 이념적, 사상적, 제의적(祭儀的) 뿌리를 내린 데에는 수많은 투쟁과 견인의 역사가 있었고, 그 투쟁의 행간에 ‘전통과 보수/서구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라는 서양 종교의 유입과 착근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정신사는 그만큼 초유의 생산적 갈등과 변증법적 진보의 토양을 준비한 셈이 된다. 따라서 자생적인 것이 아닌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을 토대로 이룩되기 시작한 우리 근대사에서 이 종교의 영향력은 매우 커다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문학의 하나인 ‘기독교 문학’은 기독교라는 역사적, 이념적, 윤리적 기반과 문학이라는 감각적, 체험적, 형상적 양식이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되어 현출한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 문학’이라든가 ‘이슬람 문학’ ‘샤머니즘 문학’이라는 종교 문학의 하위 범주의 설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딱히 과학적인 변별력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이념이나 사상이 우성적으로 작품 속에 나타날 경우 그것들을 편의적으로 부르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폭 넓은 기독교적 전통을 모태로 태어난 서구 문학의 경우 그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기독교 문학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우리 문학에서는 짧은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 문학의 무게는 서구의 그것에 비해 일천하고 질량 양면에서 빈곤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문학사에 ‘기독교 문학’이라는 범주에 실질적으로 해당하는 작가 또는 작품의 실례가 영성할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러면 ‘기독교 문학’을 말할 때 그것의 필요 조건인 ‘기독교’라는 말이 갖는 실제적인 내포는 무엇인가 ?
기독교에서 낙원의 창조와 상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복원은 하나의 일직선상의 사관을 낳는다. 그것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편집 사관과도 일치한다. 창조의 질서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변환, 이행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역사관에서 배태되는 인간관, 우주관, 가치 중심, 이념 등이 ‘기독교’라는 수사에 응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존적인 자기 각성이라는 메커니즘과 윤리적 완성이라는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게 되는데, 따라서 기독교 문학에서는 심미성이 부차화되고 종교가 지향하는 관념의 형상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사랑, 소명 의식, 희생 정신, 부끄러움, 죄의식, 구원, 소망, 종말론, 실존 의식 등이 이른바 종교적 상상력에서 배태될 수 있는 정서적 세목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의 ‘기독교 문학’이란 그러한 여러 성격이 담겨 있는 문학을 통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교성(護敎性) 선전물이나 신앙 미담 및 간증류 또는 종교적 소재가 작품의 표면에 등장하는 것들을 모두 기독교 문학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높은 형상적 성취와 이념적 내재화를 이룬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 문학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시’ 또한 문학의 구조적 차이에서 정립된 장르적 개념이 아닌, 시인의 상상력, 가치관, 통찰력 등에서 기독교적 요소를 지니는 내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종의 문학외적 요소가 중시되거나 문학을 선교 활동의 매질로 보는 도구적 개념은 우리의 입론에 해당되지 않음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원래 인간은 신적이며 세속적이고, 본체적인 동시에 현상적이라는 이중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 본성 때문에, 세계는 모순되고 역설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 때문에, 세계에서, 세속적인 성격에서, 인간의 비참함에서 보면 신은 부재하지만, 인간의 위대함과 의미, 정의, 진리에 대한 인간의 요구라는 면에서 볼 때면 그렇게 부재하는 신은 또 영원히 전체적으로 현존한다. 이렇듯 ‘부재하며 동시에 현존하는’ 신의 속성이 인간에게 이른바 ‘비극적 세계관’을 배태시킨다. 그러나 비극적 세계관이 이른바 ‘비관주의’로 곧바로 치환되지는 않는다는 데 삶의 비의(秘義)가 숨겨져 있다. 오히려 이러한 역동적인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서정적 주체들이 기독교의 또 하나의 속성인 ‘희망’의 세계관을 어김없이 가지고 갈등하며 고뇌하고 나아가서 그것들을 통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형상으로 창조하려는 열정을 우리로서는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일러 현대시의 ‘영적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는 기독교적 토대가 굳건했던 가정과 학교 그리고 죽음 때까지 자신을 그 범주 안에 살게 했던 신앙적 분위기로 하여 정신의 발생론이 비교적 투명하고 명징한 시인이다. 그에게는 생득적으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모태로 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근본 토양이 있었던 셈이고, 그 같은 조건은 그로 하여금 신앙의 원근법 안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현실적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적극적 참여의 의지를 주기도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신앙적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파토스를 분출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시편들에 나타나는 종교적 상상력이 일정 정도 낭만주의적 성향에 빚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문예사조에 나타나는 낭만주의의 정신적 기조가 ‘동경(憧憬)’이고, 낭만주의 문학을 일러 ‘동경의 문학’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그 같은 동경의 철학적 배경에는 ‘극성(極性)의 원리’ 곧 생의 이념을 양극적인 대립에서 완성을 기하는 운동, 대립을 고차원적인 제삼자로 극복하는 운동이 깔려 있고, 따라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중심 사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유토피아적 열망을 토대로 통일을 지향하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종교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고, 여기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시적 파토스가 그의 시편에 나타나는 관념적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 관념적 진실이야말로 기독교적 토대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그의 삶 자체가 작품 세계와 견실하게 결합할 수 있는 개연성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2. 시를 통한 내적 성찰과 윤리적 자기 완성의 양상
윤동주의 시적 지향이 기독교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은 그간의 윤동주 연구에서 늘 따라붙었던 일종의 관행적 전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튼튼히 결합하고 있었던 간도의 정신적 풍토”가 윤동주의 시와 삶에 미친 영향은 족히 확인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작품 세계를 기독교라는 토대의 프리즘으로 읽어내는 것은 일견 전적으로 타당하지만 그의 복잡한 내면 세계를 응시하는 데 하나의 편견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로서는 윤동주가 기독교라는 하나의 세계를 시적으로 번안하거나 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언표하려 했던 시인이라기보다는, 내적 가능성이자 삶의 자양으로 숨쉬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시편의 곳곳에 삶의 고백으로 실어 보인 시인으로 보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종교적 상상력은 의식적으로 언표되어 있다기보다는 내면화되어 숨어 있고, 적극적으로 추구되고 있다기보다는 배면에서 무의식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내적 성찰의 기록이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전문
어조와 시적 구성에서 다분히 자기 고백적인 이 시는 윤동주의 시정신과 내적 치열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 시정신이란 다름아닌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윤리적 결백성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면에서 어김없이 기독교적 사유 패턴에 기초하고 있다. 일견 맹자의 “仰不愧於天”을 연상시키는 유교적 지절(志節)이라든가 운명적 소명 의식 같은 것이 전면화되어 있지만, 그것은 광의의 기독교적 인생관, 윤리 의식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수직과 수평이 만나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현장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 형상은 종교적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모든 자연은 우주적 신성성으로서 자신을 열어보일 능력을 갖는다는 사실 또한 체험케 한다. 하늘, 바람, 별, 또 바람 이런 것들이 조화와 길항의 세계를 열며 서정적 주체에게 우주적 신성성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아울러 매개하는 상징적 기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상당히 내면화되어 나타나던 그의 종교적 상상력은 다음 작품들에서 시적 모티프는 물론 주제 면에서 일정하게 표면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寢臺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 ?새벽이 올 때까지? 전문
이 작품은 윤동주의 작품 중 기독교적 종말 의식을 명징하게 반영한 시편으로 주목된다. 종말론(Eschatology)은 ‘마지막 일들(ta eschata)’에 관한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른 마지막이 있다는 일종의 사관으로서, 역사를 긴장하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관심과 동기를 부여하는 다이나믹한 역사관이다.
불교적 역사관이 순환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라면, 기독교는 일직선적이고 신 중심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는데, 따라서 신의 심판과 더불어 인간에게는 윤리적인 것이 표나게 강조된다. 자연스럽게 윤동주에게 종말론적 관심은 윤리적 자기 강제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의 또 다른 시편 ?무서운 時間?에서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관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윤리적 의지와 종교적 사명감으로 극복해보려고 노력하는 시인의 인간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 - 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前날 밤에
그 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毒은 어린 꽃과 함께.
― ?太初의 아침? 전문
이 작품의 시각에 의하면, 세계는 근원적인 모순을 포함한 채 창조된 것이다. 태초의 아침에 세계는 이미 ‘사랑/뱀’ ‘독/어린 꽃’이라는 갈등의 세력들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진보적 사유나 실천 행위로 현실적 모순을 타개한다든가 진취적으로 열어 나간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지 시인의 예지는 운명에 대한 긍정과 자기 자신의 윤리적 완성이라는 경로를 밟게 될 뿐이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罪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太初의 아침? 전문
이 작품 역시 구약성서의 창조 신화가 시사하는 상징적 계시의 요체를 시대적 질곡과 함께 통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원죄에 바탕을 둔 낙원 상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이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하고, 고통스럽지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일러준다. 이러한 윤리적 준거야말로 종교적 상상력이 일정하게 극점에 다다를 수 있는 ‘자기 희생’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十字架? 전문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가 반복되고 집요하게 착근되어 지속성과 안정성을 얻을 때 그 독특한 의미는 상징의 영역까지 획득한다고 볼 때, 이 작품에 나타난 ‘십자가’의 이미지는 기독교의 상징적 의미를 넉넉히 함축하고 있다. 더불어 이 시편은 고통을 감수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속에서만 인간이 참다운 인간일 수 있다는 기독교적 가르침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의 확인을 우리가 윤동주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 시사에 기독교가 정착한 뚜렷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윤동주 시의 저항 의식은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주조로 하는 소극적, 자책적 저항 의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책감이 가장 높은 경지로 발전했을 때, 그것은 이 작품에서와 같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자기 희생과 속죄양 의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수난 의식과 속죄양 의식의 익숙한 상징이다. 1, 2연에서 ‘십자가’는 구원에 다다르는 길로 표상되고 있다. 그것은 ‘尖塔’의 날카롭고 높은 이미지와 연결되어서 좀처럼 다다르기 힘든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주체는 구원의 희망을 잃고 서성거릴 뿐이다. 그러나 4연에서 서정적 주체는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를 변화시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괴로움을 지고 괴로워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도 기꺼이 그리스도와 같은 속죄양이 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5연은 그 수난과 희생의 장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이 나타난 그의 속죄양 의식에는 튼튼한 역사적 종말관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종말적 신앙에 입각해서 씌어진 이 시는 훌륭한 하나의 예언시이기도 한데, 그 예언성은 다름아닌 민족의 수난과 영광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개체적 삶에 대한 준열한 다짐과 의지로 표상된다. 그 수난과 영광의 이미지는 기독교적 부활 사상의 세계를 덧입어 다음 작품에서 전면화된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별 헤는 밤? 8-10연
이상과 같이 윤동주에게 종교적 상상력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윤리적 자기 완성으로 치열하게 모아진다. 속죄양 의식, 종말론적 상상력, 부활 의식, 그리고 현실을 견뎌내는 견인과 의지의 목소리가 그의 시의 근본 추진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언표되는 소재적 기호로서의 종교성이 아니라 내적 기제로서, 숨겨진 삶의 원리로서, 그리고 자신의 시의 궁극적 파토스의 토대로서 그 종교성은 윤동주에게 오롯이 빛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종교란 “본질 그것(the substance)이고 터전 그것(the ground)”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어떻게 한 시인의 생존 감각과 더불어 순수한 직관을 통한 창조성을 획득하느냐가 기독교 시를 이 땅에 성립시키는 요인”이라고 할 때 윤동주의 기독교 시편들은 진실한 신앙적 체험과 심미적 가치가 통합되어 형상화된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기독교라는 정신사적 프리즘으로 보는 일은 그의 시적 정수를 살려내는 유용한 방법론이 되고 그와 같은 독법(讀法)은 좀 더 심화된 이론적 틀을 가지고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하리라고 본다.
3. 시와 종교적 상상력
우리는 이제까지 윤동주의 시적 궤적을 그의 시에 나타난 ‘종교적 상상력’이라는 준거를 토대로 읽어왔다. 우리는 종교적 이념이라는 배타적 토대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자신의 인문적 상상력과 현실 인식으로 통합하여 균형 잡힌 서정을 고전적 격조 속에 보여준 그의 시사적 공적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문학이 시간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면서 그 심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미의 형식적 요소가 경험적 내용으로부터 분리되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내용을 기초로 하면서 이를 초월하는 이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학에서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적 내용을 토대로 하는 소재적(stofflicher) 또는 주제적(motivisher)인 상태이지, 어떤 형식적인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학은 현대인의 경험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이념을 통해 종교적 충동을 자극하고,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급진적 세계성과 절대적 신앙을 종합하기 위하여, 복음을 뒷받침해 주며, 기독교 정신을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관과 성서적 신앙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곳에 그리고 신앙에 대한 모든 역사적 편견과 외식들을 벗어버리는 데 아마도 참된 기독교 문학의 새로운 본질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같은 비의(秘義) 추구의 열정이 기독교 문학 또는 종교적 상상력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윤동주의 기독교 시편들은 이러한 속성을 높은 차원에서 충족시킨 전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어 양식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종교’와 ‘문학’은 일정하게 동질적이다. 그것의 결합 형태인 ‘종교 문학’은 형상을 매개로 하는 미적 충동을 통해 잠재적인 종교적 충동을 현출시켜야 한다. 윤동주의 종교적 상상력은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소중하고도 다양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여준 종교 문학의 위대한 자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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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창군 미탄면의 백룡동굴
종 목 | 천연기념물 제260호 | |
명 칭 | 평창의백룡동굴(平昌의白龍洞窟) | |
분 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지구과학기념물/ 천연동굴 | |
수량/면적 | 956,434㎡ | |
지 정 일 | 1979.02.10 | |
소 재 지 | 강원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산1외 1필 | |
시 대 | ||
소 유 자 | 국유 | |
관 리 자 | 평창군 | |
일반설명 | 전문설명 | ||
출처 - 문화재청 문화정보센터
현재 백룡동굴은 제한개방 결정으로 개방을 준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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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혜민 마음치유학교 교장 " 내 생각과는 다른 모습, 창피할 때 있다 "
출간 3개월만에 45만부, 혜민스님 “저도 궁금합니다”
[인터뷰] 혜민 마음치유학교 교장 " 내 생각과는 다른 모습, 창피할 때 있다"
"완벽할 것 같다고요?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은 저를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어요.(웃음)"
4월 29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진행된 ’마음치유 콘서트’를 앞두고 혜민스님을 만났다. 리허설을 막 끝낸 그는 전날 미리 건넨 질문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답변을 할 때면 방금 자신의 말을 곱씹어보며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말은 아니었는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순간에도 출간 3개월 만에 45만 부가 판매된 신간의 인기를 증명하듯, 일찌감치 전석 매진된 ’마음치유 콘서트’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 현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신간의 인기가 굉장하다는 기자의 말에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해서 독자 후기를 매일매일 보고 있는 중이에요."라는 말과 함께 사람 좋은 웃음을 건넸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후 4년의 시간. 그는 올해 초 7년간 재직했던 햄프셔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2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한 후 귀국했다. 그 사이 ’교수’라는 직함 대신 ’마음치유학교 교장’이라는 새 직함도 얻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출간하기까지 4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물으니 "공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순간부터 고민했던 사회적 역할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관계와 소통 단절의 사회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이번 신간을 출간하기까지의 과정과 2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을 선택하게 된 자세한 배경, 공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저자 혜민스님 (사진 남경호 스튜디오2M) |
"완벽한 이미지? 생각과는 다른 내 모습에 창피할 때 많다"
Q 4년 만의 신작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은 전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쉼’과 ’성찰’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반면 이번 책은 부족한 나 자신과,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들을 어떻게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춰보았고요."
Q 출간 3개월 만에 45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전작에 이어 굉장한 반응입니다. 독자들의 어떤 바람이 반영된 걸까요?
"저도 그게 너무 궁금해서 독자 후기를 열심히 보고 있어요.(웃음) 사실 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글재주를 부려서 사람들에게 예술적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능력은 부족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제 글이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글을 써요. 삶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 역시 스스로 괴로운 순간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순간들 속에서 제가 성찰해낸 것들이 그분들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찾아주시는 게 아닐까 해요."
Q 직장인들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드라마 ’미생’을 챙겨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다양한 고민을 지닌 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시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고민을 듣다 보면 간접적으로 그분들의 삶을 경험하게 돼요. 상담을 하다 보면 우리 조직문화 속에서의 답답함이나 어려움을 알 수 있어요. 현재 사회적 구조가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용도 안 되고 여러 가지로 힘들잖아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 나름대로 고민하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역시 그런 한국 사회의 조직을 경험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스님들의 세계도 쉽지 않아요. 가끔 사람들은 스님들을 일반 사람들과 달리 보시는데, 저희도 조직이거든요. 산중이라고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제가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7년간 했으니 그 안에서 배운 것들도 쓰게 되는 거죠."
Q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고민에도 변화가 있던가요?
"그 반대예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고민은 늘 비슷해요. 특히 고전을 읽어봐도 그 고민이 그 고민이에요. 인간은 생로병사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어요. 안 그래요? 엄마가 편찮으시거나, 갑자기 우리 애가 말을 안 듣는다거나... 그게 과연 요즘 시대만의 일이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Q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들도 있으시죠?
"문제가 아닌데 그걸 문제라고 말해서 문제화시키면 결국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죠. 그런데 스스로는 몰라요. 가장 중요한 ’알아차림’이 없어서 그래요."
Q 가끔은 본인의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사에 완벽할 것만 같은 스님도 고민하시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어떤 방식으로 해답을 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완벽할 것 같다고요?(웃음) 저도 고민 많아요.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제목은 어쩌면 저를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어요. 부족한 면이 많다는 걸 느끼죠.
이제 ’어떻게 가야 한다’라는 큰 방향성은 조금 알겠어요. 공부도 하고 수행하려고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나의 습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내 생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죠. 그래서 창피할 때가 있어요. 저 역시 인간관계 안에서 삐거덕거리고 실수를 하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어떡하겠어요.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것을.(웃음)"
Q 완벽하지 않은 ’나’를 인정하는 게 중요한 거겠죠.
"그럼요. 아주 중요해요. 그걸 바로 ’통찰’이라고 해요. 최소한 내가 누군지는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연습이 필요해요. 관계라는 것은 곧 거울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요. 우리는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를 잘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내 모습을 그 사람과 빗대어 봅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밖에 행동을 못 하지?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게 돼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저자 혜민스님 (사진 남경호 스튜디오2M) |
"자살률 1위 우리나라, 혼자 힘들어하기 때문"
Q 한때 ’독설’이 인기를 끌던 시기가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공감과 위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책이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하나의 증거가 되는데요. 반면 위로가 실질적인 대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고민하는 문제에는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갑자기 부모님이 편찮으세요. 혹은 아이를 유산했어요. 도대체 대안이 뭔가요? 우리 인생을 뒤흔드는 것은 결국 생로병사이고, 이런 상황에서는 마음의 진정이 우선적으로 필요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켜봐 주고 버텨주는 것 이게 더 필요한 거예요.
물론 독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방식이 잘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우리 인생에 대안이 없는 고민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그럴 때 상대가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배려하고 함께 버텨줘야 해요. 힘든 감정을 같이 공감해주고 버텨주면 스스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파헤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이런 과정 없이 섣불리 대안이나 방법만 제시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어요."
Q 한 매체에서 인터뷰어로 코너를 진행하기도 하셨는데요, 책, 인터뷰, 그리고 강연 등을 통한 소통에는 어떤 차이점들이 있나요?
"저는 세 개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왜냐면 책도 그렇고 인터뷰도 그렇고 강연도 그렇고 누군가를 만나는 거잖아요. 책도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구체적인 고민을 가지고 시작하는 거고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안에서 배우는 게 있어요. 그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되고 나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고요. ’나는 저렇게 못하나’, ’저런 삶도 있구나’ 등 배우는 게 있기 때문에 저는 좋아요."
Q 올해 초 약 2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하셨습니다. ’햄프셔대학 교수’라는 직함 대신 ’마음치유학교 교장’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기도 하셨습니다. 새로운 선택은 어떤 고민의 결과인가요?
"저는 작가, 교수이기 전에 종교인이잖아요. 저 혼자만의 삶이 아닌 공인으로서 삶을 살겠다고 나선 것이니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 하죠.
미국 같은 경우에는 어떤 개인적 아픔의 순간들이 찾아왔을 때 혼자 아파하지 않고 같이 아파해줄 사람들이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잃었다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가서 위로를 받는 거죠.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아무리 위로를 해도 위로가 안 돼요. 그런데 거기를 가면 위로가 돼요. 자신과 같은 입장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고, 행복도 바닥이에요. 왜 그런가 보니까 혼자 힘들어 해요. 점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연결감을 느낄 수 없는 형태가 되는 거예요. 종교와 상관없이 아픔이 있는 분들을 함께 모으고 치유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마음치유학교’예요. 그래서 마음치유학교의 모토가 ’혼자 힘들어하지 마세요’이고요."
Q 평소 스님이 보여주는 종교적 신념을 초월한 소통과 교감, 존중은 많은 분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존경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고, 이해인 수녀님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데요,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종교학을 학사 4년, 석사 3년, 박사 7년, 총 14년을 공부했어요. 그러니 종교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공부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어요. 잘 모르면 선입견이 있지만, 공부할수록 그 선입견은 사라져요. 잘 모르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와 다를 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모습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를 수가 있겠어요. 이해인 수녀님과도 잘 지내고 있고 조정민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내일도 이해인 수녀님의 행사가 있어서 제가 시를 읽기로 했어요. 이런 식의 교류는 끊임없이 하고 싶고, 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최근(4월 25일) 혜민스님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후기를 보니 ’힐링이라는 이슈거리에 지쳐 있던 차에 스님을 통해 진정한 위로와 공감의 의미를 깨달았다’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객관적으로 살펴본 본인의 일상을 어떻게 감상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아마도 ’힐링’에 대한 식상함은 단어가 주는 식상함일 거예요. 하지만 힐링이라는 언어에 대한 식상함과 ’치유’의 필요성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생각돼요. 그리고 저는 제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정말 보기 싫어요.(웃음) 어휴. 박찬호씨랑 나온 ’땡큐’도 안 봤어요. ’무한도전’도 보기 싫었는데 잠깐 보고 말았죠. 이상하게 너무 쑥스럽고 부끄러워요."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저자 혜민스님 (사진 남경호 스튜디오2M) ※ 편집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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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초상(최인호 회고록)
http://cafe.daum.net/SDUstorywriting/Tlvo/28
젊은날의 초상
<한때는 내 자신이었고 내 애인이었고...이제는 누님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경아.>
최인호
참으로 이상하게도 쉰 살이 넘은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는 모양으로 '아, 별들의 고향의 작가시죠?' 하고 되묻곤 한다.경아와 남주인공 문오와 함께 판잣집에서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희화화된 지 오래이고 지난 해 연말에는 TV에서 <별들의 고향>을 방영한다고 해서 어떨까 하고 보다가 5분 만에 닭살이 돋는 것처럼 쑥스러워서 TV를 꺼버린 적이 있었는데, 어쨌든 아직은 내 이름을 들으면 25년 전 내가 26세 때 쓴 처녀작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싫건 좋건 한 번의 인연이 평생을 지배하는 '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별들의 고향>은 내 평생이 낳은 하나의 업이다. 이제 와서 그것은 내게 있어 버릴 수 없는 유산이며 씻을 수 없는 나의 전력인 것이다.그러므로 1967년 문단에 데뷔해서 <별들의 고향>을 쓴 1973년까지의 한 시기는 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젊은날의 초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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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 대학 시절 나는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라는 연극에서 신문팔이 소년역을 맡아 했었다. 이 연극은 지금도 내게 깊은 감동적 인상으로 남아 있다.연극의 한 장면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어린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마다. 그녀는 무대감독을 맡아 하고 있는 상징적인 신에게 나는 이대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다. 내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어린 날로 한 번쯤 돌아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무대감독이 묻는다."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언제입니까?"여인은 대답한다."내가 열 살 때의 생일이었어요."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대감독은 여주인공을 열 살 때의 어린 날로 보낸다.장이 바뀌면 열 살 때의 생일 아침, 어머니는 딸의 생일날 준비에 부산을 떨고 있다. 그때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어쩌면 어머님이 저처럼 새파랗게 젊으실까."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존재를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옆에서 붙잡아 끌어도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결국 여인은 행복했던 추억이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처럼 아름답다 해도 되돌려 재현시킬 수는 없다는 절대의 명제 앞에 깨끗이 과거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죽음에 승복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대학 시절에 공연했던 감명 깊은 연극의 한 장면 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가 하면, 이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무대역활을 자처한 또다른 나와 더불어 내 인생에 있어 처녀였던 <별들의 고향>을 쓸 무렵의 청춘의 계절로 함께 떠나 볼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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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서울이다.나는 해방되던 그해 가을 서울 예관동에서 태어났으며, 줄곧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울내기다.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이 전라도·충청도로, 간혹 고향에 내려 갔다 왔다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부러울 때가 있다.그들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했으면서도, 서울을 줄곧 원수놈의 타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 유현종 씨는 이제는 완전히 촌사람 티를 벗어나고 서울 깍쟁이가 되었는데도 야구 구경을 갈 때면 눈을 부릅뜨고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김승옥 씨는 한때 이 망할 놈의 서울, 서울, 이 웬수 놈의 서울을 주절대더니 고향 순천으로 내려가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낙향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에 돌아갈 고향, 위로받을 고향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솔직히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낙향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나는 미록 서울 태생이었지만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북 평양에서 살아왔다. 아아, 그렇다면 나는 고향에도 갈수 없는 실향민이 아닌가. 그러나 서울도 역시 내가 태어난 고향이 아닐소냐. 그렇다. 나는 사대문 안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중구에서 태어난 서울 깍쟁이다. 서울은 그 동안 지방에서 이주해 온 촌놈들로 완전히 점령당하고 있다. 경우 바르고 체면 차리고, 냉수 마시고 이빨을 쑤실지언정 깍쟁이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서울내기로서의 면모는 거친 사투리와 지방색적 단결심으로 완전히 멸망되었다. 서울내기, 진짜 서울 깍두기의 모습은 요즈음 서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함께 골목에서 뛰놀던 깍쟁이 놈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마도 전국 팔도 가시네를 여편네로 삼아서 순수한 서울 피를 혼혈하고 있을 것이다. 순 서울산 재래종들은 점점 멸종되어 가고 교배 잡종들만 번창하고 있구나. 덕수국민학교, 서울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친 나는 그야말로 순금의 서울내기다. 살아온 것을 더듬어 보면 태어난 곳은 중구 예관동이요, 영희국민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이사간 곳이 지금 고려병원(현재 강북 삼성 의료원)자리의 평동 58의 2번지다. 내가 이놈의 번지를 어떻게 외고 있는가 하면 이놈의 집이 지금은 거대한 고려병원의 뒤뜰로 없어져버렸지만 아직도 내 주민등록증의 본적란 주소로 기재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서대문구 평동 58의 2는 내가 분명히 살아왔던 본적이었으되 지금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지 않는 '환상의 집'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태어난 '생가'(이 거창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는 비록 형체는 남아 있으되 중구청 건너편 가구상들 중의 한집인 이 집은 지금 완전히 변모되어 있었다. 방이 많아 한때는 여관도 하더니 주인의 허락을 얻어 올라가 본 그 집은 이젠 완전히 아편굴처럼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내가 아버님 앞에서 재롱부리며 놀던 방엔 못 쓰는 가구들만 그득하였으며, 변호사를 하던 아버님이 손님을 받던 응접실엔 쥐들의 똥만 무성했다. 철마다 보랏빛 꽃을 피우던 오동나무는 어디로 갔는가. 집 옆에 흐르던 개천은 복개로 덮이고. 그 당시 내 집은 멋진 집이었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려면 개천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와야 했었지. 아아, 어릴 때의 오동나무는 내 놀이터였었다. 나는 그 나뭇가지 위에서 하모니카를 불곤 했었지.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그 집에서 살았다.누이들은 아직 처녀였으며, 형님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가. 그 집에 밤이 오면 우리는 아직도 살아 계신 아버님 앞에서 소프라노와 알토로 노래를 부르곤 했었지.
어제 불던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엔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그러면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었다. "우리 새끼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 암, 제일이고 말고."
3
나는 어릴 때부터 현시욕이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어느 좌석에서건, 어떤 경우에도 나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기를 좋아하는 노출 증세가 있었으며 이중인격자였다. 정서적으로 미숙아였으며, 어떤 때는 쓸데없는 용기를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형편없는 겁쟁이였다. 신경질의 화신이었으며, 질투와 적의를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성장한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로 자라났다. 나는 공격성이 강해서 나보다 강한 자, 권위적인 것, 위선적인 것, 질서나 규율에 관해 맹목적으로 도전하고 덤벼드는 기질을 타고났는데 그것은 우리집의 체질이었다. 나는 철저히 개인주의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형태든 조직은 싫어한다. 나는 조직은 어떤 형태든 광기에 젖어있다는 니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으며, 조직은 그가 무너뜨리려고 하는 또 하나의 조직과 목적하는 바가 항상 같다는 비체제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나는 혼자이며 남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더러 의리가 강한 녀석이라고 가끔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그것은 인간적인 수양을 쌓아서가 아니라 이기주의자로서 타인을 평가하는 약점 때문이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며 내가 남에게 간섭하기를 원치 않듯 나 역시 남에게 간섭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우리 동네에게 키 큰 녀석이건 작은 녀석이건 나를 건드리지 않고 경원하였던 것은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라 내가 서슬퍼렇게 가지고 있던 냉소적인 적의의 이끼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유약하여 매를 두려워 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해수욕장에서 1시간 가량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나는 여하한 형태라도 (그것이 혁명이라는 미명을 붙이더라도) 폭력은 증오하고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자며 그래서 어떤 때는 쉽게 용서하지만 어떤 때는 쉽게 편견을 갖는다. 이런 복합적인 성격은 성장하여 획득한 것이 아니라 우리집 식구들은 누구든 가지고 있는 기질이었다. 평안도에서 자라난 우리집 기질은 성질이 급하며 눈물이 많고, 남을 잘 웃기지만 정이 깊지 않고 얕으며, 다정다감한 것 같지만 실은 비정하며, 통이 큰 것 같지만 실은 수전노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논리적이고 머리가 좋은 분이었지만 어머니는 예술적인 기질을 타고난 상민의 딸이었다.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무렵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함께 잤으며 새벽이면 아버지의 젖꼭지를 몰래 빨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녀석이 어머니 품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 보상을 아버지에게서 찾은 것이라 나는 짐작하고 있다.아버지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혼자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던 범인으로서, 변론을 맡으면 언제나 피고측에서 서서 눈물을 조금씩 흘리던 변호사로 유명하였다. 아버지는 한때 조만식 씨 휘하에 들어가서 정치 활동도 했지만 월남한 후 단순히 법조인으로만 처신하였다. 우리집 형제는 모두 독립성이 강하며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이웃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학비를 벌었다. 우리집 형제들은 형제에 대한 우의가 깊으며 마피아 같은 혈맹으로 뭉쳐져 있다. 어릴 때부터 자기 것은 자기 스스로 처리 할 수밖에 없다는 훈련을 받아왔으며, 그 지독스런 가난을 겪은 탓인지 간혹 가난했었다는 과거를 소설로 미화시키는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조금쯤 아니꼬워진다.
가난에 대해 미화를 시킬 줄 아는 사람은 실제로 가난을 제대로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버스값이 없어서 몇 정류장쯤은 노상 걸어다녔고, 교복이 없어서(내 고등학교 때 별명은 걸레였다) 형이 입던 교복을 줄여 입고(우리집 남자들은 모두 같은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점 의복비를 줄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다녔다. 양말은 늘 두 켤레였는데 그래서 아침마다 먼저 신은 사람이 임자였으며, 제일 나중에 신은 사람은 흥부네 자식 버선처럼 수천 번 기운 양말이었다. 언제나 게으른 나는 그 양말을 내 차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산은 하나였으므로 비가 오는 날은 늘 비를 맞고 걸어다녔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나는 학교까지 비를 맞고 걸어가는 굴욕은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고등학교 근처에는 이화여고, 경기여고에 다니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녀들에게 비를 홀딱 맞고 걸어가는 내 꼬락서니를 보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우리들의 학비는 하숙을 치는 것으로 충당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새벽밥을 지었으며 하숙생들에게 밥상을 들여가는 것은 내 차지였다. 그들은 간혹 밥 속에서 어머니의 은빛 머리카락이 나온다고 불평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다음 식사 때 비싼 황금의 달걀을 반숙해서 상에 올리는 것으로 하숙생을 무마시키곤 했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집을 한 채 두고 가셨는데 변호사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보다 다른 사람에게 통이 큰 척 마음을 베푸는 위선자였으므로 유산이라고는 바로 그것 하나뿐이었다.그 아버님이 돌아가신 집이 바로 평동 집이다. 어제 불던 봄바람은 올 봄에도 불고 있지만, 이미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요 잔디밭도 어제의 잔디밭이 아닌 것이다. 형이 고등학교에 갈 때 우리는 아랫방을 세를 주었고, 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우리는 건넌방에 세를 주었다. 더 이상 세를 줄 방이 없으면 우리는 집을 팔아 이사를 갔다. 결국 우리는 한방에서 삼형제, 어머니, 누이가 함께 자야 했다. 윗목에선 언제나 자리끼가 꽁꽁 얼곤 했다. 형은 항상 형이라는 권위로 나를 이불 속에 먼저 들어가게 하곤, 내 체온으로 이불을 따스하게 녹여 주어야 들어오곤 했었다. 누구든 방에 불을 켜면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으므로 마루에 불을 켜고 방 문틈을 조금 열어 놓고 나는 꿇어 엎드려 글을 쓰고 형은 영어단어를 외곤 했다. 평동에서 살던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 북아현동 집으로 이사를 갔었다. 1959년에 이사를 간 우리는 이곳에서 15년 이상을 살았다. 이곳에서 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고 결혼을 했다. 몇 해 전 <월간조선> 기자와 이 집을 다녀오는 동안 딱 한군데의 집만이 눈에 익었다. 조그만 골목 네거리에 있는 <홍주약국>이란 간판이 그것이었다. 이 약국은 옛날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들러서 인사를 했더니 그때 주인은 아직 별로 늙으신 모습 없이 그 자리에 계셨다. 너무나 반가워하시는 그분은 내게 먹으라고 원비 두 병을 공짜로 주셨다."지금도 술 많이 마시쇼?"약국 주인님은 내게 물었다.그렇다. 그분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술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나를 우리 형제를 약국 유리창 너머로 줄곧 지켜보고 계셨었다. 그분은 우리 형제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고, 군대에 입대하고, 휴가 맡아 나오고,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작가가 되던 과거를 약국 유리창 바깥을 내다보듯 샅샅이 기억하고 계셨다."아아, 기억납니다 최 형. 일요일이면 할머니(우리 어머니)가 술 깨는 약을 사러 오곤 했었지요. 언제나 세 병씩 사가지고 가셨지요. 늘 술에 취해 있었으니깐요. 형님은 뭘 하시유?""대우의 사장으로 계십니다.""동생은......""미국으로 이만갔지요.""우리 오랜만에 냉면이나 먹읍시다. 이렇게 오랜만에 유명한 사람(?)이 모처럼 옛 동네에 왔는데 냉면이라도 한그릇 대접지 않으면 섭섭해서 어떻게 하지."냉면을 사양하고 찾아간 북아현동 한옥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요즈음 날로 번창하고 있는 교회가 서 있었다. 내가 배를 깔고 없드려 글을 쓰던 안방은 주차장이 되어있었으며, 거넌방은 교회 뜨락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내가 이 다음 죽은 뒤에 아주 명망 있는 작가로 존경(?)받게 된다면 내 흔적을 찾는 문학도들은 어디에서 내 흔적을 찾을꼬 (그런 일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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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리라 결정했으며, 국민학교 때는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곤 했었는데 나 때문에 덕수국민학교는 3연패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아 영원히 우승기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때 백일장의 작문 제목은 <오늘 아침>이었다. 나는 학교 오는 길에 쥐를 밟았는데 그 쥐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레기통으로 도망가며 나를 노려보더라는 실존주의적 작문을 썼었다. 그것은 물론 낙방이 되었다. 그때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 최정희 선생님이었다. "누나, 글 쓰는 사람 중에 구찌베니(립스틱) 빨갛게 칠한 사람이 누구냐?"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1958년 1월쯤의 일일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문화란에 <어린이 차지>라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의 동시나 동요 같은 것을 실어 주는 작문교실이 있었다. 뽑힌 동요가 실리면 그 뒤에 짤막한 담당 기자의 작품평까지 실렸는데 당시 국민학교 다니는 꼬마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고정란이었다. 그 무렵 내 짝으로는 아버지가 동아일보에 다니던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 아버지가 바로 그 <어린이 차지>란 작문교실을 담당하고 있으니 내가 동요 하나 지어 자기에게 주면 아버지에게 보여서 신문에 실려 주겠다는 것이었다.그래서 나는 수업시간에 다음과 같은 동요를 지었다. <화롯가>
오손도손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우락부락 험상굳은 우리 형님손
매끈하고 백설같은 우리 누나손
장난쟁이 동생손은 까만 손이요
올망종망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놀다말고 한몫 끼운 동생 손이랑
험상궂고 보기싫은 손님 것까지
모두모두 모여있네 옹기 종기 화롯가
완성된 동요를 그 친구에게 넘겨 주고 나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뒤 바로 그 <어린이 차지>에 내가 지은 동요가 실려 나온 것이다. 아마도 동아일보 축쇄판을 뒤지면 6학년 3반 최인호라고 내 이름이 분명히 명기된 동요가 신문에 실려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시는 내가 태어나서 활자로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썼으며 제법 유명한 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에 단편소설 하나씩 썼을 정도이다. 그때 선생님은 멋쟁이들이어서 영어 시험에 유행가 가사만 써도 60점을 주곤 했었다.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너희들이 지금은 내가 가끔 빵을 얻어 먹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이담에 너희들은 내가 네 옆자리에 앉았었다는 것만을 두고두고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나는 정신병적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였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에 <벽구멍으로>란 단편소설이 입선되었을 때도 나를 작가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심사위원은 황순원 선생님과 안수길 선생님이었는데 막상 시상식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나타나자 '속았구나'하는 표정이었다. 상금은 당선작이 1만원이었고 가작은 3천3백원이었다. 그때 한국일보 문화부엔 손기상 씨가 문화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한심해서 담배만 푹푹 피워대셨다.한국일보는 창피했던지 이 작품을 신문에 게재하지 않았다.내용은 어린 소년의 도벽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3학년 말, 나는 눈썹을 밀고 공부에 매어달렸다. 담임 선생임이 내게 어느 대학을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서울대학교 영문과 하고 대답하자, 니가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악담을 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대학 미학과(당시만 해도 미학과는 인기가 없었다)가 아니면 고고인류학과에 가겠습니다 라고 주장했더니 선생님은 대뜸 내게 D대학 국문학과에 가라고 억지를 부렸다. 난 그렇다면 연세대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합격시켜 준다고 해도(누가 날 공짜로 합격이라도 시켜 준다고 했던가) 난 안 가겠습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교 때엔 가장 이상주의자, 졸업 후엔 가장 머리가 좋은 적응주의자 아니면 불평주의자들의 집단입니다라고도 했다. 서울대를 나온 담임 선생님은 대로해서 나를 미친 놈 취급을 했었는데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서울대학교 출신들은 공연히 흥분할 필요 없다. 다만 내겐 머리 좋은 형이 있었고 그는 내게 언제나 모범을 보이는 맏아들적 기풍이 충만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서울대 학생이었으므로 나는 되지 못하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연세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영문과에 입학했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글쟁이를 지망하는 놈들이면 으레 국문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꼬와서 그런 것이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낙제를 했기 때문에 1학년을 두 번이나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기보다는 언제나 시네마코리아 극장에서 동시상영 영화나 보았으며 미친 듯이 글만 쓰고 있었다. 결국, 1965년도에는 <뭘 잃으신 것이 없습니까?>란 단편소설을 조선일보에 응모하고는 나는 틀림없이 당선하리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친구들을 불러다 미리 자축파티를 열기도 했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일보에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던 신홍범 씨를 그분의 사촌인 내 친구녀석과 함께 찾아가 내 소설이 틀림없이 우편으로 응모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결과는 보기좋게 낙선이었다. 울화통이 된 나는 1966년 한 해 동안을 신춘문예 당선의 해로 정하고 수십 편의 단편을 썼었다. <순례자> <술꾼> <모범동화> <견습환자> <전쟁우화> <예행연습> <전람회의 그림> <처세술의 개론> 등 수많은 단편을 썼으며, 나는 그 모든 단편들을 전 신문사에 투고하라고 내 동생 영호에게 명령을 내려놓고는 그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버렸었다. 나는 최소한 서너 군데의 신문사에서 한꺼번에 당선 통지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너 개의 당선소감까지 미리 써두고 입대를 하였던 것이다.그런데 당선된 작품은 오직 한편, 조선일보의 <견습환자>뿐이었다.
12월 24일 밤. 우리는 눈이 내린 연병장에서 벌거벗고 기합을 받고 있었다. 알철모를 쓰고 기합을 받고 있었는데 싸락눈이 내 등에 송곳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손길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밤 열차가 역마처럼 울며 달리고 있었다.
돌연 구대장이 연단에 서더니
"오늘의 기합은 이만 중지! 그 이유는 훈련병 중에 한 사람이 고등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다."라는 해괴망측한 해석을 붙이는 것이었다.나는 벌거벗은 채 구대장에게 이끌려 디젤 기름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교 숙소에서 한 장의 전보를 받았다. '당선 축하. 조선일보.'나는 이것 한 장뿐이냐고 물었다. 구대장은 나를 언짢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전보가 어째서 한 장뿐이야고 물었다."이 친구 전보를 무슨 주택복권으로 아네."그들은 웃었다. 어쨌거나 나 때문에 기합을 덜 받은 동료들은 내게 몰래 빵도 주고 사탕도 주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의 머리가 다들 돌대가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땅히 내 것을 모두들 당선시켰어야 했다고 나는 차디찬 담요 속으로 기어들며 중얼거렸다.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나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무슨 슬픈 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흔들어서 깨고 보니 옆자리에 누웠던 같은 훈련병이었다."꿈을 꾼 게로군." 무슨 대학원에 다니다 입대한 얼빠진 녀석이었다. 그는 구보도 못하고 우향 우 좌향 좌도 제대로 못하는, 이른바 고문관 녀석이었다. 녀석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단체 기합을 받곤 했었다. 녀석은 언제나 미원을 한봉지 가지고 다니며 콩나물국 속에 넣어 먹곤 했지만 주위 동료들에게는 조금도 나눠주지 않던 녀석이었다. 바늘에 실 하나 꿰지 못하는 주제에 밤마다 몸을 위한다고 종합 비타민만 먹으며 갓 결혼한 신부가 보고 싶어 질질 짜던 녀석이었다, 나는 가끔 그의 사물함을 정돈해 주었으며 그가 우리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녀석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연민의 정을 갖고 있어서 구보 같을 때엔 대신 총도 메어 주곤 했는데, 녀석은 그래도 미원 한줌 선심 쓰는 일이 없던 녀석이었다."니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내 눈엔 눈물이 홍건히 괴어 있었다."네 당선을 축하한다. 넌 이제 작가가 되었구나. 작가, 얼마나 좋겠니. 담배 하나 줄까."나는 녀석이 주는 담배 한 가치를 받아들고 밤의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은 눈의 꽃밭이었다. 발자국도 없어서 순백의 처녀림이었다. 그것은 내가 써야 할 원고지의 무수한 공백들처럼 보였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눈을 부릅뜨고 눈부신 백야의 연병장을 노려보았다. 나는 쓸 것이다. 저 눈 쌓인 마당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내 이름을 쓰고, 내가 보고 듣고 그리고 앞으로 닥쳐야 할 미래의 이야기들을. 그러나 잊지 마라. 네가 쓸 글이 영원히 그곳에 존재하기를 원해서는 안 돼. 네가 쓴 기록을 보라, 또다시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눈발에 의해서 비워지고 묻혀지나니. 덧없는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 나뭇가지에 묻어 있는 아주 작은 잔설 하나를 흔즐어 뼈에 붙어 있는 살 한 점 뜯어 내듯, 네가 선 자리에 덧없이 떨어져 네 죽은 뒤에 이루는 비문처럼 인장을 새기나니, 아아 통곡할지어다. 밤을 새우며 통곡할지어다. 천지신명은 돌아눕고 너는 이제 말의 걸인이 되어 저문 저자의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며, 행여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씩 나눠 주는 말을 동냥해서 이 더럽고 저속한 시대, 남루한 식탁 위에 필요한 양식으로 내놓으리니. 아흐, 굽어 살피소서 굽어 살피소서. 나날의 성찬에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비럭질할 수 있도록 정승대감은 굽어 살피소서. 얼씨구 얼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절씨구 들어간다. 붐빠 붐빠 들어간다. 붐빠붐빠 들어간다. 얼씨구 씨구 씨구 씨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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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나는 정식으로 작가로 데뷔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제대하는 1970년도까지 나는 단 한 장의 원고청탁서도 받은 적이 없었다. 내 딴에는 주옥(?)같은 단편이 십여 편 비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청탁서가 오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군대에 있는 3년 반 동안 나는 오직 <사행>이라는 단편소설 하나만을 섰을 뿐이였다. 1970년 2월, 제대하자마자 나는 초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제대하고 영문과에 다시 복학을 하였지만 그 무렵 아내 황정숙과 심각한 연애를 걸고 있었으며 곧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도 작가는 원고를 써서 먹고 살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색이 작가인데, 그래도 <현대문학> 같은 데서 나오는 작가의 주소록에는 내 이름이 꼬박꼬박 기재되어 있는데 어째서 그 누구에게서도 원고청탁을 받지 못할까 하고 나는 조바심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 해 3월인가 4월, 나는 대낮에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물어 물어서 당시 효제동에 있던 <현대문학사>를 찾아 갔었다. 그때 내가 만난 사람이 소설가 김국태 씨였다. 내가 술 취한 뻘건 얼굴로 찾아가 불쑥 원고를 내어밀자 그는 내게 물었다."이게 무엇입니까?""소설 원고 입니다.""실례지만 누구신데요?"그러자 나는 신병처럼 큰 소리로 고함질렀다."나는 작가요. 나는 소설가요. 내 이름은 최인호입니다.""놓고 가시오." 그 당시만 해도 <현대문학>에 원고가 실리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기였다. 다달이 원고가 밀려서 서너 달 뒤에 나와도 그 사람은 그만큼 행운아였던 것이다. 원고를 주고 와서도 나는 기대를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은사이신 황순원 선생님이 내가 제발로 찾아가 <현대문학사>에서 해프닝을 벌였다는 소문을 그분의 막내아들인 황진규 군(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생이며 내 절친한 친구였다)을 통해서 들으셨는지 선생임이 뭐라고 한마디 해주셔서 두 달만에 <술꾼>이라는 단편이 드디어 <현대문학>에 실리게 된 것이었다.나는 그 <술꾼>이 실린 <현대문학>을 신촌의 한 서점에서 확인하면서 홀로 눈물을 흘렸었다. 나는 <술꾼>이라는 작품이 곧바로 문단의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만큼 나는 그 작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당시의 문단으로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독특한 작품이라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음호의 <현대문학>에 김교선이란 평론가가 매우 호의적인 평을 월평란에 써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도 않게 엉뚱하게 주목을 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 김승옥 씨였다. 그는 <술꾼>을 읽고 놀라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보는 사람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선전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점 나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숭옥 형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호철 씨도 뒤에 <술꾼>을 읽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인정을 하였으면서도 이 작가가 다음에 쓰는 작품을 다시 읽어보아야만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일단 유보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술꾼>이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삼사 개월 후의 일이었다. 당시 김병익, 김치수, 김현, 김주연 소위 4K로 불리는 네 젊은 평론가가 <문학과 지성>이란 계간지를 창간하기 앞서 창간호에 <술꾼>을 재수록한 것이었다. 소설가 김승옥 씨가 서울대학 문리대 동문이면서도 고향 친구였던 김치수 씨에게 귀띔을 해서 <술꾼>이 재수록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문학과 지성>에서는 문단에서 호평을 받는 문제작들을 재수록 하는 독특한 편집 형식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론가 김치수 씨가 만나자는 연락을 하였다. 청진동 어느 골목 다방에서 만났더니 '당신의 작품이 좋으니 재수록 하겠다. 물론 재수록 원고료는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명면지의 문단인들을 차례차례 알게 되고, 그들과 간첩처럼 접선하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나로서는 놀라운 행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문단 진입은 시작되었다. 당시 <현대문학>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월간문학>을 찾아가 이문구씨를 알게 되었으며 그 잡지에 <모범동화>를 싣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써둔 작품이 십여 편 있었으니 그 어디서든 원고청탁이 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무렵 김현 씨와 김치수 씨가 나를 찾아와 최 형이 써둔 원고량이 많이 있다는데 내일 아침 작품을 줄 수 있겠냐고 묻길래 나느 선뜻 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내게는 <미개인>이란 중편이 있었지만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었으므로 잘하면 하룻밤 사이에 그 작품을 완성해서 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읽어 보니 완성시키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하는 수 없이 신작을 쓰기로 하고 밤새워 쓴 작품이 <타인의 방>이었다. 당시 나는 아내와 신혼으로 북아현동 한성고등학교 앞에 있는 복수목욕탕 이층집에서 방 하나를 전세 들여서 살고 있었는데, 고이 잠든 아내 옆에서 꼬박 새우며 원고를 다 쓰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이때의 생활을 제법 유머러스하게 적은 꽁트가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그와 그의 아내가 결혼하고 나서 제일 먼저 얻은 방은 십오만 원짜리 전셋방이었다. 그가 그의 집 식구들에게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습니다 하고 선언하였을 때 그의 집에서는 놀라고 펄쩍 뛰었다. 이 녀석아, 글세 결혼이라는 게 불알 두 쪽 가지고 되는 것인 줄 아느냐, 사는 게 그리 쉬운 것인 줄 아느냐 하고 공갈 협박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꼭 결혼식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집에서 미친 척하고 이십만 원만 꾸어 주쇼. 나중에 갚아 드리겠쉬다 하고 아랫방에 전세 들여 이십만 원을 갈취하였다. 이리하여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군대 제대하고 복교한 소설가 지망생인 그와 나이는 동갑내기로 이미 몸도 마음도 그 알량한 소설가 지망생에게 불법침입 당해 이제 아무리 생처녀 행세를 한다 해도 팔릴 것 같지 않는 노처녀인 야인은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제일 싸구려 청첩장을 돌리고 싸구려 돗대기 시장 같은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애인은 그래도 신랑에게 선물이라고 제일모직 신사복 한 벌을 해주었고 신랑은 아내에게 싸구려 루비 반지 하나 해주었다. 그리고 결혼했는데 신혼여행을 안 갈 수 없어서 워커힐인가 스카치힐인가 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잤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호텔 안에서 피가 나도록 뽀뽀만 하고, 뽀뽀만 했다.그래도 친구랍시고 백 원, 오백 원 코묻은 돈 가져다 준 부조금을 합쳐 보니 식장비와 신혼여행비 정도 되고도 한 이만 원 남아 우선 한달은 먹고 살수 있겠다고 환호자약하였다. 그리고 입주한 곳이 바로 그 문제의 방인데, 이 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사의 방이 아니라 도깨비 방이라는 말씀이다. 남의 집 전세로 드나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빨래 하나 하려 해도 눈치 봐야 하고, 변소에서 소변 보려 해도 눈총 받는 판이어서 명색이 대학 출신 부부는 문화인답게 십오만 원 정도로 남의 눈치 안 보고 배짱 편하게 살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을까 전전긍긍하다가 구한 것이 바로 그 방이었다. 이 방은 남의 집 문간방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파트와 같다. 십오만 원짜리 아파트라 하면 놀라 자빠지시겠지만 무언가 하면 여관 이층방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 여자 좋아하고 오입깨나 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소위 독탕이라는 곳인데, 들어가면 공중전화통 같은 목욕탕이 있고 목욕탕 앞에 침대가 놓여 있는 5평짜리 방이라는 말이다. 맨 아래층은 대중탕이어서 남탕 여탕이 분리되어 있고, 이층 삼층은 오입장이들이 드나들고 창부 서넛 대기시켰다가 그 방에 들여보내는 말하자면 일종의 창녀집인데 목하 성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날조 아파트로 변하게 된 것은 그 목욕탕 부근에 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들이 교육의 전당 부근에 창녀집이 웬말이냐 비분강개해서 진정한 것이 주효해서, 배부른 목욕탕 주인이 궁여지책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전세 아파트(?)인 것이다.그는 그 아파트 이층에서 생활하였다. 그래도 문화인답게 스팀이 들어오고 더운 물 찬 물 틀면 나와서 그는 목욕 따위는 배포 유하게 하루에도 서너 번 해야 직성이 풀리곤 하였다. 그러나 말이 방이지 급조한 방이다. 옆집의 숨소리까지 다 들려 오고 밑바닥은 콘크리트라 별 수 없이 서대문 로타리에서 유도 도장에나 쓰는 싸구려 밀짚을 사다가 밑에 깔고 그야말로 초가삼간 외양간 같은 기분을 내고, 눈만 뜨면 그 방에서 이젠 결혼도 했으니 안심하고 합법적인 뽀뽀만 하였다. 그 부부가 사는 방은 여탕 이층이라 물 끼얹는 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왜 여탕에선 애 우는 소리가 그리 극성스러운지 나는 모르겠다), 여기 더운 물 더 주세요 어쩌구 하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 와서, 이를테면 그는 희멀겋게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의 엉덩이 밑에 깔고 사는 주지 욕정의 의자왕쯤 되는 기분이어서, 에라 콘크리트 벽을 뚫어 심심풀이 여체 감상이나 할까 어쩔까 궁리하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 집에 입주하게 되고 아침 저녁 여관, 목욕탕이라고 푯말 붙은 그 아파트를 자주 오가게 되자 하루는 여관 앞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이발소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여보 젊은이, 나도 여자 좋아하지만 젊은 몸 생각하셔야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 목욕탕 드나드는 모양인데 몸 생각해야지. 힛히히....."하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서 그냥 있었지만 내심 이 무지몽매한 자식아, 오입이라면 니놈이나 할 것이지 왜 애꿎은 나를 들먹이냐 하고 투덜대었다.그 이후부터는 집 앞을 드나들 땐 주위를 휘둘러 보고, 아내가 시장 갈 때는 그 망할 놈의 이발관 주인이 아내를 마치 목욕탕에 전속된, 새로 온 제법 예쁜 색골 창녀쯤으로 볼 것이 아닌가 우려되어 꽁꽁 앓았던 것이다.
이 목욕탕 이층집에서 나는 70년 1월부터 7년 봄까지 살았다. 아마 그때가 1971년 봄이라고 기억되는데 그 무렵 한꺼번에 <현대문학>과 <월간문학>, 그리고 <문학과 지성>에 내 작품이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문단에서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신예작가가 한 명 탄생했다고 야단들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계간지 <창작과 비평사>과의 관계에 대하여 밝혀야 할 사연이 있다. 당시 <창작과 비평>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문학과 지성>의 창간도 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이 될 정도였다. <창작과 비평>은 방영웅 씨의 <분례기>가 연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 역시 <창작과 비평>에도 내 소설을 싣고 싶었으나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자였던 염무웅 씨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었다. 수송동 어느 일층 다방에서 만났느데 그는 내게 작품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중편이 하나 있다고 대답한 후 곧 <미개인>을 완성해서 며칠 후 그를 다시 만나 작품을 주었는데 다음호에도 또 다음호에도 내 작품은 실리지 않았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내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연락을 한 후 물었더니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작품의 주제가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저항의식이 없으니 뒷부분을 강하게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두들겨 맞고 끝나는 것은 지나친 패배의식이니 이를 좀더 강하게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염무웅 씨의 그런 주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창작과 비평>은 소위 참여문학을 주장하고 있었고, <문학과 지성>은 순수문학을 주장하고 있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을 평론가가 감히 이리 고쳐라 저리 고쳐라 하고 주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입으로 말해버렸다. 젊은 작가가 그런 말을 하는데 그로서는 놀라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당장 그 작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두말없이 <창작과 비평>의 편집실로 돌아가 원고를 가져와서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때 염무용 씨가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은 <미개인>이란 작품의 주제가 약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내가 <문학과 지성>을 통해서 신예작가로 각광받고 있는 실황에서 새삼스럽게 내 작품을 다시 <창작과 비평>에 실음으로써 한 신인작가에게 양대 문학 계간지가 모두 문을 개방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이러한 문학 정신들이 약화되었는지 오히려 그 당시의 치열했던 문단의 상황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나는 그 원고를 주머니에 찌르고 수송동 골목을 걸어나오며 절대로 절대로 <창작과 비평>에는 앞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창작과 비평>에서는 작가 황석영을, <문학과 지성>에서는 나를 마치 차세대의 선두주자인 것처럼 밀고 후원하는 보이지 않는 문단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72년 봄. 나는 눈부신 1971년의 활력으로 <현대문학>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작가가 문학상을 받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금이 이십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것과 전세금 십오만 원을 합쳐서 나는 연희동에 있는 새마을 아파트 3동 404호, 방 두 칸의 열세 평 아파트를 '삼십오만 원'에 전세로 얻을 수 있었다. 이 아파트에는 한때 내 소개로 시인 고은 씨도 한 일 년 간 살다 갔고 소설가 최인훈 씨도 한 육 개월 살다가 떠났던 유서 깊은 아파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아파트를 잊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별들의 고향>의 작품 무대가 바로 이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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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의 한여름 나는 그때 빌빌 놀고 있던 영화감독 이장호 군과 청주에 있는 조그마한 여승 절인 화장사란 곳에서 한여름을 머무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장호 군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 것 같다. 만약 신문 연재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을 쓰겠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설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버리는 도시가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이장호 군은 조감독으로 백수건달이었는데 내 말을 듣더니 당장에 눈빛을 밝히며 이렇게 말하였다."그 소설은 내가 영화화하자. 약속해 임마. 그 소설은 내 거야."2년 뒤에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장호 군은 자기를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혈서를 쓰는 공갈협박 끝에 내게서 소설을 공짜로 빼앗아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관객 50만명을 동원하는 신기록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만 해도 신문에 연재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의 바람이었을 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리 만무한 황당무계한 소망이었다. 당시 신문소설은 50년대 작가들의 독무대였다. 역사소설은 으레 박종화, 유주현 씨의 차지였으며 현대소설은 40대 이상인 50년대 작가들이 대부분 쓰고 있었다. 손창섭 씨의 <부부>, 이호철 씨의 <서울은 만원이다>가 인기를 끌었으며 60년대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청준 씨가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다가 도중 하차한 뒤로는 젊은 작가들에게 신문 연재를 맡기는 것을 위험한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신문사의 편집진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가까운 시일 안에 연재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이 막연한 예감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1972년도 조선일보에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던 황순원, 박영준 두 선생님에 의해서였다. 두 선생님에게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유경환 씨가 신문소설에 새 바람을 넣고 싶은데 추천할만한 젊은 작가가 있느냐고 묻자 두 분이 한결같이 내 이름을 거론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유경환 씨는 나를 불렀다. 그때가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손장순 씨가 쓰는 <세화의 선>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무렵이었다. 유경환 씨는 내게 신문의 연재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었다. 1년 전부터 느끼던 왠지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 드디어 신 내린 무당의 쪽집게 점괘처럼 들어맞게 되었으니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있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자 유경환씨는 내게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했었다.그날 그때부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버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신문 연재를 하게 됐다. 신문연재야말로 작가가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작가들은 이 귀중한 지면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어째서 독자가 없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일까. 독자가 없다니. 신문을 보는 사람이면 모두가 독자이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줘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장이 새로워야한다. 문장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하고 싶다.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기억되는 문학 작품이 없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나오고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는 카츄샤가 나온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에서는 올렌까가 나오며 토마스 하디의 소설에는 테스가 있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 이름을 모든 사람들이 오랜 동안 기억하도록 만들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보다 살아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한 번쯤 깃들었다 스러지는, 누구나의 호주머니에 한 번쯤은 소유했다 버려지는 그런 여인, 특별한 지식과 특별한 재능을 지닌 여인이 아니라 마치 체호프의 소설에 나오는 올렌까처럼 보통 여인,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누구나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두 개의 원칙. 하나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하루하루의 신문을 통해서 철저히 느끼도록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이 새롭고 독특해야 할 것이며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서 연재소설의 호흡을 조절할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생명력에 의해서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기억되어 마치 자신의 첫사랑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기억되어질 것을 염두에 둘 것.이 두 개의 원칙이 <별들의 고향>을 쓰는 내 작품 의도였다.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현대 시인들의 시를 삽입해 보자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의도였다. 당시 소설은 물론이고 '시'는 아예 읽히지도 않는 문학의 장르였다. 소설의 중간에 그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시를 삽입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시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내 계산이었는데 후일담이지만 이 계획은 독자들에게 의해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 강은교, 박성룡, 마종기, 유경환 등 수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소설의 중요한 장면에 접목되었는데 독자들은 이런 처음보는 형식을 반겨하였으며 신문소설을 통해서 현대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호응을 해왔던 것이었다. 특히 강은교 씨의 시는 그 당시 하나의 유행이 될 정도로 독자들의 입에 즐겨 희자되곤 하였었다. 연재한 지 며칠 뒤 유경환 씨가 나를 다시 불렀다. 긴장해서 달려갔는데 유경환 씨는 나를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신동호 씨에게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켰다. 신동호씨는 내 고등학교 까마득한 선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 사실을 미리 밝혀 나를 잘 봐달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신동호 씨는 간밤에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도서실의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유경환 씨와 찾아간 나를 보더니 대뜸 소리쳐 말하였다."뭐야, 당신이 작가야. 우하핫, 당신이 신문소설을 쓸 수 있다구."하고 대뜸 웃기부터 하길래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최씨에 옥니에 곱슬머리입니다. 뒷날 저에게 그런 말 하신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고 더구나 동안이었으므로 아마도 그 분의 눈에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처럼 비쳐 보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를 믿을 수 없었는지 신동호 씨는 일주일 안으로 앞으로 쓸 연재소설을 대충 줄거리를 써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작가로서는 차마 참을 수 없는 수모였지만 이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심사숙고하며 연재소설의 줄거리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줄거리를 미리 쓰라는 요구는 작가인 나에게는 부당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줄거리를 미리 쓰는 작업을 통해 보다 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해졌으며 소설의 맥도 확실해졌으며 소설의 골격이 짜여질 수 있었던 장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줄거리의 내용대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면 이 소설은 에밀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의 유형의 자연주의적 작품의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적 성과를 얻는 대신 그만큼 재미는 반감되었을지 모른다. 흥미있는 것은 미리 쓴 줄거리에는 주인공의 이름 '경아'가 '조승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조승혜에서 경아로 바뀌어진 것은 연재가 시작할 무렵이었으며 그것은 당시 가수 이장희 군에게 써주었던 토크 송의 가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등학교 후배인 이장희 군은 당시 히트곡이 없던 무명 가수였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노래 가삿말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때 나는 오래 전 내가 습작으로 썼었던 소설의 한 부분을 써주었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제 연인의 이름은 경아였습니다. 나는 경아가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경아를 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뒷날 이장희 군에게 심심풀이로 <그건 너> <한잔의 추억>과 같은 노래의 가삿말을 써주었던 나는 내가 써준 이 낙서와 같은 가삿말이 이장희 군에 의해서 낭독되어 소위 토크 송이라는 형식을 출반하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었다. 그 당시에 짐 리브스라는 저음의 외국 가수가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를 낭송하여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아마도 거기에서 힌트를 얻은 이장희 군이 이른바 토크 송의 형식으로 내가 써준 가삿말을 낭송하였던 모양이었다. 이장희 군은 이것을 <겨울 이야기>라는 제목의 레코드로 출반하였으며 이것이 의외로 큰 히트를 했었다. 노승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아라는 이름을 택한 것은 히트된 토크 송에서 그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사실 노승혜라는 이름보다는 경아라는 이름이 더욱 귀엽고 평범하며 보편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제목도 고쳐졌다. 내가 현재 대우자동차 판매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형님 최정호 사장과 고심 끝에 작명한 원래 이름은 <별들의 무덤>이었다. 이 제목을 신문사에 가지고 갔더니 신동호 편집국장이 말하였다."조간신문에 무덤이라니 재수 없게, 다른 이름으로 고쳐 봅시다." 신동호 편집국장과 당시 편집국의 간부진이었던 이종식씨, 조영서 씨와 나 네 명이서 즉석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그 회의에서 결정된 제목이 <별들의 고향>이었다. 연재의 삽화는 김영덕 씨가 맡았으며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작가의 말을 사고에 썼었다. '큰 욕심은 부려 보지 않겠다. 나이가 젊다고 객기를 부려보지도 않겠다. 신문소설이 작가에게 주는 영향은 대부분 마이너스라는 소리도 수십 번 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겁이 난다. 그러나 최소한도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사건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써보겠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소설 속에 흔히 나타나는 우연적 사건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 우연적인 사건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연적 사건은 될 수 있는 한 피해 볼 작정이다. 예쁘고 착한 여자를 그려볼 작정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남자상들은 대부분 비열하고 잔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선한 사람들이다.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악인을 그려내 보일 재주가 없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인의 얘기가 독자들의 구미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나는 모르겠다. 또 약간은 환상적인 여자의 얘기가 어떤 반감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보이겠다. 매일 아침 신문에서 만나볼 독자 여러분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린다.' 김영덕 씨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화자인 나를 그릴 때 그 남자의 얼굴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자 고심 끝에 내 실제 모습을 모델로 해서 삽화를 그렸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신문 연재 동안에 김영덕 씨가 그렸던 남자 주인공인 '나'의 모습은 얼굴이 길고 마른 당시의 내 모습과 쌍둥이 처럼 닮아 있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 보면 경아의 모습을 나는 키가 155cm 가슴둘레는 78cm 몸무게는 44Kg 가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어깨 뒤에 큰 점이 하나 있으며 남보다 작은 키를 감추려고 삼승용 하이힐을 신고 다니고, 짝짝이 눈꺼풀을 갖고 있으며, 알 벤 게처럼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연재 도중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실제로 경아와 같은 여인과 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었는데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지만 경아의 모습은 당시 아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아의 키는 아내의 키였으며 경아의 몸무게는 아내의 몸무게였다. 어깨 뒤에 큰 점이 하나 있다는 경아의 신체적 묘사도 실제로 아내를 묘사한 것이었다. 경아가 첫 번째 남자인 영석이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데 그중의 많은 묘사는 실지로 아내와 내가 연애시절에 겪었던 경험을 소설로 옮겨 놓은 것이다. 소설이 연재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반응이 일기 사작하였다. 경아가 첫사랑에게 배신 당하고 아이를 지우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마도 낙태수술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는 것은 <별들의 고향>이 처음인 듯 싶은데 이때부터 소설과 국산영화에 걸핏하면 낙태수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여자 심리를 잘 안다고 해서 작가 최인호가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져 들려오고 도대체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몇 살이냐, 산전수전 다 겪은 쉰 살이냐, 뭐라구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라구? 아니 그렇게 젊은 청년이 어떻게 여성의 심리를 그처럼 잘 알아? 그러더니 갑자기 전국의 술집 여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경아로 바꾸는 유행이 일기 시작하였다. 남자들은 경아가 불쌍하다고 해서 저녁마다 술을 마셨으며, 어느 날 연극 연출가 허규 씨를 만났더니 경아가 너무 불쌍해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셨는데 경아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지 말고 행복한 시나리오를 만드시오 하고 내게 협박을 할 정도였다. 나는 소설을 연재하는 동안 줄곧 공책에 한 번 쓴 다음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옮겨 정서를 하는 이중 작업을 했었다. 지금까지 삼십 년 동안 작가생활을 하면서 두 번 이상 정서하는 중복작업을 했던 것은 <별들의 고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기에도 소설을 출판하자는 출판사는 없었다. 그 당시 신문의 연재소설은 출판되어도 잘 팔리지 않는다는 징크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하루는 뚱뚱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별들의 고향>을 출판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예문관이라는 출판사의 최해운 사장이었으며 그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매일 아침 이 소설을 읽었다면서 자기가 이 소설을 출판하고 싶은데 내 의견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내가 좋다고 했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오만 원의 계약금을 꺼냈다. 그리고 계약조건을 말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즉 앞으로 7년 동안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은 절대로 다른 출판사에서는 출간될 수 없으며 오직 예문관에서만 낼 수 있다는 독점 계약의 조건이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삼류무협소설에서 본 구절을 기억해낸 나는 그에게 몸을 기탁하기로 하였다. 그와 맺은 7년 간의 독점계약에다가 3년을 더 보태어 정확히 10년 간 나는 예문관 한곳에서만 40여 권의 책을 출간했었다. 정확히 10년을 채우고 나는 예문관을 떠났다.
최해운 씨는 단행본으로 신문에 전 5단 광고를 한 첫출판인이었으며 그는 당시에는 금기시되어 있던 작가의 얼굴을 책표지에 내보인 최초의 출판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사진작가를 불러다가 나를 길거리에 세우더니 정신없이 표지사진을 찍었다. 웃으세요, 웃으세요, 하는 사진 작가의 명령에 따라 평생 처음 나는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아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찍은 최초의 웃음 띤 사진인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이후부터 책에 실리는 사진이건 신문광고에 나오는 사진이건 내 얼굴은 치약 거품을 물고 있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1년 후 314회로 연재가 끝나자 반응은 대단하였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별들의 고향>을 다루고 있었다. '<별들의 고향>의 작가 자신은 이 소설을 성인 동화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지만 <별들의 고향>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다루면서, 그것을 마치 환상을 다루는 것처럼 처리한데서 독자들을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끌고 가는 장점이 있다. 김주연 씨 등 문학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어떤 유형의 인간들에게 대입시켜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서 다른 작품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포용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별들의 고향>에 갈채를 보내는 오늘의 젊은 세대는 전투적인 참여파나 퇴폐적인 반문화의 신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소시민적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별들의 고향> 연재가 끝나자 신 편집국장도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미안하네." 그때가 70년대. 웃지 않는 독재자 박정희 씨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철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 나는 대통령 다음으로 신문에 사진이 많이 실리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곧 내가 우려하였던 대로 <별들의 고향>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당시의 유신 상황으로 보았을 때 문학은 마땅히 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사명감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여 문학인들과 대학생들은 <별들의 고향>의 출판적 성공과 영화의 놀라운 성공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별들의 고향>의 신드롬 현상은 사회의 비판의식을 갉아먹는 무서운 독소라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별들의 고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지식인들은 <별들의 고향>을 호스티스 문학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경아의 직업이 한때 호스티스였을 뿐 소설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호스티스 문학이라는 용어는 참으로 멋지게 붙여진 용어로 융단 폭격하기 알맞은 목표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상업주의 소설이라는 신용어도 등장하였다. 나를 비롯하여 조해일, 조선작, 김주영, 송영, 뒤늦게 나온 한수산, 박범신까지 70년대 작가들을 총 싸잡아서 이들의 작품은 대중소설이며 더럽고 야비한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지탄받기 이른 것이었다.나는 그때 약간의 신경쇠약 증상까지도 느낄 만큼 황송하게도 70년대의 대표 작가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이라 예견되었던 상황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별들의 고향>은 상, 하권 합쳐서 100만 권 가량 팔린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이 책의 인세로 당시 황무지였던 강남 신사동의 땅을 사서 빨간 지붕의 양옥집을 짓자 '최인호 강남에 호화주택을 짓다'하고 서울신문에서는 사회면에 대서특필하기도 했었다. 그 무렵 평론가 김현씨가 나를 불러 어느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하였다."당신은 참 좋은 작가였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작가가 되려 한다. 당신은 우리가 웅호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우리의 입장이 점점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양자 중에 하나를 택일하여 달라"나는 그때 단호하게 말하였다."내게 신경쓰지 마시우 형님.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 내 이름이 부담스러우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제외시키시오." 지금의 얘기지만 그때의 그런 판단이 내게는 참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문단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화가는 화단을 떠나야 하고 하다못해 중도 종단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곳이든, 예술가든 작가든 구도자든 그들이 속해 있는 필드 즉 단은 그들의 정신을 갉아 먹는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혼자여야 하고 문단을 의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단이란 생리적으로 하나의 먹이사슬 형태를 갖고 있기 마련으로 이념과 지방색과 학연과 인연으로 뭉쳐진 하나의 집단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복잡하게 신문과 잡지의 담당 기자들까지 합세하여 마치 조직깡패와도 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자기의 조직원을 키우기 위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문학상을 나눠 먹는 식의 야합은 결국은 작가의 정신을 죽여버린다. 소위 교묘하게 만들어지는 문제작품은 결국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지는 글일 수밖에 없으며 작가의 안목을 눈치와 허위의 함정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문단으로부터 발을 끊어버린 나는 스스로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줄이 끊겨버린 연처럼 나는 바람 부는 대로 떠다녔다. 이십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참여해 본 것은 내게 있어 소중한 경험이다. 이장호 감독과 함께 <별들의 고향>을 만든 이후 <어제 내린 비>를 만들었으며, 돌아가신 하길종 감독과는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2> <병태와 영자> 등을 만들었다. 이경태 감독과는 <도시의 사냥군> <불새>를 만들었으며, 배창호감독과는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곽지균 감독과는 <겨울 나그네>를 만들어 보았다. 만약 내가 김현 형님으로부터 그러한 제의를 받았을 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물론 문단의 보호를 받으며 아마도 대학생들에 의해서 존경받는 작가의 1,2위를 다투는 모범생 작가가 되어 신춘문예의 단골 심사위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내가 내린 선택이야말로 최선이었다고 판단한다.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본 내 지난 과거의 발자취가 이제 나를 산으로 이끌고 있다. '깊게 가려면 바다 밑으로 가고 높게 가려면 산 꼭대기에 가라'라는 선가의 말처럼 나는 이제 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다. 어쨌든 스스로 문단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그날 이후부터 평론가의 글에서 내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얼마 후 문단에서는 곧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과 윤홍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쉰 살이 넘은 이제야 비로소 나는 젊은 시절에 내가 찾아냈던 여인 경아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죽은 경아. 죽어서 자신의 소원대로 청산 가는 나비가 되어 훨훨훨 나래를 치면서 날아가버린 경아. 경아야말로 지금은 흘러가서 다시는 오지 못할 내 청춘의 젊은 초상인 것이다. 한 번 흘러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먼 강가의 강물처럼. 구멍을 통해 흘러 내려와 오 분이면 정확히 텅 비어버리는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흔적없이 새어버린, 그러나 한때는 분명히 존재하였던 젊은날의 내 모습 그대로였던 경아를 이제야 다시 마주보게 된 것이다.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졸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를 두고 노래한 서정주의 절창처럼, 경아야말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내 젊은 날의 머나먼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내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 되어버렸다. 한 때는 내 자신이었고 내 분신이었고 내 애인이었고 한 때는 내 딸처럼 느껴졌었지만 이제는 누님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경아. 경아 그대에게 바치는 내 뒤늦은 축문이오니, 경아여 이제야말로 헤어질 때가 가까어 왔으니, 잘 가시오 경아. 그리고 안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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