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star를 즐겨 보는 나는 시즌 1부터 6까지 줄곳 빼놓지 않고 보았다. 시즌 1에서 박지민, 백아연, 이하이 등을 응원하여 지난 3월 끝난 시즌 6 에서 보이프렌즈, 김혜림, 고아라, 전민주, 김소희, 크리샤 츄, 이수민, 샤넌 등 결선 무대까지 오른 대다수 참가자를 응원하며 라운드마다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그 중에 솔로로 결선 무대까지 오른 샤넌은 유독 독보적인 존재였다. 다른 참가자들이 걸그룹으로 결선에 오른 반면 샤넌은 걸 그룹에서 다시 떨어져 솔로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그의 솔로로서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따로 분류시켰지 싶다.
무엇보다 샤넌은 무대를 꽉 채우는 춤 동작과 카메라에 잡히는 모습이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독특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그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출 때면 잠시도 눈이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즉 샤넌은 노랫말이 주는 이미지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연스럽게 연출하는 표현(재능)이 훨씬 다채롭기 때문이다. 현대 음악은, 특히 요즘 대중음악 가수는 목소리만으로는 팬들의 마음을 붙잡아두기 어렵다. 다시 말해 연기하듯 온몸으로 노래를 표현해야 뮤직비디오에 맛을 들인 음악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들의 마음에 원곡을 부른 자신만의 이미지를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샤넌은 한국어도 시즌 초반보다 능숙하게 구사한다. 발음도 정확하고 노랫말 표현에 따른 표정 연기도 모습만큼이나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 그가 솔로로 세계시장에 진출해도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샤넌의 아버지는 영국 웨일즈 사람이다. 샤넌의 엄마와는 이혼하여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이날도 아빠는 영국에서 샤넌을 보러 왔다. 한국을 방문한 아빠는 어느 날 소속사 연습실에서 밤늦게까지 노래 연습을 하는 샤넌을 찾아간다. 김밥 등을 손수 만들어 싸 들고 연습실 문을 빼곰히 열은 뒤 딸이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때 뒤돌아보는 샤넌과 눈길이 마주치자 샤넌은 울컥 눈물을 흘리며 아빠에게 달려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직 우리말과 음식이 익숙하지 않은 샤넌이 엄마의 나라에 와 외롭게 떨어져 지내며 겪을 고충과 그리움의 깊이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샤넌은 일찍이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엄마의 말을 인용하면 '샤넌은 기기도 전에 음악만 나오면 엉덩이를 들썩였다'고 한다. 그 뒤 국내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고 차츰 가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K-pop star에 출연하는 참가자들은 혹독한 과정을 거치며 라운드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정신적 긴장에서 오는 피로감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훨씬 크다고 한다. 그러니 힘들 때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그리움에 얼마나 보고싶을까. 또한 방송에서는 출연자들이 매 라운드에 오를 때마다 그들이 거울 앞에서 노래하며 치열하게 연습하는 모습까지 덤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시청자에게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겉모습만이 아닌 스타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경쟁인지 그 이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샤넌도 그들과 예외일 수 없다.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어머니 나라인 한국에서 스타가 된 샤넌이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전 세계의 음악팬들에게 사랑받기 바란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K-pop star 시즌-6 준결선에서 심사위원인 박진영의 '어머니가 누구니'를 부를 때의 그 폭넓은 샤넌의 무대 모습이다. 색다른 분장을 하고 원곡을 부른 가수보다 노랫말의 의미와 맛을 훨씬 더 깊고 풍부하게 샤넌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춤과 노래를 들려주어 방청객은 물론 심사위원들까지 탄성을 자아내게 했기 때문이다. 라운드가 진행되며 때론 심사위원들의 따끔한 충고에 굵은 눈물방울이 눈가에 맺히다가도 이내 돌아서서 배시시 웃으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음을 다지던 아직은 앳된 10대 소녀인 샤넌, 나는 그동안 샤넌의 매력에 꽂히면서 그가 충분히 솔로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시대의 암울함에 울분을 느끼면서도 서정성이 짙은 시를 남기고 하늘로 떠난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 유일할 듯하다. 윤동주의 시는 저항성을 지니지만 감정을 토로하듯 격하거나 직설적이지 않은 문학적 토대 위에서 내면의 울분을 은유와 고백으로 표출한다.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식민통치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양심을 고백한 그는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어린 나이에 보여준 심덕이 깊은 한국 문학사에 둘도 없는 본받을 시인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를 단지 식민통치 수단에 거부하여 우리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두고 생체실험으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반인륜적이고 파렴치한 제국주의(군국주의)자들의 피를 타고 난 후대 일본의 양심인들조차 윤동주 시인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유다. 우리가 윤동주 시인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슬 퍼런 식민통치시대에 그토록 꽃다운 젊은 나이에도 목숨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탐구하는 지성인으로서 피 끓는 조국애를 불태운 문학도이자 훗날 독립운동가와 다름없는 '사후 시인'으로 조명되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살신성인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외쳤다면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정신과 문학의 정신으로 젊음을 불사른 평화의 사도였다.
97년 어머니와 함께 중국 북경을 거쳐 1주일 동안 백두산까지 돌아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연길에서 용정을 거쳐 백두산에 이르는 여정에서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시 대성중학교에 있는 윤동주기념관을 잠시 둘러봤다. 기념관엔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교내에서 학생들이 발표한 시화를 벽에 걸어놓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인의 맑고 순결한 시정신이 가슴에 닿아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서시>의 시구 중 내가 좋아하는 구절을 읽으며 눈물이 맺힌 추억은 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원류인 백두산 천지까지 돌아오는 여정이었기에 서시 속의 그 구절은 가슴을 후벼팠다.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아~! 이 얼마나 고매한 인품에서 우러나오는 윤동주 시인만의 자기성찰인가? 나는 사는 날까지 시구를 마음속에 담아 두고 그저 닮고 싶을 뿐이다.
그뒤 한국에 돌아와 대성중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기념관 안내를 맡았던 김영ㅇ 선생님과 한동안 오누이로 호칭하며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우리와 달리 중국 연변, 특히 용정에 사는 동포들의 가슴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조국애가 깊어 윤동주 시인의 삶을 존경하며 받들고 있다는 것을 영ㅇ 선생님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언제 다시 기회가 된다면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안고 추억의 그 길을 따라 백두산을 돌아본 뒤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 들러 경배하며 시인의 맑고 순수한 시정신을 받고 싶다. 그때 이젠 40대 중반의 엄마가 되어 교단에 서 있을 영ㅇ 선생님의 두 손을 잡고 서신이 끊어지게 된 연유와 용서를 빌고 싶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변함없는 '그때'의 몸이라고. 비록 인연의 끈은 맺지 못했지만, 그 마음만은 아직도 변함없이 추억으로 간직하며 배반하지 않았다고...
그렇다. 시인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모국어와 함께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모국어(한글)로 시를 쓰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죄로 감옥에 가고, 급기야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주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였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27년2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 지묘(詩人 尹東柱 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 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자, 자진해서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대신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3부를 묶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윤동주의 이미지는 왜 순결할까?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그의 순결한 이미지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될 당시까지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학생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윤동주 시인의 순절(殉節)한 이미지를 오랫동안 명토 박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있는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 우리교회 권사)씨 한테 있다.
윤동주의 <서시> 육필 원고↗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짧은 기간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 씨는 1948년 12월, 해방공간의 혼란스런 시기에 북간도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되고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 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주오빠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대학노트 3권을 아버지의 권유로 가져왔는데, 그 당시엔 그 노트에 담긴 시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윤씨는 회상한다. 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이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48년 초간본 31편에 들어 있지 않은 시편들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116편
이 게재되어 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절반 이상이 윤혜원 씨의 품에 안겨 월남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일을 한 윤혜원 씨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피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동주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일관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윤혜원 씨는 동갑내기 남편 오형범(84.시드니 우리교회 장로)씨와 함께 서울에서 부산-필리핀-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들이 피했던 대상은 언론뿐만 아니라 수많은 윤동주 연구가들도 포함된다. 1986년, 시드니에 정착해서 21년째 살고 있는 윤씨는 호주에서조차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침통한 표정의 윤동주 "그 분이 글쎄..."
윤혜원 씨는 1924년 생으로 동주오빠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혜원 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모습은 동주 오빠랑 문익환 오빠, 고종사촌인 송몽규 오빠 등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다. 다음은 윤혜원 씨의 회고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출생한 동주 오빠와 문익환 오빠가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를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 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인데, 동주오빠는 11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서울로부터 정기구독 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의 단짝이었던문익환오빠는 광명학교 시절 명동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어서 문익환 오빠의 지도로 성경이야기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 또한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가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은진중학 시절. 뒷줄 맨오른쪽이 윤동주, 가운데가 문익환 목사.
▲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송별회 사진. 사진속 도시샤대학 동창들은 윤동주를 꿈 많고 수줍음타는 청년으로 회고했다.
윤동주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아리랑'
2006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윤혜원 씨의 남편 오형범 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공개됐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현대문학> 9월호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재학시절에 찍은 윤동주 사진과 사진 설명을 쓴 일본 여성의 기고문이 함께 실렸다"고 전해주었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우지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오형범 씨와 함께 기사를 읽어보니,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영문과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윤혜원 씨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랑이 오빠가 부른 마지막 노래일 것 같다. 그 후엔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니..."라며 윤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은 사진에 대해서 설명한 기타지마 마리코(83)의 글이다.
'사진은 1943년 초여름, 교토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함께 도시샤대학에 다니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그 중에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 이 남학생이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다.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라는 급우의 부탁에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사망 원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해 같은 혐의로 같은 형무소에서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교토제대 재학 중 윤동주와 비슷한 시점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10일 사망)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했다. 죽기 직전 친척들에게 전한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에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유골함에 다 담지 못한 윤동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일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 윤동주의 고향 룽징에서의 장례식 장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윤동주의 시들
윤혜원 씨에게 "오빠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망설임 없이 <서시(序詩)>를 꼽는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순수한 모국어로 담겼고, 거기에다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서 늘 숙연해진다"고 말한다.
윤씨는 이어서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생활했던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는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면서 좀처럼 하지 않는 윤동주 시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광명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김태균
(전 경기대 교수, 현재 캐나다 거주)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윤혜원 씨의 소견과 일맥상통한다.
"윤동주의 시 전반을 걸쳐서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주의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그것이 곧 그의 생활이고,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은 서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대단히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접근하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나는 하늘에 있어도 날지 않는다 . 나는 하늘 에서도 걷는다 . 나는 새가 아니다 . 사람일 뿐이다 .
나는 치마를 펄럭이면서 하늘에서 걷는다 . 맨발로 발가락을 쫙쫙 벌린 채 하늘 에서도 걷는다 . 발가락 사이로 바람이 쏵쏵 지나간다 . 머리카락이 뒤로 훨훨 휘날린다 . 벌린 잎 속으로 바람이 슥슥 들어간다 .
나는 하늘에서 걷는다 . 구름 사이를 힘차게 걷는다 .
Yuhki Kuramoto album 1 (Reminiscence)
1. A Mirage on The Water 2. Bell Song 3. Green Hills 4. Lake Louise 5. Last Summer 6. Mediation 7. on The Shore 8. Paris In Winter 9. Prologue II 10. Ripples 11. Romance 12. Sighing Wind 13. Sonnet Of The Woods
( 글 모 음 )
우귀옥
그림이 참 신선하고 밝아요. 잘은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많네요.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묘한 끌림이 있는 순도높은 색채감에 호감이 갑니다. 이런 작가가 세상을 뜨셨다니 아깝군요. 부디 명복을 빕니다.
2009.03.28 (14:38:46)
리처드
고인은 말과 오리, 꽃 등 자연을 강렬한 선과 색에 담은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으며, 2007년 난소암이 발병한 뒤에도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여 왔다. 작가 최인호와 박완서의 책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최근작인 자서전 ‘점선뎐’을 비롯해 ‘숨은 신’, 그림동화 ‘앙괭이에 온다’, ‘큰 엄마’ 등 10 여권의 저서도 남겼다.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이화여대와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1987년과 88년에는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되었다.(자료발췌)
2009.03.28 (15:06:19)
김하정
소재와 색상이 또렷하군요. 처음 접해보는 작품인데 마음에 너무 듭니다.
음악도 좋고요. 언제나처럼 잘 감상했읍니다.
이 맑은 소리와 색갈로 오늘하루도 잘지내겠읍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03.29 (01:02:14)
윤복순
리처드님 감사합니다 김점선님의 그림과 글을 볼수 있게 해주셔서 ... 이분의 그림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강렬한 색상이 아주 좋습니다 그분의 정신세계에 동화되어 어린날의 추억을 상기 시키기도 하지요 한창 작품활동하셨는데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가셔서 안타깝습니다 가신분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며 그분이 남기신 작품 하나 하나 감사히 감상하겠습니다
2009.03.29 (07:42:05)
리처드
우귀옥님, 김하정님, 윤복순님 다시뵙게되어 기쁩니다 오늘의 건강 Good News 생활 속에서 찾는 '젊음의 샘'
발목 운동이 노인들 살린다
조금만 덜 짜게 먹어도 심장마비 사망률 준다
엄마들을 위한 집에서 하는 운동법
2009.03.29 (08:28:41)
임
리처드님, 감사합니다. 김점선 화가의 작품 잘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 복권이 당첨된 기분이네요. 그러나, 재능있는 분을 잃어서 슬픕니다. 피아노 선율과 함께 그 분의 그림을 보면서 그 분을 생각해 봅니다. 김 점선 화가님, 하늘에서 구름 사이를 힘차게 걸으세요.
2009.04.08 (14:28:07
이서종
리처드님 화가 김점선님의 순수와 정열을 사랑합니다. 우리 고유의 민화를 보는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이들이 낙서를 한것 같기도한 그의 작품의 원색의 강렬함에 이끌립니다.
그림을 보면서 유키 구라모토의 잔잔한 피아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2009.04.19 (13:47:38)
리처드
임님, 이목자님
두분께서 마음에 드셨다니 기쁩니다. 화가 김점선님은 윤복순님의 글을 대하고 비로소 그분의 작품을 찾아 재조명 해 보았습니다. 동화속의 그림을 그린 색채의 화가 샤갈을 연상하면서 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샬롬!
2009.07.23 (23:47:29)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복순님의 글을 읽고 어인 까닭인지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화가 김점선..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2009.03.28 (13:20:07)
*
화가 김점선
윤복순 2009.06.16 01:47:08 | 조회 : 963
"나는 내 머릿속을 다스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머릿속이 편안하면 아무리 좁은 공간에 박혀서 지내도 우주를 다 가진듯이 자유로울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물리적인 공간을 갈망하는 것은 미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협소 공포증은 상상력의 부족 즉 두뇌의 힘이 부족한 사람이
걸리는 정신병이라고 행각했다
철학 책을 읽는 것은 머리의 힘을 기르는 데
아주 좋은 두뇌체조라고 생각했다
철학 책뿐만 아니라 독서는 인간이 발명한 행동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행각했다
책을 쓸 때 인간은 최선의 상태에 있는 자신을 불특정
다수의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의지에 불탄다 이것이 최선의 인류애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는 자들은 이미 천 년 전에 죽은 다른 민족의 조상에게서까지
은총을 받아 들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비록 인류문명의 오지에서 태어난 약소국 국민이지만
머리속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몸은 무대에 서 있지 못하지만 머리만은
지구의 중심에서 숨 쉰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면서 지독한 독서가로도 유명한 김점선 얼마전에 세상을 떠나 아쉬움이 크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가도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구도자의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학창시절은 많은 책을 섭렵했고 고전 음악에 심취했으며 두뇌를 회전하는 힘을 기르고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그이 심안이 이렇듯 아름다운 그림들을 남기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저서 점선뎐을 읽는 동안 온몸에 소름이 돋듯 정신이 오롯이 솟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끼게도 한다
삶이란 때로 광기를 부려보며 이 세상에 살다 간다는 몸부림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열정도 느껴 본다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치열하게 살다간 김점선 그분의 삶 또한 참 예술인의 혼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준 선지자 적인 자세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다
한동안 행복한 책읽기에 빠져 지내게 해 주신
공주대학교 중앙도서관 심인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심인선
벌써 읽으셨네요.(^^) 눈에 무리가지 않게 천천히 천천히 읽으셔요. 윤복순님도 역시 즐기는 독서가! ... 감사합니다.
화가 김점선님, 김수환 추기경님 그립습니다. 이해인 수녀님, 법정 스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PS
윤복순님! 그 때 말씀하신 책이 이문구님의 『관촌수필』아닌가요? 저자의 자전소설인가 봅니다. '북에는 홍명희, 남에는 이문구' 라는 찬사를
듣게한 아름다운 문체라고 합니다.
2009.06.17 (17:16:38)
리처드
윤복순님,
[화가 김점선님]이라고 두번째 올리신 글에 잠시 머물어 님의 마음 텃밭에 왔습니다. 밑줄 그으며 강한 메시지를 주는 말들에 혹합니다.
머릿속이 편안하면 아무리 좁은 공간에 박혀서 지내도 우주를 다 가진듯이 자유로울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 인간은 최선의 상태에 있는 자신을 불특정 다수의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의지에 불탄다 이것이 최선의 인류애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이란 때로 광기를 부려보며 이 세상에 살다 간다는 몸부림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열정도 느껴 본다
심인선님,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참된 의미를 윤복순님의 [점선뎐]독후감을
통해 간접이나마 느낌을 갖게됨을 감사드립니다. 나마스떼!
2009.06.18 (08:48:59)
윤복순
화가 김점선님의 명복을 빌며
말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리던 화가 김점선님이 22일 별세 하셨습니다 동화처럼 때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꽃이며 말이며 오리를 그려대시더니 난소암이 발병하여 함암치료와 투병을 했었는데 끝내 끈을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책 일부분을 발취해 봅니다
(1)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러 나라 시인들이 쓴 시를 읽고 그들의 생애를 알게 됐다. 수많은 시인들이 후대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언제부턴가, 명절날 차례를 지낼때면 그들이 문득 생각난다. 죽은 시인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아르튀르 랭보가 제일 불쌍했다. 그러던 어느해, 아버지 몰래 불어와 한자가 섞인 지방을 썼다. 그렇게 몇번 차례를 지내고 나서는 붓으로 정성드려 써보기도 했다. 그 랭보의 지방을 식구들 몰래 차례상 뒷다리 안 보이는 곳에 붙였다. '랭보씨 음식 먹는 시간입니다. 어서 드십시오.'
(2) 범죄자들을 보면서 나는 늘 미안해했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넘치는 에너지는 그들이나 나나 똑같았어. 그런데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가지런한 영혼으로 다듬어졌는데 그들은 바람 부는 벌판에 버려져 있었던거지. 헝클어지는 영혼을 그대로 놔둔 채 몸은 자라난거야. 몸은 힘이 넘치고 정신은 막힘이 없어. 여기까지는 예술가와 범죄자가 똑같아.
(3) 어느 날 엄마가 날 조용히 불렀다. 내 남동생이 여자가 생겨서 곧 혼인시킬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날더러 집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는 시어머니가 되는데 시집 안 간 시누이가 집에 있으면 며느리에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했다. 깊은 슬픔이라는 말은 이런 때 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른도 넘은 나이에 일어난 일이다. 며느리 눈치 안 보려고 날 내치다니, 얼마 후 집 나왔고 지금까지 집엘 안 들어갔다.
(4) 개울가의 버드나무들은 각각 다른 나무라고 그들 스스로 생각하고 있고 그 곁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게 느낀다. 개울이라는 물 덩어리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개울물로 생명을 유지하는 한 덩어리의 생명체가 그 버느나무들이다. 개울이 영영 말라버리면 버드나무는 다 죽어버린다. 그때 그 물을 버드나무의 무의식이라고 나는 부른다.
(5) 여행을 가지 않고 여행 대신 머릿속을 정리하는 독서를 선택하는 생활습관은 그때부터 평생 동안 이어졌다. 나는 늘 내 머리속을 다스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머리속이 편안하면 아무리 좁은 공간에 박혀서 지내도 우주를 다 가진 듯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물리적인 공간을 갈망하는 것은 미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협소공포증은 상상력의 부족, 즉 두뇌의 힘이 부족한 사람이 걸리는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책을 읽는 것은 머리의 힘을 기르는데 아주 좋은 두뇌체조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그는 초연했습니다 곧 그것은 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며 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책 말미에는 “죽음도 삶의 마지막 부분일 뿐 삶과 동떨어진 괴물이 아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의 삶을 접하면서 참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예술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영롱한 이슬처럼 맑기도 했었구요 살아가는 일상들을 관조할수 있는 역량도 있으신 분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번 우리 살사방 모임에서도 금송 이다겸님을 뵈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이런분들이 계시기에 매말라 가는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여 늘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것이겠지요
가신분의 명복을 빕니다
2009.03.26 03:15:54 | 조회 : 816
김소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덕분에 짧은 글에서도 그 분의 일생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수있어서 더 애절한 마음이 듭니다.
늘 좋은 소식, 슬픈 소식, 세상 인간살이 두루... 열심히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09.03.26 (15:24:28)
박상길
아픈 영혼을 예술로 승화시켰지만,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그 분의 생이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젠 편안한 안식을 누리겠지요 ㅠㅠ
2009.03.26 (17:38:34)
윤복순
리처드님 감사합니다 가신분을 애도하며 듣는노래 평화와 안식을 얻습니다
2009.03.26 (20:10:12)
윤경숙
가신분의 명복을 빕니다 부지런한 복순님 고맙습니다
2009.03.27 (11:49:04)
봄내지기
학교에서 김점선 선생님의 작품을 공부하다가 이곳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자료 옮겨가서 공부하려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10.16 22:07
봄내지기님, 김점선님의 그림을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그림이 담고있는 메시지와 구도와 색채가 특별합니다. 원본 그림들을 어느 전시회에서 볼 기회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2015.11.14 23:58
버드나무와 꽃과 오리
잠자는 숲속의 천사
그림은 내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
/ 김점선
나는 말 위에서 죽었다.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나를 태운 채 말은 달리고 있었다. 그때 말과 나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말이 내 자신인지 내가 말인지……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었다. 말을 그린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 밖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는,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는 잡념과 잡지식 만이 썩은 지푸라기처럼 쑤셔 박혀 있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학교 다니는 일 외에는, 아무 준비가 안된 미숙아인 채로 졸업을 당했다. 나는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외쳐댔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등록금을 줬다. 그렇게 큰소리 치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한 학기만에 제적당했다. 맘에 안 드는 과목을 수강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나를 가르치던 미국인 선생님이 나의 제적을 안타까와하면서 동료와 일할 기회를 주었다. 통역 일을 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받았지만 모으지 않았다. 다시 죽음과 마주섰다. 나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행복했다.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기쁨을 느꼈다. 다시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는 27살이고 지금부터 31년 전 일이다. 아버지는 나를 금치산자 취급을 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나는 헝클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 엄마가 나섰다. 무조건 나를 지원했다. 열심히 그림 그리고 학교 다니는데 그것만으로는 예술가가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쓴맛을 이겨내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고 했다. 맞는 소리 같아서 결혼했다. 집 나온 청년과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채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에 경악했다. 아이도 생겼다. 매우 가난했다.
우리가 굶는다고 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굶는 줄 알았다. 재미나 멋으로.
그럴 때 사는 길은 극도로 아끼는 것이다. 어쩌다 5만원 주고 그림 한 점을 팔면 정부미만 사고 반찬 사는 데는 돈을 한푼도 안 썼다.
동네에서 얻은 된장에 산에서 캐온 풀을 넣고 끓여서 먹었다. 그림 그릴 캔버스도 돈을 아끼려고 광목을 사다가 합판에 붙여서 그렸다.
그런 그림을 모아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이 꽤 팔렸다. 일년 먹을 쌀을 사고 물감과 광목을 살만할 돈이 생겼다.
작업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좁은 셋방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 그린 그림은 제일 큰 게 30호를 넘지 않는다. 100호 짜리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다. 비만 오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인 물을 버리느라고 밤을 새야 했다, 그럴 때 멍히 물을 바라보느니 그림 그리면서 밤을 샜다.
내가 살던 마을의 산과 들에 대해서 환하다. 어디에 무슨 나물이 있는지 언제 어떤 먹을 만한 풀이 나는지를. 그 마을에서 산을 식량창고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림 그리다가도 하루에 한시간 쯤 은 산을 헤메면서 반찬감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꼭 일년을 버틸 만큼씩의 돈을 벌었다. 내 행동은 변함이 없는데 차츰 그림이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100호 캔버스를 100개나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내가 먹고살 돈을 버는 길이면서 또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회이다. 그림은 경건한 예배다. 자신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내 영혼 속에는 가깝게는 나와 나의 부모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내 조상의 경험까지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나팔꽃
생나무 울타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 나팔꽃이 피어 있는 남쪽 철책 담 앞에 한참 서서 꽃송이 수를 센다 . 한 송이 , 두 송이 , 세 송이 ... 마흔 여덟 송이 . 세상에 ! 연한 하늘색 꽃들이 맑은 하늘색 하늘 속에서 빛나고 있다 .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보고 한참 동안 서 있는다 . 교회 옆 전봇대 쇠줄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들은 무려 10미터도 넘게 하늘 높이 피어 있다 . 그렇게 높은 데까지 넝쿨이 올라가고 , 그렇게 높이 꽃이 매달려 있으면서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다 . 나팔꽃은 하늘이 집인가 보다 .
풀숲 눕기
나는 풀숲에 누워 있다 . 하늘을 보고 누웠다 . 모든 것을 비운 듯이 가볍게 누워 있다 . 이따금 눈 속에는 하늘이 보인다 . 땅의 물기가 풀잎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 나도 잎맥을 따라 조금씩 하늘 속으로 들려 오려진다 . 나는 꼭 떠오를 것이다 . 몸 바로 위는 하늘이고 몸 바로 밑은 땅이다 . 나는 살아 있다 . 나는 편안히 누워 휴식할 뿐이다 .
오리
오리는 내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동물이다 . 어릴 때 이가 아파서 치과엘 다녔다 . 약솜을 꽉 눌러 아물고 터덜터덜 걸으면서 오리를 부러워했다 . 오리가 되면 좋겠다 . 오리는 이빨도 없고 아무거나 먹고 , 헤엄도 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
매일 물 속에서 노니까 목욕탕에 안 다녀도 되고 ,
급하면 날기도 하고 ,
좀 커서는 오리가 좀 둔하고 튼튼해서 좋았다 . 다른 새들은 연약하고 가볍고 만지면 죽을 것같이 위태롭게 보이는데. 오리는 궁둥이를 퍽퍽 때리고 내려놔도, 금방 씩씩하게 달려가는 게 좋았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1954∼ ):충북 청주.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시 '고두미 마을에서' 발표. 시집 『접시꽃 당신』 산문집 『꿈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외 다수,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충남대 대학원. 현 국회의원
삶은 끊임없는 연단을 거치며 나아간다는 것. 이 인생론은 역경이 바로 우리네 평생의 동력임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아무런 훼방이 없고 굴곡도 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무미 건조할 것인가. 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면서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대여! 무수한 담금질로 강철이 단련되듯 아픈 메질이라고 애써 피하지만 말자! 어느새, 봄바람 분다. 속절없이 흔들리며 살아야겠다. <김명인·시인>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은 누구나 시련을 겪으며 살아가는 과정을 꽃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 시련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할 뿐 아니라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디 인생뿐이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 나름의 시련을 받아드리며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공부하며 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학교에서 파직을 당하고도 그는 당당하게 다시 학생들 앞에 섰고 국회에 입성하여 의회민주주의를 꽃피우는 한 송이 꽃이 되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곧 흔들리는 꽃이었다. (옮긴이 추가)
한때 노래방에 가면 흔히 말하는 나의 '18번' 이었던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 이 노래가 귓가에 다가올 때면 마치 노랫말의 주인공이 된 듯이 나는 실연(失戀)의 아픔이 뼛속까지 사무쳐 세상의 슬픔은 다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부르곤 했다.ㅎㅎ
그만큼 노랫말이 직설의 언어가 아닌 시적인 은유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못다 한 아쉬움을,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안타까운 마음을 짙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록 서로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간직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웃어달라고 부탁하는 한 연인의 애절한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 있어서다. 그 아름다운 이별의 아픔은 일종의 자기연민이자 떠나보내야만 하는 연인에게 '진정으로 사랑했었다,'는 마지막 사랑의 고백이자 배려하는 마음이지 싶다. 아니, 어쩌면 아픈 마음을 애써 감추고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서려는 역설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노랫말 속에 당시 연인들의 시적인 아름다운 이별 정서가 오롯이 드러나는 곳도 바로 '마지막까지 웃어줘' 하며 절규하는 부분이며 내가 이 노래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이다.
90년대, 이 노래는 사랑하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데 많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특히 '전유나'라는 청순한 이미지와 호소력 짙은 가창력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더 촉촉이 젖어들었다. 즉 수동적인 한국 여인의 아름다운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노랫말이 수많은 음악팬들의 마음을 울리며 마치 그들의 이야기처럼 빠져들게 하지 않았을까. 또한, 까만 단발머리에 때 묻지 않은 풋풋한 전유나의 절규하는 듯한 표정이 애절한 노랫말과 어울려 실연한 젊은이들이 잠 못 이루며 눈물을 흘리도록 사로잡지 않았을까.
이처럼 대중가요는 그 시대의 아이콘이자 대중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다. 다시 말해 '너를 사랑하고도'는 전유나의 청순한 소녀적 이미지와 은유로 드러낸 노랫말이 어울려 노래의 참맛을 한층 더 깊이 우려냈다. 당시 연인들의 이별 정서가 노랫말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남녀를 불문하고 젊은이들이 이 노래를 즐겨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는 90년대 젊은이들이 실연(失戀)의 아픔을 위로하고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는 아이콘이었다.
※ 아래 노랫말이 주는 은유적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던 가슴 아린 첫사랑을 그려보며 따라 불러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 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 멍한 눈 들어 창밖을 바라만 보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 내 가슴속에 머물 길 원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은 /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 너의 마음을 이젠 난 알아 사랑했다는 그 말 난 싫어 /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 줘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은 초라 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 너의 마음을 이젠 난 알아 사랑했다는 그 말 난 싫어 /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줘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 너의 마음을 이젠 난 알아 사랑했다는 그 말 난 싫어 /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 줘
학교에서 <영화와 문학> 과목을 수강하며 교수님과 재밌게 공부한 추억이 어제 같은데... 그립습니다.
이 아름다운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문학적인 배경을 설명해주시는 순간이 마냥 행복했는데....
게시일: 2017. 3. 15.
우정과 사랑, 성장을 담은 한 폭의 시 “시가 내게로 왔다” 작은 섬 칼라 디소토에 오게 된 시인 네루다, 어부의 아들 마리오는 그의 도착으로 인해 불어난 우편물량을 소화하고자 우체부로 고용된다. 로맨틱 시인 네루다와 가까이 지내면서 섬마을 여자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마리오는 그와 우정을 쌓아가면서 시와 은유의 세계를 만나게 되고, 아름답지만 다가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베아트리체 루쏘와 사랑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 자라고 있던 뜨거운 이성과 감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원작 소설-'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죠. 학교(문창과)에서 <문학과 영화>라는 과목을 수강하며 이 영화를 강의 시간에 다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몇 번을 봤습니다. 이번에 다시 개봉하기 때문에 한글 자막을 제공하는 영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개봉관에서 가족들과 보아도 괜찮습니다. 부부동반 연인들끼리 보면 더욱 좋겠죠. 꼭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백지영의 장점은 타고난 맑은 목소리에 노래할 때 연기(演技)가 묻어난다는 것이다. 노랫말이 멜로디에 실려 대중과 호흡(교감)할 때 특유의 발성(법)으로 청자의 가슴을 울리는 묘한 마력이 있다. 한때 이 노래에 빠져 입에 "사랑 안 해, 사랑 안 해" 달고 다니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일터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지난 추억들이 오롯이 떠올라 ㅎㅎㅎ
가사를 잘 음미하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남여 간의 심리를 조금 알 듯한 이 노랫말은 백지영이 불러 힛트한 노래 중 팬들에게 가장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킨 노래라고 보여진다. 어쩌면 그녀가 마음고생을 한 뒤 발표한 노래였기에 이 노래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나(팬들)의 가슴에 더 절절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문창과 재학 시절에 <실용음악가사론>을 수강하며 노랫말이 갖는 의미와 그 깊이를 한층 섬세하게 받아드리게 되었다. 대중음악 가사(노랫말)는 곧 우리가 살아가며 부딪치는 삶이자 애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