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  /   임보



로메다 님,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인간은 이방인처럼 서먹서먹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이 세상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이 존재의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존재의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무딘 감각을 지닌 비정상적인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두렵게 생각지 말고 충분히 괴로워하십시오.
그러한 고뇌를 통해 로메다 님은 한 단계 높은 성숙한 영혼에 도달할 것입니다.
어쩌면 시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러한 숙명적인 외로움과 무관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우리의 존재가 실존주의자들이 회의한 것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는 시에 대한 담론은 잠시 접어두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로메다 님,
'나'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겠지요?

'나'는 물론 부모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생명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의 뿌리는 부모님 이전으로 한없이 거슬러올라가게 됩니다.
2분의 부모→4분의 조부모→8분의 증조부모→16분의 고조부모→……
이처럼 한 세대를 거슬러올라갈 때마다 2배수로 불어나면서
조상의 갈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됩니다.
오늘의 '나'를 이 땅에 오게 하기 위해 600년 전쯤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이 지상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계산해 볼까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20세대 전이 되니까, 2의 20승입니다.
2의 20승이면 100만 명이 넘은 숫자입니다.
'나'의 혈관 속에는 600년 전 100만이 넘은 조상들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 100만 명 가운데 어느 한 분만 안 계셨더라도 오늘의 이러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의 끈은 수 백만 년을 거슬러올라가 태초의 조상,
아니 창조주에까지 닿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혈관 속 DNA는 과거 전 조상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 전 조상의 결집으로 응결된 하나의 집합체입니다.
결코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배우자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 둘씩을 낳는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그 아들과 딸들이 결혼하여 둘씩의 자녀를 갖게 되고
다시 그 자손들이 그렇게 둘씩의 자손들을 계속 얻게 된다면
600년 뒤 '나'의 피를 가진 후손들이 이 지상에 얼마나 존재하게 될까요?
100만 명이 넘습니다.
이 지상에 인류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피를 지닌 후손들은 점점 불어나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미래 인류들의 조상입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자녀를 얼마만큼 생산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을 좌우할 수 있는 막중한 존재입니다.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고요?

과거 전 인류들이 나에게 귀결되었고
미래 전 인류들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나는 전 인류의 한 교차점―인류의 한중심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공간적으로 우리 생명체 곧 '나의 몸'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몸, 육신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물론 우리의 몸은 처음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오늘의 이러한 육신이 되도록 길러준 것은 삼라만상의 협동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섭취했던 모든 음식물이며
내가 그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호흡했던 모든 공기며
그동안 햇빛을 위시해서 내가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한
모든 요소들의 총체적인 작용에 의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메다 님,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한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한 우주적 요소들을 끌어 모으며 살아가는가 짐작이 갑니다.
뿌리로는 물을 비롯해서 땅속에 들어있는 많은 영양분들을 빨아들이고
잎과 가지로는 필요한 햇빛과 공기들을 얼마나 열심히 모읍니까?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우주적 요소들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한 개의 달걀,
한 마리의 물고기,
한 점의 육류(肉類)…
이러한 음식들 속에 서려 있는 우주적 요소들을 실로 아득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조그만 부엌에서 조리된 단순한 음식물에 의해 형성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전 우주적 요소들이 총 동원되어 빚어낸 신비로운 결정체입니다.
한 생명체의 몸뚱이는 전 우주의 축약·수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지칭하는 순 우리말 '몸'의 어원이 '모으다' 아닙니까?
실로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생명관을 엿보게 하는 말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목숨이 끊긴 뒤, 사후(死後)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생명이 멈춘 뒤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육신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은 흩어지고 흩어져서
그것들이 왔었던 애초의 우주 공간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육신의 요소들로 이 우주는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죽음'을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되지요?
로메다 님,
우리의 '몸' 역시 하나의 응결체며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전 우주적 요소들이 응집(凝集)되어 잠시 내 몸을 이루었다가
다시 그 요소들이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가는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앞에서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응결이며 전 미래 인류의 출발점으로
전 인류의 교차점이며, 중심점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 나라는 생명체는 역사적(혈연적)으로도 공간적(육체적)으로도
이 세상의 축약이면서 한중심입니다.
'나'는 축소된 우주― 소우주입니다.
'나'는 이 우주 전체에 버금갈 만큼 소중합니다.
이러한 '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입니다.

로메다 님,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비하(卑下)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왜 아무개처럼 좋은 기억력을 못 가졌을까?
나는 왜 아무개처럼 얼굴이 예쁘지 않을까?
그러나 로메다 님,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개보다 기억력은 뒤질지라고 상상력은 더 앞설 수 있고
아무개보다 얼굴은 덜 예쁠지라도 종아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습니까?
내 생명체는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절대적 가치를 지졌습니다.
로메다 님,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지십시오.
당신은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로메다 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이처럼 소중합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 소중합니다.
하나하나 그것들의 내력을 깊이 생각하면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의 내 얘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야가 달라졌으면 합니다.
밝고도 아름다운 세상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창조주가 마련한 그대의 정원이요.
당신은 그 정원의 주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임보


※ 이 글은 임보 시인의 시 창작강의를 들으며 받아온 자료입니다.

고민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살아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존재가치의 표현수단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봄 입니다. 힘내세요.

이 글을 읽으면서 '나'란 존재를 다시 한번 음미해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려드립니다.^^





출처: 유튜브 (https://youtu.be/UTUTMxe4dPE)


                    

     출처: 유튜브


                  

 

    출처: 유튜브 (바이올린:진영은 / 피아노: 김유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동자승이 노승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사계절에 비유하

여 욕망과 업보 삶의 윤회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2003년 대한민국 청룡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과 동시

에 미국의 대표적인 10대 청소년 잡지가 선정한 '2004년의 베스트 영화 톱 10'에 들었습니다.


출간 3개월만에 45만부, 혜민스님 “저도 궁금합니다”

[인터뷰] 혜민 마음치유학교 교장 " 내 생각과는 다른 모습, 창피할 때 있다"

임인영 북DB 칼럼니스트 iylim@interpark.com 2016년 05월 13일 금요일


메모 :

http://cafe.daum.net/SDUstorywriting/Tlvo/28

 

 

 

        젊은날의 초상

 

<한때는 내 자신이었고 내 애인이었고...이제는 누님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경아.>

최인호

 

  참으로 이상하게도 쉰 살이 넘은 요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는 모양으로 ', 별들의 고향의 작가시죠?' 하고 되묻곤 한다.경아와 남주인공 문오와 함께 판잣집에서 마지막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희화화된 지 오래이고 지난 해 연말에는 TV에서 <별들의 고향>을 방영한다고 해서 어떨까 하고 보다가 5분 만에 닭살이 돋는 것처럼 쑥스러워서 TV를 꺼버린 적이 있었는데, 어쨌든 아직은 내 이름을 들으면 25년 전 내가 26세 때 쓴 처녀작 <별들의 고향>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싫건 좋건 한 번의 인연이 평생을 지배하는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별들의 고향>은 내 평생이 낳은 하나의 업이다. 이제 와서 그것은 내게 있어 버릴 수 없는 산이며 씻을 수 없는 나의 전력인 것이다.그러므로 1967년 문단에 데뷔해서 <별들의 고향>을 쓴 1973년까지의 한 시기는 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젊은날의 초상'인 것이다. 

 1

  오랜 전 대학 시절 나는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라는 연극에서 신문팔이 소년역을 맡아 했었다. 이 연극은 지금도 내게 깊은 감동적 인상으로 남아 있다.연극의 한 장면 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어린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마다. 그녀는 무대감독을 맡아 하고 있는 상징적인 신에게 나는 이대로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다. 내 일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어린 날로 한 번쯤 돌아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무대감독이 묻는다."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언제입니까?"여인은 대답한다."내가 열 살 때의 생일이었어요."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무대감독은 여주인공을 열 살 때의 어린 날로 보낸다.장이 바뀌면 열 살 때의 생일 아침, 어머니는 딸의 생일날 준비에 부산을 떨고 있다. 그때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어쩌면 어머님이 저처럼 새파랗게 젊으실까."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존재를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옆에서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고 있으며 옆에서 붙잡아 끌어도 전혀 의식지 못하고 있다. 결국 여인은 행복했던 추억이란 과거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처럼 아름답다 해도 되돌려 재현시킬 수는 없다는 절대의 명제 앞에 깨끗이 과거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죽음에 승복하는 것이다.  왜 갑자기 대학 시절에 공연했던 감명 깊은 연극의 한 장면 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가 하면, 이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무대역활을 자처한 또다른 나와 더불어 내 인생에 있어 처녀였던 <별들의 고향>을 쓸 무렵의 청춘의 계절로 함께 떠나 볼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2

  내 고향은 서울이다.나는 해방되던 그해 가을 서울 예관동에서 태어났으며, 줄곧 서울에서만 살아온 서울내기다.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이 전라도·충청도로, 간혹 고향에 내려 갔다 왔다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부러울 때가 있다.그들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했으면서도, 서울을 줄곧 원수놈의 타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난 작가 유현종 씨는 이제는 완전히 촌사람 티를 벗어나고 서울 깍쟁이가 되었는데도 야구 구경을 갈 때면 눈을 부릅뜨고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김승옥 씨는 한때 이 망할 놈의 서울, 서울, 이 웬수 놈의 서울을 주절대더니 고향 순천으로 내려가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낙향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에 돌아갈 고향, 위로받을 고향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솔직히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낙향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이냐.나는 미록 서울 태생이었지만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북 평양에서 살아왔다. 아아, 그렇다면 나는 고향에도 갈수 없는 실향민이 아닌가.  그러나 서울도 역시 내가 태어난 고향이 아닐소냐.  그렇다. 나는 사대문 안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중구에서 태어난 서울 깍쟁이다. 서울은 그 동안 지방에서 이주해 온 촌놈들로 완전히 점령당하고 있다. 경우 바르고 체면 차리고, 냉수 마시고 이빨을 쑤실지언정 깍쟁이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서울내기로서의 면모는 거친 사투리와 지방색적 단결심으로 완전히 멸망되었다.  서울내기, 진짜 서울 깍두기의 모습은 요즈음 서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함께 골목에서 뛰놀던 깍쟁이 놈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아마도 전국 팔도 가시네를 여편네로 삼아서 순수한 서울 피를 혼혈하고 있을 것이다. 순 서울산 재래종들은 점점 멸종되어 가고 교배 잡종들만 번창하고 있구나.  덕수국민학교, 서울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친 나는 그야말로 순금의 서울내기다. 살아온 것을 더듬어 보면 태어난 곳은 중구 예관동이요, 영희국민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이사간 곳이 지금 고려병원(현재 강북 삼성 의료원)자리의 평동 582번지다. 내가 이놈의 번지를 어떻게 외고 있는가 하면 이놈의 집이 지금은 거대한 고려병원의 뒤뜰로 없어져버렸지만 아직도 내 주민등록증의 본적란 주소로 기재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서대문구 평동 582는 내가 분명히 살아왔던 본적이었으되 지금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지 않는 '환상의 집'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태어난 '생가'(이 거창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는 비록 형체는 남아 있으되 중구청 건너편 가구상들 중의 한집인 이 집은 지금 완전히 변모되어 있었다. 방이 많아 한때는 여관도 하더니 주인의 허락을 얻어 올라가 본 그 집은 이젠 완전히 아편굴처럼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내가 아버님 앞에서 재롱부리며 놀던 방엔 못 쓰는 가구들만 그득하였으며, 변호사를 하던 아버님이 손님을 받던 응접실엔 쥐들의 똥만 무성했다. 철마다 보랏빛 꽃을 피우던 오동나무는 어디로 갔는가. 집 옆에 흐르던 개천은 복개로 덮이고.  그 당시 내 집은 멋진 집이었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려면 개천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와야 했었지. 아아, 어릴 때의 오동나무는 내 놀이터였었다. 나는 그 나뭇가지 위에서 하모니카를 불곤 했었지.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나는 그 집에서 살았다.누이들은 아직 처녀였으며, 형님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가. 그 집에 밤이 오면 우리는 아직도 살아 계신 아버님 앞에서 소프라노와 알토로 노래를 부르곤 했었지. 

어제 불던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엔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그러면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었다. "우리 새끼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 , 제일이고 말고."

 

 3

  나는 어릴 때부터 현시욕이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어느 좌석에서건, 어떤 경우에도 나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기를 좋아하는 노출 증세가 있었으며 이중인격자였다. 정서적으로 미숙아였으며, 어떤 때는 쓸데없는 용기를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형편없는 겁쟁이였다. 신경질의 화신이었으며, 질투와 적의를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성장한 가난한 집의 둘째 아들로 자라났다.  나는 공격성이 강해서 나보다 강한 자, 권위적인 것, 위선적인 것, 질서나 규율에 관해 맹목적으로 도전하고 덤벼드는 기질을 타고났는데 그것은 우리집의 체질이었다.  나는 철저히 개인주의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형태든 조직은 싫어한다. 나는 조직은 어떤 형태든 광기에 젖어있다는 니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으며, 조직은 그가 무너뜨리려고 하는 또 하나의 조직과 목적하는 바가 항상 같다는 비체제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나는 혼자이며 남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더러 의리가 강한 녀석이라고 가끔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그것은 인간적인 수양을 쌓아서가 아니라 이기주의자로서 타인을 평가하는 약점 때문이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며 내가 남에게 간섭하기를 원치 않듯 나 역시 남에게 간섭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우리 동네에게 키 큰 녀석이건 작은 녀석이건 나를 건드리지 않고 경원하였던 것은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라 내가 서슬퍼렇게 가지고 있던 냉소적인 적의의 이끼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유약하여 매를 두려워 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해수욕장에서 1시간 가량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나는 여하한 형태라도 (그것이 혁명이라는 미명을 붙이더라도) 폭력은 증오하고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낙관주의자며 그래서 어떤 때는 쉽게 용서하지만 어떤 때는 쉽게 편견을 갖는다.  이런 복합적인 성격은 성장하여 획득한 것이 아니라 우리집 식구들은 누구든 가지고 있는 기질이었다. 평안도에서 자라난 우리집 기질은 성질이 급하며 눈물이 많고, 남을 잘 웃기지만 정이 깊지 않고 얕으며, 다정다감한 것 같지만 실은 비정하며, 통이 큰 것 같지만 실은 수전노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논리적이고 머리가 좋은 분이었지만 어머니는 예술적인 기질을 타고난 상민의 딸이었다.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무렵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함께 잤으며 새벽이면 아버지의 젖꼭지를 몰래 빨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녀석이 어머니 품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 보상을 아버지에게서 찾은 것이라 나는 짐작하고 있다.아버지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혼자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던 범인으로서, 변론을 맡으면 언제나 피고측에서 서서 눈물을 조금씩 흘리던 변호사로 유명하였다. 아버지는 한때 조만식 씨 휘하에 들어가서 정치 활동도 했지만 월남한 후 단순히 법조인으로만 처신하였다.  우리집 형제는 모두 독립성이 강하며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이웃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학비를 벌었다. 우리집 형제들은 형제에 대한 우의가 깊으며 마피아 같은 혈맹으로 뭉쳐져 있다. 어릴 때부터 자기 것은 자기 스스로 처리 할 수밖에 없다는 훈련을 받아왔으며, 그 지독스런 가난을 겪은 탓인지 간혹 가난했었다는 과거를 소설로 미화시키는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조금쯤 아니꼬워진다.
  가난에 대해 미화를 시킬 줄 아는 사람은 실제로 가난을 제대로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버스값이 없어서 몇 정류장쯤은 노상 걸어다녔고, 교복이 없어서(내 고등학교 때 별명은 걸레였다) 형이 입던 교복을 줄여 입고(우리집 남자들은 모두 같은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점 의복비를 줄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다녔다. 양말은 늘 두 켤레였는데 그래서 아침마다 먼저 신은 사람이 임자였으며, 제일 나중에 신은 사람은 흥부네 자식 버선처럼 수천 번 기운 양말이었다. 언제나 게으른 나는 그 양말을 내 차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산은 하나였으므로 비가 오는 날은 늘 비를 맞고 걸어다녔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나는 학교까지 비를 맞고 걸어가는 굴욕은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고등학교 근처에는 이화여고, 경기여고에 다니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녀들에게 비를 홀딱 맞고 걸어가는 내 꼬락서니를 보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우리들의 학비는 하숙을 치는 것으로 충당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새벽밥을 지었으며 하숙생들에게 밥상을 들여가는 것은 내 차지였다. 그들은 간혹 밥 속에서 어머니의 은빛 머리카락이 나온다고 불평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다음 식사 때 비싼 황금의 달걀을 반숙해서 상에 올리는 것으로 하숙생을 무마시키곤 했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집을 한 채 두고 가셨는데 변호사 아버지는 자신의 가정보다 다른 사람에게 통이 큰 척 마음을 베푸는 위선자였으므로 유산이라고는 바로 그것 하나뿐이었다.그 아버님이 돌아가신 집이 바로 평동 집이다. 어제 불던 봄바람은 올 봄에도 불고 있지만, 이미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요 잔디밭도 어제의 잔디밭이 아닌 것이다.  형이 고등학교에 갈 때 우리는 아랫방을 세를 주었고, 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우리는 건넌방에 세를 주었다. 더 이상 세를 줄 방이 없으면 우리는 집을 팔아 이사를 갔다. 결국 우리는 한방에서 삼형제, 어머니, 누이가 함께 자야 했다. 윗목에선 언제나 자리끼가 꽁꽁 얼곤 했다.  형은 항상 형이라는 권위로 나를 이불 속에 먼저 들어가게 하곤, 내 체온으로 이불을 따스하게 녹여 주어야 들어오곤 했었다. 누구든 방에 불을 켜면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으므로 마루에 불을 켜고 방 문틈을 조금 열어 놓고 나는 꿇어 엎드려 글을 쓰고 형은 영어단어를 외곤 했다.  평동에서 살던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 북아현동 집으로 이사를 갔었다. 1959년에 이사를 간 우리는 이곳에서 15년 이상을 살았다. 이곳에서 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고 결혼을 했다.  몇 해 전 <월간조선> 기자와 이 집을 다녀오는 동안 딱 한군데의 집만이 눈에 익었다. 조그만 골목 네거리에 있는 <홍주약국>이란 간판이 그것이었다.  이 약국은 옛날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들러서 인사를 했더니 그때 주인은 아직 별로 늙으신 모습 없이 그 자리에 계셨다. 너무나 반가워하시는 그분은 내게 먹으라고 원비 두 병을 공짜로 주셨다."지금도 술 많이 마시쇼?"약국 주인님은 내게 물었다.그렇다.  그분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술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나를 우리 형제를 약국 유리창 너머로 줄곧 지켜보고 계셨었다. 그분은 우리 형제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고, 군대에 입대하고, 휴가 맡아 나오고,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작가가 되던 과거를 약국 유리창 바깥을 내다보듯 샅샅이 기억하고 계셨다."아아, 기억납니다 최 형. 일요일이면 할머니(우리 어머니)가 술 깨는 약을 사러 오곤 했었지요. 언제나 세 병씩 사가지고 가셨지요. 늘 술에 취해 있었으니깐요. 형님은 뭘 하시유?""대우의 사장으로 계십니다.""동생은......""미국으로 이만갔지요.""우리 오랜만에 냉면이나 먹읍시다. 이렇게 오랜만에 유명한 사람(?)이 모처럼 옛 동네에 왔는데 냉면이라도 한그릇 대접지 않으면 섭섭해서 어떻게 하지."냉면을 사양하고 찾아간 북아현동 한옥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요즈음 날로 번창하고 있는 교회가 서 있었다.  내가 배를 깔고 없드려 글을 쓰던 안방은 주차장이 되어있었으며, 거넌방은 교회 뜨락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내가 이 다음 죽은 뒤에 아주 명망 있는 작가로 존경(?)받게 된다면 내 흔적을 찾는 문학도들은 어디에서 내 흔적을 찾을꼬 (그런 일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4

  가난과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리라 결정했으며, 국민학교 때는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곤 했었는데 나 때문에 덕수국민학교는 3연패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아 영원히 우승기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때 백일장의 작문   제목은 <오늘 아침>이었다. 나는 학교 오는 길에 쥐를 밟았는데 그 쥐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레기통으로 도망가며 나를 노려보더라는 실존주의적 작문을 썼었다. 그것은 물론 낙방이 되었다. 그때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 최정희 선생님이었다. "누나, 글 쓰는 사람 중에 구찌베니(립스틱) 빨갛게 칠한 사람이 누구냐?"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19581월쯤의 일일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문화란에 <어린이 차지>라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의 동시나 동요 같은 것을 실어 주는 작문교실이 있었다. 뽑힌 동요가 실리면 그 뒤에 짤막한 담당 기자의 작품평까지 실렸는데 당시 국민학교 다니는 꼬마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고정란이었다.  그 무렵 내 짝으로는 아버지가 동아일보에 다니던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 아버지가 바로 그 <어린이 차지>란 작문교실을 담당하고 있으니 내가 동요 하나 지어 자기에게 주면 아버지에게 보여서 신문에 실려 주겠다는 것이었다.그래서 나는 수업시간에 다음과 같은 동요를 지었다.  <화롯가>

오손도손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우락부락 험상굳은 우리 형님손

매끈하고 백설같은 우리 누나손

장난쟁이 동생손은 까만 손이요

올망종망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놀다말고 한몫 끼운 동생 손이랑

험상궂고 보기싫은 손님 것까지

모두모두 모여있네 옹기 종기 화롯가

    완성된 동요를 그 친구에게 넘겨 주고 나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뒤 바로 그 <어린이 차지>에 내가 지은 동요가 실려 나온 것이다. 아마도 동아일보 축쇄판을 뒤지면 6학년 3반 최인호라고 내 이름이 분명히 명기된 동요가 신문에 실려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동시는 내가 태어나서 활자로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썼으며 제법 유명한 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에 단편소설 하나씩 썼을 정도이다. 그때 선생님은 멋쟁이들이어서 영어 시험에 유행가 가사만 써도 60점을 주곤 했었다.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너희들이 지금은 내가 가끔 빵을 얻어 먹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이담에 너희들은 내가 네 옆자리에 앉았었다는 것만을 두고두고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나는 정신병적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였다.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에 <벽구멍으로>란 단편소설이 입선되었을 때도 나를 작가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심사위원은 황순원 선생님과 안수길 선생님이었는데 막상 시상식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나타나자 '속았구나'하는 표정이었다.  상금은 당선작이 1만원이었고 가작은 33백원이었다. 그때 한국일보 문화부엔 손기상 씨가 문화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한심해서 담배만 푹푹 피워대셨다.한국일보는 창피했던지 이 작품을 신문에 게재하지 않았다.내용은 어린 소년의 도벽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3학년 말, 나는 눈썹을 밀고 공부에 매어달렸다. 담임 선생임이 내게 어느 대학을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서울대학교 영문과 하고 대답하자, 니가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악담을 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대학 미학과(당시만 해도 미학과는 인기가 없었다)가 아니면 고고인류학과에 가겠습니다 라고 주장했더니 선생님은 대뜸 내게 D대학 국문학과에 가라고 억지를 부렸다. 난 그렇다면 연세대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합격시켜 준다고 해도(누가 날 공짜로 합격이라도 시켜 준다고 했던가) 난 안 가겠습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교 때엔 가장 이상주의자, 졸업 후엔 가장 머리가 좋은 적응주의자 아니면 불평주의자들의 집단입니다라고도 했다.   서울대를 나온 담임 선생님은 대로해서 나를 미친 놈 취급을 했었는데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서울대학교 출신들은 공연히 흥분할 필요 없다. 다만 내겐 머리 좋은 형이 있었고 그는 내게 언제나 모범을 보이는 맏아들적 기풍이 충만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서울대 학생이었으므로 나는 되지 못하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연세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영문과에 입학했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글쟁이를 지망하는 놈들이면 으레 국문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꼬와서 그런 것이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낙제를 했기 때문에 1학년을 두 번이나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기보다는 언제나 시네마코리아 극장에서 동시상영 영화나 보았으며 미친 듯이 글만 쓰고 있었다.  결국, 1965년도에는 <뭘 잃으신 것이 없습니까?>란 단편소설을 조선일보에 응모하고는 나는 틀림없이 당선하리라는 과대망상에 빠져 친구들을 불러다 미리 자축파티를 열기도 했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일보에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던 신홍범 씨를 그분의 사촌인 내 친구녀석과 함께 찾아가 내 소설이 틀림없이 우편으로 응모되었는가를 확인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결과는 보기좋게 낙선이었다.  울화통이 된 나는 1966년 한 해 동안을 신춘문예 당선의 해로 정하고 수십 편의 단편을 썼었다. <순례자> <술꾼> <모범동화> <견습환자> <전쟁우화> <예행연습> <전람회의 그림> <처세술의 개론> 등 수많은 단편을 썼으며, 나는 그 모든 단편들을 전 신문사에 투고하라고 내 동생 영호에게 명령을 내려놓고는 그해 11월 군에 입대하여 버렸었다. 나는 최소한 서너 군데의 신문사에서 한꺼번에 당선 통지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너 개의 당선소감까지 미리 써두고 입대를 하였던 것이다.그런데 당선된 작품은 오직 한편, 조선일보의 <견습환자>뿐이었다.
  1224일 밤.  우리는 눈이 내린 연병장에서 벌거벗고 기합을 받고 있었다. 알철모를 쓰고 기합을 받고 있었는데 싸락눈이 내 등에 송곳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정한 손길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밤 열차가 역마처럼 울며 달리고 있었다.

돌연 구대장이 연단에 서더니

"오늘의 기합은 이만 중지! 그 이유는 훈련병 중에 한 사람이 고등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다."라는 해괴망측한 해석을 붙이는 것이었다.나는 벌거벗은 채 구대장에게 이끌려 디젤 기름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교 숙소에서 한 장의 전보를 받았다. '당선 축하. 조선일보.'나는 이것 한 장뿐이냐고 물었다. 구대장은 나를 언짢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전보가 어째서 한 장뿐이야고 물었다."이 친구 전보를 무슨 주택복권으로 아네."그들은 웃었다.  어쨌거나 나 때문에 기합을 덜 받은 동료들은 내게 몰래 빵도 주고 사탕도 주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의 머리가 다들 돌대가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땅히 내 것을 모두들 당선시켰어야 했다고 나는 차디찬 담요 속으로 기어들며 중얼거렸다.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나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무슨 슬픈 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흔들어서 깨고 보니 옆자리에 누웠던 같은 훈련병이었다."꿈을 꾼 게로군."  무슨 대학원에 다니다 입대한 얼빠진 녀석이었다. 그는 구보도 못하고 우향 우 좌향 좌도 제대로 못하는, 이른바 고문관 녀석이었다. 녀석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단체 기합을 받곤 했었다. 녀석은 언제나 미원을 한봉지 가지고 다니며 콩나물국 속에 넣어 먹곤 했지만 주위 동료들에게는 조금도 나눠주지 않던 녀석이었다. 바늘에 실 하나 꿰지 못하는 주제에 밤마다 몸을 위한다고 종합 비타민만 먹으며 갓 결혼한 신부가 보고 싶어 질질 짜던 녀석이었다,  나는 가끔 그의 사물함을 정돈해 주었으며 그가 우리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녀석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연민의 정을 갖고 있어서 구보 같을 때엔 대신 총도 메어 주곤 했는데, 녀석은 그래도 미원 한줌 선심 쓰는 일이 없던 녀석이었다."니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내 눈엔 눈물이 홍건히 괴어 있었다."네 당선을 축하한다. 넌 이제 작가가 되었구나. 작가, 얼마나 좋겠니. 담배 하나 줄까."나는 녀석이 주는 담배 한 가치를 받아들고 밤의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은 눈의 꽃밭이었다. 발자국도 없어서 순백의 처녀림이었다. 그것은 내가 써야 할 원고지의 무수한 공백들처럼 보였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눈을 부릅뜨고 눈부신 백야의 연병장을 노려보았다.  나는 쓸 것이다. 저 눈 쌓인 마당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내 이름을 쓰고, 내가 보고 듣고 그리고 앞으로 닥쳐야 할 미래의 이야기들을. 그러나 잊지 마라. 네가 쓸 글이 영원히 그곳에 존재하기를 원해서는 안 돼. 네가 쓴 기록을 보라, 또다시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눈발에 의해서 비워지고 묻혀지나니. 덧없는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와 나뭇가지에 묻어 있는 아주 작은 잔설 하나를 흔즐어 뼈에 붙어 있는 살 한 점 뜯어 내듯, 네가 선 자리에 덧없이 떨어져 네 죽은 뒤에 이루는 비문처럼 인장을 새기나니, 아아 통곡할지어다. 밤을 새우며 통곡할지어다.  천지신명은 돌아눕고 너는 이제 말의 걸인이 되어 저문 저자의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며, 행여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씩 나눠 주는 말을 동냥해서 이 더럽고 저속한 시대, 남루한 식탁 위에 필요한 양식으로 내놓으리니. 아흐, 굽어 살피소서 굽어 살피소서. 나날의 성찬에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비럭질할 수 있도록 정승대감은 굽어 살피소서. 얼씨구 얼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절씨구 들어간다. 붐빠 붐빠 들어간다. 붐빠붐빠 들어간다. 얼씨구 씨구 씨구 씨구 들어간다. 

 

 5

  이로써 나는 정식으로 작가로 데뷔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제대하는 1970년도까지 나는 단 한 장의 원고청탁서도 받은 적이 없었다. 내 딴에는 주옥(?)같은 단편이 십여 편 비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고청탁서가 오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군대에 있는 3년 반 동안 나는 오직 <사행>이라는 단편소설 하나만을 섰을 뿐이였다.  19702, 제대하자마자 나는 초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군대에서 제대하고 영문과에 다시 복학을 하였지만 그 무렵 아내 황정숙과 심각한 연애를 걸고 있었으며 곧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도 작가는 원고를 써서 먹고 살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색이 작가인데, 그래도 <현대문학> 같은 데서 나오는 작가의 주소록에는 내 이름이 꼬박꼬박 기재되어 있는데 어째서 그 누구에게서도 원고청탁을 받지 못할까 하고 나는 조바심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 해 3월인가 4, 나는 대낮에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물어 물어서 당시 효제동에 있던 <현대문학사>를 찾아 갔었다. 그때 내가 만난 사람이 소설가 김국태 씨였다. 내가 술 취한 뻘건 얼굴로 찾아가 불쑥 원고를 내어밀자 그는 내게 물었다."이게 무엇입니까?""소설 원고 입니다.""실례지만 누구신데요?"그러자 나는 신병처럼 큰 소리로 고함질렀다."나는 작가요. 나는 소설가요. 내 이름은 최인호입니다.""놓고 가시오."  그 당시만 해도 <현대문학>에 원고가 실리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기였다. 다달이 원고가 밀려서 서너 달 뒤에 나와도 그 사람은 그만큼 행운아였던 것이다. 원고를 주고 와서도 나는 기대를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은사이신 황순원 선생님이 내가 제발로 찾아가 <현대문학사>에서 해프닝을 벌였다는 소문을 그분의 막내아들인 황진규 군(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생이며 내 절친한 친구였다)을 통해서 들으셨는지 선생임이 뭐라고 한마디 해주셔서 두 달만에 <술꾼>이라는 단편이 드디어 <현대문학>에 실리게 된 것이었다.나는 그 <술꾼>이 실린 <현대문학>을 신촌의 한 서점에서 확인하면서 홀로 눈물을 흘렸었다. 나는 <술꾼>이라는 작품이 곧바로 문단의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만큼 나는 그 작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당시의 문단으로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독특한 작품이라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음호의 <현대문학>에 김교선이란 평론가가 매우 호의적인 평을 월평란에 써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도 않게 엉뚱하게 주목을 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 김승옥 씨였다. 그는 <술꾼>을 읽고 놀라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보는 사람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선전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점 나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숭옥 형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호철 씨도 뒤에 <술꾼>을 읽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인정을 하였으면서도 이 작가가 다음에 쓰는 작품을 다시 읽어보아야만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일단 유보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술꾼>이 큰 반응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삼사 개월 후의 일이었다. 당시 김병익, 김치수, 김현, 김주연 소위 4K로 불리는 네 젊은 평론가가 <문학과 지성>이란 계간지를 창간하기 앞서 창간호에 <술꾼>을 재수록한 것이었다. 소설가 김승옥 씨가 서울대학 문리대 동문이면서도 고향 친구였던 김치수 씨에게 귀띔을 해서 <술꾼>이 재수록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문학과 지성>에서는 문단에서 호평을 받는 문제작들을 재수록 하는 독특한 편집 형식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론가 김치수 씨가 만나자는 연락을 하였다. 청진동 어느 골목 다방에서 만났더니 '당신의 작품이 좋으니 재수록 하겠다. 물론 재수록 원고료는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명면지의 문단인들을 차례차례 알게 되고, 그들과 간첩처럼 접선하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나로서는 놀라운 행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문단 진입은 시작되었다. 당시 <현대문학>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월간문학>을 찾아가 이문구씨를 알게 되었으며 그 잡지에 <모범동화>를 싣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써둔 작품이 십여 편 있었으니 그 어디서든 원고청탁이 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무렵 김현 씨와 김치수 씨가 나를 찾아와 최 형이 써둔 원고량이 많이 있다는데 내일 아침 작품을 줄 수 있겠냐고 묻길래 나느 선뜻 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내게는 <미개인>이란 중편이 있었지만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었으므로 잘하면 하룻밤 사이에 그 작품을 완성해서 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막상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읽어 보니 완성시키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었다.하는 수 없이 신작을 쓰기로 하고 밤새워 쓴 작품이 <타인의 방>이었다. 당시 나는 아내와 신혼으로 북아현동 한성고등학교 앞에 있는 복수목욕탕 이층집에서 방 하나를 전세 들여서 살고 있었는데, 고이 잠든 아내 옆에서 꼬박 새우며 원고를 다 쓰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이때의 생활을 제법 유머러스하게 적은 꽁트가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그와 그의 아내가 결혼하고 나서 제일 먼저 얻은 방은 십오만 원짜리 전셋방이었다.   그가 그의 집 식구들에게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습니다 하고 선언하였을 때 그의 집에서는 놀라고 펄쩍 뛰었다. 이 녀석아, 글세 결혼이라는 게 불알 두 쪽 가지고 되는 것인 줄 아느냐, 사는 게 그리 쉬운 것인 줄 아느냐 하고 공갈 협박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꼭 결혼식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집에서 미친 척하고 이십만 원만 꾸어 주쇼. 나중에 갚아 드리겠쉬다 하고 아랫방에 전세 들여 이십만 원을 갈취하였다.  이리하여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군대 제대하고 복교한 소설가 지망생인 그와 나이는 동갑내기로 이미 몸도 마음도 그 알량한 소설가 지망생에게 불법침입 당해 이제 아무리 생처녀 행세를 한다 해도 팔릴 것 같지 않는 노처녀인 야인은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제일 싸구려 청첩장을 돌리고 싸구려 돗대기 시장 같은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애인은 그래도 신랑에게 선물이라고 제일모직 신사복 한 벌을 해주었고 신랑은 아내에게 싸구려 루비 반지 하나 해주었다.  그리고 결혼했는데 신혼여행을 안 갈 수 없어서 워커힐인가 스카치힐인가 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잤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호텔 안에서 피가 나도록 뽀뽀만 하고, 뽀뽀만 했다.그래도 친구랍시고 백 원, 오백 원 코묻은 돈 가져다 준 부조금을 합쳐 보니 식장비와 신혼여행비 정도 되고도 한 이만 원 남아 우선 한달은 먹고 살수 있겠다고 환호자약하였다. 그리고 입주한 곳이 바로 그 문제의 방인데, 이 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사의 방이 아니라 도깨비 방이라는 말씀이다.  남의 집 전세로 드나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빨래 하나 하려 해도 눈치 봐야 하고, 변소에서 소변 보려 해도 눈총 받는 판이어서 명색이 대학 출신 부부는 문화인답게 십오만 원 정도로 남의 눈치 안 보고 배짱 편하게 살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을까 전전긍긍하다가 구한 것이 바로 그 방이었다. 이 방은 남의 집 문간방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파트와 같다. 십오만 원짜리 아파트라 하면 놀라 자빠지시겠지만 무언가 하면 여관 이층방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 여자 좋아하고 오입깨나 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가는 소위 독탕이라는 곳인데, 들어가면 공중전화통 같은 목욕탕이 있고 목욕탕 앞에 침대가 놓여 있는 5평짜리 방이라는 말이다.   맨 아래층은 대중탕이어서 남탕 여탕이 분리되어 있고, 이층 삼층은 오입장이들이 드나들고 창부 서넛 대기시켰다가 그 방에 들여보내는 말하자면 일종의 창녀집인데 목하 성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날조 아파트로 변하게 된 것은 그 목욕탕 부근에 고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들이 교육의 전당 부근에 창녀집이 웬말이냐 비분강개해서 진정한 것이 주효해서, 배부른 목욕탕 주인이 궁여지책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전세 아파트(?)인 것이다.그는 그 아파트 이층에서 생활하였다. 그래도 문화인답게 스팀이 들어오고 더운 물 찬 물 틀면 나와서 그는 목욕 따위는 배포 유하게 하루에도 서너 번 해야 직성이 풀리곤 하였다.  그러나 말이 방이지 급조한 방이다. 옆집의 숨소리까지 다 들려 오고 밑바닥은 콘크리트라 별 수 없이 서대문 로타리에서 유도 도장에나 쓰는 싸구려 밀짚을 사다가 밑에 깔고 그야말로 초가삼간 외양간 같은 기분을 내고, 눈만 뜨면 그 방에서 이젠 결혼도 했으니 안심하고 합법적인 뽀뽀만 하였다.  그 부부가 사는 방은 여탕 이층이라 물 끼얹는 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왜 여탕에선 애 우는 소리가 그리 극성스러운지 나는 모르겠다), 여기 더운 물 더 주세요 어쩌구 하는 소리가 선연히 들려 와서, 이를테면 그는 희멀겋게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의 엉덩이 밑에 깔고 사는 주지 욕정의 의자왕쯤 되는 기분이어서, 에라 콘크리트 벽을 뚫어 심심풀이 여체 감상이나 할까 어쩔까 궁리하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 집에 입주하게 되고 아침 저녁 여관, 목욕탕이라고 푯말 붙은 그 아파트를 자주 오가게 되자 하루는 여관 앞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이발소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여보 젊은이, 나도 여자 좋아하지만 젊은 몸 생각하셔야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그 목욕탕 드나드는 모양인데 몸 생각해야지. 힛히히....."하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서 그냥 있었지만 내심 이 무지몽매한 자식아, 오입이라면 니놈이나 할 것이지 왜 애꿎은 나를 들먹이냐 하고 투덜대었다.그 이후부터는 집 앞을 드나들 땐 주위를 휘둘러 보고, 아내가 시장 갈 때는 그 망할 놈의 이발관 주인이 아내를 마치 목욕탕에 전속된, 새로 온 제법 예쁜 색골 창녀쯤으로 볼 것이 아닌가 우려되어 꽁꽁 앓았던 것이다.


  이 목욕탕 이층집에서 나는 701월부터 7년 봄까지 살았다. 아마 그때가 1971년 봄이라고 기억되는데 그 무렵 한꺼번에 <현대문학><월간문학>, 그리고 <문학과 지성>에 내 작품이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문단에서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신예작가가 한 명 탄생했다고 야단들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계간지 <창작과 비평사>과의 관계에 대하여 밝혀야 할 사연이 있다. 당시 <창작과 비평>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문학과 지성>의 창간도 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이 될 정도였다. <창작과 비평>은 방영웅 씨의 <분례기>가 연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 역시 <창작과 비평>에도 내 소설을 싣고 싶었으나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자였던 염무웅 씨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었다.  수송동 어느 일층 다방에서 만났느데 그는 내게 작품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중편이 하나 있다고 대답한 후 곧 <미개인>을 완성해서 며칠 후 그를 다시 만나 작품을 주었는데 다음호에도 또 다음호에도 내 작품은 실리지 않았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내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연락을 한 후 물었더니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작품의 주제가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저항의식이 없으니 뒷부분을 강하게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주인공이 두들겨 맞고 끝나는 것은 지나친 패배의식이니 이를 좀더 강하게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염무웅 씨의 그런 주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창작과 비평>은 소위 참여문학을 주장하고 있었고, <문학과 지성>은 순수문학을 주장하고 있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을 평론가가 감히 이리 고쳐라 저리 고쳐라 하고 주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입으로 말해버렸다. 젊은 작가가 그런 말을 하는데 그로서는 놀라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당장 그 작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그는 두말없이 <창작과 비평>의 편집실로 돌아가 원고를 가져와서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때 염무용 씨가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은 <미개인>이란 작품의 주제가 약해서라기보다는 이미 내가 <문학과 지성>을 통해서 신예작가로 각광받고 있는 실황에서 새삼스럽게 내 작품을 다시 <창작과 비평>에 실음으로써 한 신인작가에게 양대 문학 계간지가 모두 문을 개방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이러한 문학 정신들이 약화되었는지 오히려 그 당시의 치열했던 문단의 상황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나는 그 원고를 주머니에 찌르고 수송동 골목을 걸어나오며 절대로 절대로 <창작과 비평>에는 앞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창작과 비평>에서는 작가 황석영을, <문학과 지성>에서는 나를 마치 차세대의 선두주자인 것처럼 밀고 후원하는 보이지 않는 문단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72년 봄. 나는 눈부신 1971년의 활력으로 <현대문학>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작가가 문학상을 받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금이 이십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것과 전세금 십오만 원을 합쳐서 나는 연희동에 있는 새마을 아파트 3404, 방 두 칸의 열세 평 아파트를 '삼십오만 원'에 전세로 얻을 수 있었다.  이 아파트에는 한때 내 소개로 시인 고은 씨도 한 일 년 간 살다 갔고 소설가 최인훈 씨도 한 육 개월 살다가 떠났던 유서 깊은 아파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아파트를 잊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별들의 고향>의 작품 무대가 바로 이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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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의 한여름 나는 그때 빌빌 놀고 있던 영화감독 이장호 군과 청주에 있는 조그마한 여승 절인 화장사란 곳에서 한여름을 머무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장호 군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 것 같다. 만약 신문 연재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을 쓰겠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소설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버리는 도시가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이장호 군은 조감독으로 백수건달이었는데 내 말을 듣더니 당장에 눈빛을 밝히며 이렇게 말하였다."그 소설은 내가 영화화하자. 약속해 임마. 그 소설은 내 거야."2년 뒤에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장호 군은 자기를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혈서를 쓰는 공갈협박 끝에 내게서 소설을 공짜로 빼앗아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관객 50만명을 동원하는 신기록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만 해도 신문에 연재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의 바람이었을 뿐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리 만무한 황당무계한 소망이었다.  당시 신문소설은 50년대 작가들의 독무대였다. 역사소설은 으레 박종화, 유주현 씨의 차지였으며 현대소설은 40대 이상인 50년대 작가들이 대부분 쓰고 있었다. 손창섭 씨의 <부부>, 이호철 씨의 <서울은 만원이다>가 인기를 끌었으며 60년대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청준 씨가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다가 도중 하차한 뒤로는 젊은 작가들에게 신문 연재를 맡기는 것을 위험한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신문사의 편집진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가까운 시일 안에 연재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이 막연한 예감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은 1972년도 조선일보에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던 황순원, 박영준 두 선생님에 의해서였다.  두 선생님에게 당시 문화부장이었던 유경환 씨가 신문소설에 새 바람을 넣고 싶은데 추천할만한 젊은 작가가 있느냐고 묻자 두 분이 한결같이 내 이름을 거론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유경환 씨는 나를 불렀다. 그때가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손장순 씨가 쓰는 <세화의 선>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을 무렵이었다. 유경환 씨는 내게 신문의 연재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었다.  1년 전부터 느끼던 왠지 가까운 시일 내에 신문 연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같은 것이 드디어 신 내린 무당의 쪽집게 점괘처럼 들어맞게 되었으니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있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자 유경환씨는 내게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했었다.그날 그때부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버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신문 연재를 하게 됐다. 신문연재야말로 작가가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작가들은 이 귀중한 지면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어째서 독자가 없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일까. 독자가 없다니. 신문을 보는 사람이면 모두가 독자이지 않겠는가. 그들에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줘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장이 새로워야한다. 문장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공하고 싶다.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기억되는 문학 작품이 없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소냐가 나오고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는 카츄샤가 나온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에서는 올렌까가 나오며 토마스 하디의 소설에는 테스가 있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 이름을 모든 사람들이 오랜 동안 기억하도록 만들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보다 살아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한 번쯤 깃들었다 스러지는, 누구나의 호주머니에 한 번쯤은 소유했다 버려지는 그런 여인, 특별한 지식과 특별한 재능을 지닌 여인이 아니라 마치 체호프의 소설에 나오는 올렌까처럼 보통 여인,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누구나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두 개의 원칙. 하나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하루하루의 신문을 통해서 철저히 느끼도록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이 새롭고 독특해야 할 것이며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서 연재소설의 호흡을 조절할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생명력에 의해서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기억되어 마치 자신의 첫사랑처럼 친근하게 느껴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기억되어질 것을 염두에 둘 것.이 두 개의 원칙이 <별들의 고향>을 쓰는 내 작품 의도였다.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현대 시인들의 시를 삽입해 보자는 것이 내 개인적인 의도였다. 당시 소설은 물론이고 ''는 아예 읽히지도 않는 문학의 장르였다.   소설의 중간에 그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시를 삽입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시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내 계산이었는데 후일담이지만 이 계획은 독자들에게 의해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   강은교, 박성룡, 마종기, 유경환 등 수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소설의 중요한 장면에 접목되었는데 독자들은 이런 처음보는 형식을 반겨하였으며 신문소설을 통해서 현대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호응을 해왔던 것이었다. 특히 강은교 씨의 시는 그 당시 하나의 유행이 될 정도로 독자들의 입에 즐겨 희자되곤 하였었다.   연재한 지 며칠 뒤 유경환 씨가 나를 다시 불렀다. 긴장해서 달려갔는데 유경환 씨는 나를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신동호 씨에게 데리고 가 인사를 시켰다. 신동호씨는 내 고등학교 까마득한 선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 사실을 미리 밝혀 나를 잘 봐달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신동호 씨는 간밤에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는지 도서실의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유경환 씨와 찾아간 나를 보더니 대뜸 소리쳐 말하였다."뭐야, 당신이 작가야. 우하핫, 당신이 신문소설을 쓸 수 있다구."하고 대뜸 웃기부터 하길래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최씨에 옥니에 곱슬머리입니다. 뒷날 저에게 그런 말 하신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었고 더구나 동안이었으므로 아마도 그 분의 눈에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처럼 비쳐 보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를 믿을 수 없었는지 신동호 씨는 일주일 안으로 앞으로 쓸 연재소설을 대충 줄거리를 써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작가로서는 차마 참을 수 없는 수모였지만 이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심사숙고하며 연재소설의 줄거리를 원고지에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줄거리를 미리 쓰라는 요구는 작가인 나에게는 부당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줄거리를 미리 쓰는 작업을 통해 보다 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해졌으며 소설의 맥도 확실해졌으며 소설의 골격이 짜여질 수 있었던 장점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줄거리의 내용대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면 이 소설은 에밀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의 유형의 자연주의적 작품의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적 성과를 얻는 대신 그만큼 재미는 반감되었을지 모른다. 흥미있는 것은 미리 쓴 줄거리에는 주인공의 이름 '경아''조승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조승혜에서 경아로 바뀌어진 것은 연재가 시작할 무렵이었으며 그것은 당시 가수 이장희 군에게 써주었던 토크 송의 가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등학교 후배인 이장희 군은 당시 히트곡이 없던 무명 가수였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노래 가삿말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때 나는 오래 전 내가 습작으로 썼었던 소설의 한 부분을 써주었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제 연인의 이름은 경아였습니다. 나는 경아가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경아를 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뒷날 이장희 군에게 심심풀이로 <그건 너> <한잔의 추억>과 같은 노래의 가삿말을 써주었던 나는 내가 써준 이 낙서와 같은 가삿말이 이장희 군에 의해서 낭독되어 소위 토크 송이라는 형식을 출반하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었다.  그 당시에 짐 리브스라는 저음의 외국 가수가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를 낭송하여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아마도 거기에서 힌트를 얻은 이장희 군이 이른바 토크 송의 형식으로 내가 써준 가삿말을 낭송하였던 모양이었다. 이장희 군은 이것을 <겨울 이야기>라는 제목의 레코드로 출반하였으며 이것이 의외로 큰 히트를 했었다.  노승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아라는 이름을 택한 것은 히트된 토크 송에서 그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다. 사실 노승혜라는 이름보다는 경아라는 이름이 더욱 귀엽고 평범하며 보편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제목도 고쳐졌다. 내가 현재 대우자동차 판매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형님 최정호 사장과 고심 끝에 작명한 원래 이름은 <별들의 무덤>이었다. 이 제목을 신문사에 가지고 갔더니 신동호 편집국장이 말하였다."조간신문에 무덤이라니 재수 없게, 다른 이름으로 고쳐 봅시다."  신동호 편집국장과 당시 편집국의 간부진이었던 이종식씨, 조영서 씨와 나 네 명이서 즉석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그 회의에서 결정된 제목이 <별들의 고향>이었다. 연재의 삽화는 김영덕 씨가 맡았으며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작가의 말을 사고에 썼었다.    '큰 욕심은 부려 보지 않겠다. 나이가 젊다고 객기를 부려보지도 않겠다. 신문소설이 작가에게 주는 영향은 대부분 마이너스라는 소리도 수십 번 들었다. 그래서 솔직히 겁이 난다. 그러나 최소한도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사건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써보겠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소설 속에 흔히 나타나는 우연적 사건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 우연적인 사건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연적 사건은 될 수 있는 한 피해 볼 작정이다. 예쁘고 착한 여자를 그려볼 작정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남자상들은 대부분 비열하고 잔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선한 사람들이다.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악인을 그려내 보일 재주가 없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흔히 만날 수 있는 여인의 얘기가 독자들의 구미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나는 모르겠다. 또 약간은 환상적인 여자의 얘기가 어떤 반감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보이겠다. 매일 아침 신문에서 만나볼 독자 여러분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린다.'    김영덕 씨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화자인 나를 그릴 때 그 남자의 얼굴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자 고심 끝에 내 실제 모습을 모델로 해서 삽화를 그렸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신문 연재 동안에 김영덕 씨가 그렸던 남자 주인공인 ''의 모습은 얼굴이 길고 마른 당시의 내 모습과 쌍둥이 처럼 닮아 있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 보면 경아의 모습을 나는 키가 155cm 가슴둘레는 78cm 몸무게는 44Kg 가량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어깨 뒤에 큰 점이 하나 있으며 남보다 작은 키를 감추려고 삼승용 하이힐을 신고 다니고, 짝짝이 눈꺼풀을 갖고 있으며, 알 벤 게처럼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연재 도중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실제로 경아와 같은 여인과 연애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었는데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지만 경아의 모습은 당시 아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아의 키는 아내의 키였으며 경아의 몸무게는 아내의 몸무게였다. 어깨 뒤에 큰 점이 하나 있다는 경아의 신체적 묘사도 실제로 아내를 묘사한 것이었다. 경아가 첫 번째 남자인 영석이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데 그중의 많은 묘사는 실지로 아내와 내가 연애시절에 겪었던 경험을 소설로 옮겨 놓은 것이다.  소설이 연재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반응이 일기 사작하였다. 경아가 첫사랑에게 배신 당하고 아이를 지우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마도 낙태수술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는 것은 <별들의 고향>이 처음인 듯 싶은데 이때부터 소설과 국산영화에 걸핏하면 낙태수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여자 심리를 잘 안다고 해서 작가 최인호가 여자가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져 들려오고 도대체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몇 살이냐, 산전수전 다 겪은 쉰 살이냐, 뭐라구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라구? 아니 그렇게 젊은 청년이 어떻게 여성의 심리를 그처럼 잘 알아? 그러더니 갑자기 전국의 술집 여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경아로 바꾸는 유행이 일기 시작하였다. 남자들은 경아가 불쌍하다고 해서 저녁마다 술을 마셨으며, 어느 날 연극 연출가 허규 씨를 만났더니 경아가 너무 불쌍해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셨는데 경아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지 말고 행복한 시나리오를 만드시오 하고 내게 협박을 할 정도였다.  나는 소설을 연재하는 동안 줄곧 공책에 한 번 쓴 다음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옮겨 정서를 하는 이중 작업을 했었다. 지금까지 삼십 년 동안 작가생활을 하면서 두 번 이상 정서하는 중복작업을 했던 것은 <별들의 고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인기에도 소설을 출판하자는 출판사는 없었다. 그 당시 신문의 연재소설은 출판되어도 잘 팔리지 않는다는 징크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하루는 뚱뚱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별들의 고향>을 출판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예문관이라는 출판사의 최해운 사장이었으며 그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매일 아침 이 소설을 읽었다면서 자기가 이 소설을 출판하고 싶은데 내 의견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내가 좋다고 했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오만 원의 계약금을 꺼냈다. 그리고 계약조건을 말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즉 앞으로 7년 동안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은 절대로 다른 출판사에서는 출간될 수 없으며 오직 예문관에서만 낼 수 있다는 독점 계약의 조건이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삼류무협소설에서 본 구절을 기억해낸 나는 그에게 몸을 기탁하기로 하였다. 그와 맺은 7년 간의 독점계약에다가 3년을 더 보태어 정확히 10년 간 나는 예문관 한곳에서만 40여 권의 책을 출간했었다. 정확히 10년을 채우고 나는 예문관을 떠났다.
  최해운 씨는 단행본으로 신문에 전 5단 광고를 한 첫출판인이었으며 그는 당시에는 금기시되어 있던 작가의 얼굴을 책표지에 내보인 최초의 출판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사진작가를 불러다가 나를 길거리에 세우더니 정신없이 표지사진을 찍었다.  웃으세요, 웃으세요, 하는 사진 작가의 명령에 따라 평생 처음 나는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아마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찍은 최초의 웃음 띤 사진인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이후부터 책에 실리는 사진이건 신문광고에 나오는 사진이건 내 얼굴은 치약 거품을 물고 있는 것처럼 활짝 웃고 있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1년 후 314회로 연재가 끝나자 반응은 대단하였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별들의 고향>을 다루고 있었다.    '<별들의 고향>의 작가 자신은 이 소설을 성인 동화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지만 <별들의 고향>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다루면서, 그것을 마치 환상을 다루는 것처럼 처리한데서 독자들을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끌고 가는 장점이 있다.   김주연 씨 등 문학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어떤 유형의 인간들에게 대입시켜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서 다른 작품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포용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별들의 고향>에 갈채를 보내는 오늘의 젊은 세대는 전투적인 참여파나 퇴폐적인 반문화의 신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소시민적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별들의 고향> 연재가 끝나자 신 편집국장도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미안하네."  그때가 70년대. 웃지 않는 독재자 박정희 씨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철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 나는 대통령 다음으로 신문에 사진이 많이 실리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곧 내가 우려하였던 대로 <별들의 고향>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당시의 유신 상황으로 보았을 때 문학은 마땅히 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사명감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여 문학인들과 대학생들은 <별들의 고향>의 출판적 성공과 영화의 놀라운 성공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별들의 고향>의 신드롬 현상은 사회의 비판의식을 갉아먹는 무서운 독소라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별들의 고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지식인들은 <별들의 고향>을 호스티스 문학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경아의 직업이 한때 호스티스였을 뿐 소설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호스티스 문학이라는 용어는 참으로 멋지게 붙여진 용어로 융단 폭격하기 알맞은 목표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상업주의 소설이라는 신용어도 등장하였다. 나를 비롯하여 조해일, 조선작, 김주영, 송영, 뒤늦게 나온 한수산, 박범신까지 70년대 작가들을 총 싸잡아서 이들의 작품은 대중소설이며 더럽고 야비한 상업주의의 소산이라고 지탄받기 이른 것이었다.나는 그때 약간의 신경쇠약 증상까지도 느낄 만큼 황송하게도 70년대의 대표 작가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는데, 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것이라 예견되었던 상황이 실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별들의 고향>은 상, 하권 합쳐서 100만 권 가량 팔린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이 책의 인세로 당시 황무지였던 강남 신사동의 땅을 사서 빨간 지붕의 양옥집을 짓자 '최인호 강남에 호화주택을 짓다'하고 서울신문에서는 사회면에 대서특필하기도 했었다. 그 무렵 평론가 김현씨가 나를 불러 어느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하였다."당신은 참 좋은 작가였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작가가 되려 한다. 당신은 우리가 웅호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우리의 입장이 점점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양자 중에 하나를 택일하여 달라"나는 그때 단호하게 말하였다."내게 신경쓰지 마시우 형님.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 내 이름이 부담스러우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제외시키시오."  지금의 얘기지만 그때의 그런 판단이 내게는 참 좋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문단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화가는 화단을 떠나야 하고 하다못해 중도 종단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곳이든, 예술가든 작가든 구도자든 그들이 속해 있는 필드 즉 단은 그들의 정신을 갉아 먹는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혼자여야 하고 문단을 의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단이란 생리적으로 하나의 먹이사슬 형태를 갖고 있기 마련으로 이념과 지방색과 학연과 인연으로 뭉쳐진 하나의 집단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복잡하게 신문과 잡지의 담당 기자들까지 합세하여 마치 조직깡패와도 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자기의 조직원을 키우기 위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문학상을 나눠 먹는 식의 야합은 결국은 작가의 정신을 죽여버린다. 소위 교묘하게 만들어지는 문제작품은 결국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지는 글일 수밖에 없으며 작가의 안목을 눈치와 허위의 함정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문단으로부터 발을 끊어버린 나는 스스로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줄이 끊겨버린 연처럼 나는 바람 부는 대로 떠다녔다. 이십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참여해 본 것은 내게 있어 소중한 경험이다. 이장호 감독과 함께 <별들의 고향>을 만든 이후 <어제 내린 비>를 만들었으며, 돌아가신 하길종 감독과는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2> <병태와 영자> 등을 만들었다. 이경태 감독과는 <도시의 사냥군> <불새>를 만들었으며, 배창호감독과는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곽지균 감독과는 <겨울 나그네>를 만들어 보았다.  만약 내가 김현 형님으로부터 그러한 제의를 받았을 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물론 문단의 보호를 받으며 아마도 대학생들에 의해서 존경받는 작가의 1,2위를 다투는 모범생 작가가 되어 신춘문예의 단골 심사위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내가 내린 선택이야말로 최선이었다고 판단한다. 바다 밑까지 내려가 본 내 지난 과거의 발자취가 이제 나를 산으로 이끌고 있다. '깊게 가려면 바다 밑으로 가고 높게 가려면 산 꼭대기에 가라'라는 선가의 말처럼 나는 이제 산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다.  어쨌든 스스로 문단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그날 이후부터 평론가의 글에서 내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얼마 후 문단에서는 곧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과 윤홍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쉰 살이 넘은 이제야 비로소 나는 젊은 시절에 내가 찾아냈던 여인 경아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죽은 경아. 죽어서 자신의 소원대로 청산 가는 나비가 되어 훨훨훨 나래를 치면서 날아가버린 경아. 경아야말로 지금은 흘러가서 다시는 오지 못할 내 청춘의 젊은 초상인 것이다.  한 번 흘러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먼 강가의 강물처럼. 구멍을 통해 흘러 내려와 오 분이면 정확히 텅 비어버리는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흔적없이 새어버린, 그러나 한때는 분명히 존재하였던 젊은날의 내 모습 그대로였던 경아를 이제야 다시 마주보게 된 것이다.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졸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를 두고 노래한 서정주의 절창처럼, 경아야말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내 젊은 날의 머나먼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내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 되어버렸다. 한 때는 내 자신이었고 내 분신이었고 내 애인이었고 한 때는 내 딸처럼 느껴졌었지만 이제는 누님처럼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경아. 경아 그대에게 바치는 내 뒤늦은 축문이오니, 경아여 이제야말로 헤어질 때가 가까어 왔으니, 잘 가시오 경아. 그리고 안녕.

-끝-


 

 

 

황순원 / 소나기               

 

  



황순원 作 '소나기' 전문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 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
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이제 저쯤 갈밭머리로 소녀가 나타나리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그런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저 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
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내려 다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
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 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몸을
가릴 데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 이 쪽 길에는 갈밭도 없다. 메밀밭이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가 짜릿하게 코를 찌른다고 생각됐다. 미간이 아찔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 피였다.소년은 한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면서 그냥 달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소녀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다리를 오늘은 조심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친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비단조개."
"이름도 참 곱다. "
갈림길에 왔다. 여기서 소녀는 아래편으로 한 삼 마장쯤, 소년은
우대로 한 십 리 가까운 길을 가야 한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벌 끝을 가리켰다.
"없다."
"우리, 가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저래 뵈도 멀다."
"멀면 얼마나 멀기에? 서울 있을 땐 사뭇 먼 데까지 소풍 갔었다."
소녀의 눈이 금세 '바보,바보,' 할 것만 같았다.





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새끼줄을
흔들었다. 참새가 몇 마리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할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재밌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 댄다. 허수아비가 자꾸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었다.저만큼 허수아비가 또 서 있다. 소녀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뒤를 소년도 달렸다. 오늘 같은 날 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소녀의 곁을 스쳐 그냥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가 맴 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돌아다보니, 소녀는 지금 자기가 지나쳐 온 허수아비를
흔들고 있다. 좀 전 허수아비보다 더 우쭐거린다.논이 끝난 곳에 도랑이 하나 있었다. 소녀가
먼저 뛰어 건넜다.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수숫단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원두막."
"여기 참외, 맛있니?"
"그럼, 참외 맛도 좋지만 수박 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 봤으면."





소년이 참외 그루에 심은 무우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밑을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개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소녀도 따라 했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소년이 더 멀리 팽개쳐 버렸다.





산이 가까워졌다.단풍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은 소년이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소녀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 그런데,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를 떠올리며.
다시 소년은 꽃 한 옴큼을 꺾어 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그러나 소녀는
"하나도 버리지 마라."





산마루께로 올라갔다.맞은편 골짜기에 오순도순 초가집이 몇 모여 있었다.누가 말할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
만이 말라가는 풀 냄새를 퍼뜨리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꽃이지?"
적잖이 비탈진 곳에 칡덩굴이 엉키어 꽃을 달고 있었다.
"꼭 등꽃 같네. 서울 우리 학교에 큰 등나무가 있었단다. 저 꽃 을 보니까 등나무 밑에서
놀던 동무들 생각이 난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으로 간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줄기를 잡고 끊기 시작한다.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 칡덩굴을 그러쥐었다.
소년이 놀라 달려갔다.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올리며, 소년은 제가 꺾어다
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생채기 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홱 일어나
저 쪽으로 달려간 다.좀 만에 숨이 차 돌아온 소년은
"이걸 바르면 낫는다."
송진을 생채기에다 문질러 바르고는 그 달음으로 칡덩굴 있는 데로 내려가, 꽃 많이 달린
몇 줄기를 이빨로 끊어 가지고 올라온다. 그리고는,
"저기 송아지가 있다. 그리 가 보자."
누렁송아지였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았다.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 주는 체
훌쩍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 나의 큰 꽃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농부(農夫)하나가 억새풀 사이로 올라왔다.송아지 등에서 뛰어내렸다. 어린 송아지를 타서
허리가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농부는 소녀 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그저 송아지 고삐를 풀어 내면서,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 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런 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소녀의 입술이 파아랗게 질렸다. 어깨를 자꾸 떨었다.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소년이 하는대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안고 온 꽃묶음 속에서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진 송이를 골라
발 밑에 버린다.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더 거기서 비를 그을 수 없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 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 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 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 됐다. 앞에 나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 야만 했다.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소녀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졌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가 뚝 그쳤다. 밖이 멀개졌다.수숫단 속을 벗어 나왔다. 멀지 않은 앞쪽에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붓고 있었다. 도랑 있는 곳까지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소년이 등을 돌려 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개울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 하늘이 언제 그랬는가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그 뒤로 소녀의 모습은 뵈지 않았다. 매일같이 개울가로 달려와 봐도 뵈지 않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살피기도 했다. 남 몰래 5학년 여자 반을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뵈지 않았다.그날도 소년은 주머니 속 흰 조약돌만 만지작거리며 개울가로 나왔다.
그랬더니, 이 쪽 개울둑에 소녀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소년은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그 동안 앓았다." 어쩐지 소녀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 날, 소나기 맞은 탓 아냐?" 소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인제 다 났냐?"
"아직도……."
"그럼, 누워 있어야지."
"하도 갑갑해서 나왔다. ……참, 그 날 재밌었어……. 그런데 그 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본다. 거기에 검붉은 진흙물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소녀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그래 이게 무슨 물 같니?"
소년은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해 냈다. 그 날, 도랑을 건너면서 내가 업힌 일이 있지?그 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갈림길에서 소녀는
"저,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서 대추를 땄다. 낼 제사 지내려고 ……."
대추 한 줌을 내준다. 소년은 주춤한다.
"맛봐라. 우리 증조(曾祖)할아버지가 심었다는데, 아주 달다."
소년은 두 손을 오그려 내밀며,
"참, 알도 굵다!"
"그리고 저, 우리 이번에 제사 지내고 나서 좀 있다. 집을 내주 게 됐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 초시 손자(孫子)가
서울 서 사업에 실패해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난 이사 가는 게 싫어졌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전에 없이, 소녀의 까만 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이 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 낮에 봐 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 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 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 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 다는 생각만이 앞섰다.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더러 병이 좀
낫거들랑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개울가로 나와 달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 같은것, 바보 같은것.





이튿날,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닭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그 말에도 대꾸도 없이, 아버지는 안고 있는 닭의 무게를
겨냥해 보면서,
"이만하면 될까?" 어머니가 망태기를 내주며,
"벌써 며칠째 '걀걀'하고 알 날 자리를 보던데요. 크진 않아도 살은 쪘을 거여요." 소년이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저, 서당골 윤 초시 댁에 가신다. 제삿상에라도 놓으시라고… …."
"그럼, 큰 놈으로 하나 가져가지. 저 얼룩수탉으로……."
이 말에, 아버지는 허허 웃고 나서,
"임마, 그래도 이게 실속이 있다."
소년은 공연히 열적어, 책보를 집어던지고는 외양간으로가, 쇠잔등을 한 번 철썩 갈겼다.
쇠파리라도 잡는 체.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그 날 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 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 버리고, 대 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초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출처:다음 카페-시와 사랑                                                           


 

 

 

 

 

50년 넘는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긴 대시인이 전하는 시의 정수를 가슴속에 아로새기다!

고은 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 세계적 시인 고은이 평생에 걸쳐 쓴 작품들 가운데 240편의 명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이시영, 김승희, 고형렬, 안도현, 박성우 등 다섯 명의 시인이 시기별로 나누어 우선 수록작을 뽑고, 문학평론가 백낙청이 최종 선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공동 작업을 통해 질적, 양적 균형감을 맞추고자 했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왕성한 창작열을 수십 년간 지속해오고 있는 고은 시인의 55년 문학인생을 작품들을 읽으며 천천히 따라가 볼 수 있다. 탐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초기 시들에게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감각적이고 유려한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히말라야 고행을 비롯한 해외에서의 경험을 통해 녹여낸 순례자로서의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저자 고은

1958년 등단한 이래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130여 권의 저서를 간행. 특히 1995년 호주에서 영문 시선집 <아침 이슬(Morning Dew) : 페이퍼 바크 출판사(Paper Bark Press)>이 출간되자마자 매진되었고 그 결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들이 초청되는 시드니작가축제(Sydney Writers' Festival)에 1996년 주빈으로 초대되었다. 시드니작가축제에 참가한 고은 시인은 많은 청중 들 앞에서 한국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경기대학교 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하버드옌칭스쿨 연구교수, 미국 버클리대학교 초빙교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세계 시 아카데미 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시인의 말
『어느 바람』시인의 말
일러두기

제1부
폐결핵
천은사운
심청부
다어
시인(時人)의 마음
초파일날
.
.
(중략)
.
.
길을 물어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밤길
부탁

『어느바람』발문│백낙청
편자 후기
연보
작품 출전
엮은이 소개

 

 

 

세계적인 시인 고은, 55년 문학인생의 결정판!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시대의 대표 시인 고은의 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이 출간되었다. 『마치 잔칫날처럼』은 1933년에 태어나 1958년에 문단에 등장한 이래 올해로 팔순의 나이와 55년의 시력(詩歷)에 이른 고은 시인이 평생에 걸쳐 쓴 작품들 중에서 가려 뽑은 240편의 명시를 수록한 선집이다. 이시영 김승희 고형렬 안도현 박성우 다섯명의 시인이 시기별로 나누어 일차로 수록작을 뽑고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이 최종 선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공동작업을 함으로써 선집의 질적·양적 균형감을 확보하고자 했다.

주지하다시피 고은 시인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인으로 자리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의 시(선)집들은 영미와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을 포함해 약 20여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시인은 그런 위상에 버금가게 수많은 국제문화행사에 초청되어 시낭송 등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간된 단행본만 160여권에 이를 정도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왕성한 창작열을 수십년간 지속해오고 있는데, 그 엄청난 분량 속에서도 각각의 작품집이 늘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거두며, 시인 자신의 시적 갱신 또한 거듭하고 있는 만큼 시인의 문학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선집의 출간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 나아가 고은 시인 자신도 이 시집을 문학인생의 대표선집으로 삼겠다고 한 것처럼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을 모은 정본이라 할 수 있다.

십년 전(2002) 『어느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선집에는 첫 시집 『피안감성』(1960)에서부터 당시의 근작 『두고 온 시』(2002)까지에서 추린 150편의 시가 실려 있었다. 10년 만에 개정·증보된 이번 선집 『마치 잔칫날처럼』은 최초 발표작 「폐결핵」 등 많은 독자에게 친숙한 초기 작품을 비롯하여 『어느 바람』의 정선 대상 시집 속에서 30여편을 추가로 수록했고, 2002년 이후부터 지난해까지 출간된 근작 시집 5권에서 54편을 새로 정선해 수록함으로써 완성도를 높인 새로운 선집으로 탄생했다. 명실상부하게 고은 시인의 시세계를 총망라한 대표 시선집인 것이다. 『백두산』 『만인보』 『머나먼 길』 등의 서사시·장시를 선정대상에서 제외하여 읽는이의 부담을 덜고, 수록작에 대해 시인 자신의 개고(改稿)를 거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지난 시기를 있는 그대로 정리하는 선집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했다.

탐미적·허무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고은 시인의 초기 시들에서는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감각적이고 유려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라 일컬어지는 『만인보』를 완성한 ‘민족시인’ 고은이 지금과는 또 어떤 차별적인 지점에서 시인으로 출발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지드 병(甁) 속에/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뜨락의 목련(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한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신(神)이/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폐결핵」 부분)

이미 「임종(臨終)」 「화신북상(花信北上)」 등 초기 시편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도 하지만, 고은 시인의 시세계는 시인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1970, 80년대를 거치며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역사와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이 시를 통해서도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이후로도 고은 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별 하나 우러러보며 젊자/어둠속에서/내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가슴이자/내 가슴으로/한밤중 몇백광년의 조국이자/아무리 멍든 몸으로 쓰러질지라도/지금 진리에 가장 가까운 건 젊은이다/땅 위의 모든 이들아 젊자 (「조국의 별」 부분)

서해 백령도에서는/바다 건너/중국 산동성 청도 어장에서/고기값 흥정하는 소리를 들어서/바다 건너/한국 인천 연안부두에 전해준다//또한 북한의 남포/남한 인천의 고철값을 알아다가/산동성 주물공단에 전해준다//(…)//태풍이나/태풍에 앞서 몰려오는/바닷속 조기떼를 맞아들여/한번 쉬게 했다가 보내느라 온몸을 벼랑져 세우고 있다/이곳 사랑에는 이별이 많았다 오고 가느라고/아픈 밤이 많았다 (「백령도」 부분)

짧은 단시 중의 명편을 일별해볼 수 있는 것도 이 선집의 큰 재미 중 하나이다. 고은 시인은 때로 굳게 응집된 언어를 통해 선(禪)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시화하는 탁월한 시편을 남겨왔다. 가령 “이 세상에서 모래 한알이 가장 옳다”(「변산」)라거나,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순간의 꽃」 연작 중) 같은 ‘죽비소리’들은 그뒤에 길고 긴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런가 하면 히말라야 고행을 비롯해 해외에서의 경험을 녹여낸 ‘순례자’로서의 시편들은 시인의 시세계가 거느린 시공간적·정신적 영역이 무한에 가깝게 확장된 증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도 5천 미터 황야/아비도/어미도 모르고/오직/나 하나//녹색 전무였다//녹색이란/지난날 내가 본 녹색의 기억이었다//사나운 짐승들아 달려오라/달려와/내 지친 몸뚱어리 물어뜯어라/뜯어먹어라//그 집단 공포와 고통 뒤에/올 평화와/황야는 둘이 아니었다/절망은 절망의 꿀 (「황야」 전문)

가슴을 뜨겁게 하는 시, 이마를 치게 만드는 시, 언어와 철학의 깊이에 압도되는 시들 모두 고은 시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명편들이지만 읽다보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아련한 기억에 젖게 하는 시들 또한 시인은 적지 않게 선보여왔다.

저녁나절은/떨이다 하고/넘기고 나서/또 한접 받아다가/떨이다 하시옵지요/허허허 일흔 여든 이런 할머니한테/잠깐 속아넘어가는 하루도 있어야 하옵지요/그러고 보니 돌아오는 길/무궁화를 부용꽃으로 잘못 본 바/이것도 오랜 무궁화께서/이 미련한 사내 하나 속이신 것이옵지요 (「안성장 할머니 몇분」 전문)

시인은 일흔을 넘긴 이후에도 무려 6권의 시집을 낼 정도로 지금 우리 시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현역 시인으로 최근 10년을 보내왔다. 수십년간 일구어온 자신의 시세계가 가닿아야 할 지향점을 변함없이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간단없는 시적 갱신을 행한 시인의 근작들을 모은 5부는, 지금의 독자들에게 고은이라는 ‘대시인’의 풍모와는 별개로 바로 동시대의 작가로 회자될 만한 뛰어난 감각과 시의성을 갖추고 있다. 1부부터 따라 읽다가 이 5부에 와서, 시인 최초의 ‘사랑 시집’ 『상화 시편』과 시력 50년을 넘은 자신의 시적 본류를 다시금 탐구하는 『내 변방은 어디 갔나』에 이르면 독자들은 세계적인 시인이 온몸으로 살아낸 수십년의 삶과 문학인생을 오롯이 마주하는 듯한 경이로운 감동을 느낄 법하다.

무식한 아버지/묵은밭 어둑어둑 갈던 곳/진리가 마을 안에 있던 곳/내가 잠들면 너도 잠드는 곳/죽은 아저씨 살아 돌아오는 곳/소작료 삼칠제로 뼈 빠져버린 곳/(…)/누가 죽으면 모두 상주인 곳/김씨도 장씨 숙부이고/갑씨도 을씨 사촌이던 곳/사또나리 오시지 않는 곳/커다란 달밤/누군가가 그 달밤에/식칼 갈아 허공 포 뜨며 번뜩이던 곳/의미가 무의미에 고개 숙이는 곳/두고 온 그곳//내 변방은 어디 갔나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부분)

사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긴 대시인의 시세계를 한권의 책으로 감당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잔칫날처럼』은 우리 문학의 독자 모두에게 하나의 기념비와 같은 성과라 할 만하다. 한국현대사의 산증인이자, 우리 시는 물론 세계 시단의 거두인 고은 시인의 명편들을 읽는 시간은 시인의 시를 오래 곁에 둔 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의 정수를 또 한번 가슴속에 아로새기는 계기가, 시인에게 첫 발을 내디뎌 그의 진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이들에게는 우뚝 선 거대한 봉우리에 다가드는 벅찬 순간이 될 것이다.

고은 시인의 말
가야산에서의 첫 시집?앞서서 인쇄 도중 화재로 타버린 첫 시집의 소멸을 이어준 시집?이래 제주도와 제주도 직후의 두 시집, 서울에서의 서너 시집을 지나면 그뒤 안성 30년의 시집들로 내 시의 합산이 된다.
그뒤가 다른 시작이다.

이것의 표제 ‘마치 잔칫날처럼’은 어느 책갈피 속에 박혀 있는 것을 떼어왔다.

이 선집은 누차 오랜 벗과 후배 들의 과분한 은덕으로 가다듬어진 것이다. 허수아비에 비단이겠다.
10년 전 ‘어느 바람’이라는 섣부른 이름이다가 이제 10년간의 무당 푸념들이 무작위 삼아 더해졌다. 창비의 사랑이 또 이것이다.

갇히지 않으려고 버둥치지 않아도 가둔 힘이 운명 안에 고여 있는 자유에 의해 스스로 풀어지면서 시가 기율을 버리거나 기율이 시를 흘끔흘끔 뒤따르거나 하는 해방의 풍모를 그동안 지녀주었다.
시는 밤바다와 달 사이의 요염한 우주 인연을 지우기도 하고 되받아오기도 했다. 나의 시 말이다.
앞으로 어이될지 모르겠는데 이 미혹은 어떤 깨달음도 사절하며 남아 있는 풀더미 속을 들어선다. 안성 시절 다음 수원의 삶이 그것이련다.
언제까지나 귀향의 답은 없다. 도상(途上)일 것이다.

시의 55년을 앞두고 있다.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만난 아도니스가 그의 모국어 아랍어로 ‘Ko Un’의 발음은 ‘존재하다’라는 뜻이라 했다. 장차 내 부재의 어느 날도 존재이기를 누추하게 꿈꾸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로지 현재가 내 꿈의 장소이다.
허나 현재란, 꿈이란 얼마나 천년의 가설인가.



출처 : 만남의광장 중국연변카페
글쓴이 : 쉬는날42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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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어머니 세대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이야기시라서 지난 날 어머니가 살아오신 그리움에 담아왔습니다.

 

스쳐가는 인연은 그냥 보내라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 된다.
옷깃을 한 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 놓으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 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 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출처 : 깊은 산속 옹달샘
글쓴이 : 봉두 총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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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마음을 파고드는 예리함과

우리가 살아가며 깨우쳐야 할 참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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