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을 찾아서⑫] 조문호론 '사람이다'

[오마이뉴스 글:이광수, 편집:김지현]


  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2016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⑫ '조문호론'은 12월 10일부터 12월 20일까지 전시된다. - 기자 말.


  사진가 조문호는 올해 칠순이니 얼추 잡았을 때 인생 40여 년 가까이를 사진판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굴지의 사진 저널의 편집장이나 심사위원 등 웬만한 직함도 몇 가져보기도 했고, 위로는 사진계 1세대와 아래로는 사진계 2세대에 낀 세대의 사진가이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 사람 자체도 무골호인이라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술을 좋아하고, 형식이나 의례를 따지지 않아 그를 좋아하는 사진계 선후배가 들끓는다.

  그런데 그가 40년 가까이 가진 사진에 대한 태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지가 그저 그렇고, 독창성이 어떻고, 그래서 직품이라 하기에는 어쩌고 하는 말을 할 뿐, 그가 사진으로 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이는 없다.

  어떤 인터뷰에서 조문호의 아내이자 동지인 사진가 정영신은 그를 이렇게 말 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포기라는 게 없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믿는다. 정말 어떤 일을 하던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진가... 이 말보다 그를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난, 찾지 못했다.


1. 사진, 실존으로서의 행위

  그는 사진의 생명력은 널리 공유돼 소통되는 데 쓰임새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가다. 자신의 사진이 여러 군데 많이 걸리고, 그 사진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품값을 비싸게 책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높은 가격으로 한두 점만 팔려 돈을 벌 수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좀 더 자주 좀 더 많이 보고 즐겼으면 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진으로 작품을 만들거나, 사진으로 예술을 하기 위해 창의적 발상을 하거나 독창성을 계발하려 하거나 깊은 관념을 집어넣어 어렵게 해석하려 하거나 하는 따위의 작업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두메산골 사람들, 2003
ⓒ 조문호
 두메산골 사람들, 2003
ⓒ 조문호
 두메산골 사람들, 2003
ⓒ 조문호
  그가 인물 사진(portrait)을 주로 찍는 것은 이렇듯 사진 찍는 일을 실존적으로 행위 하는 결과다. 그의 <두메산골 사람들>은 이러한 사진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애초에 그는 환경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강원도 동강에를 갔다.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처음 계획은 동강 댐 건설에 반대하면서 그 일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정선에 머물렀으나, 정작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곳 두메산골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후 그는 그곳에 사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위해 정선에서 6년간 눌러앉아 그곳 사람들을 찍었다. 사회 문제로 출발하였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사람에게로 이었으니, '사람'은 사진가 조문호에게 지남철에 끌리는 쇳가루다.

  그가 사람 자체에 매료당한다는 것은 그의 사진 스타일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널리 하는 내러티브 만들기 같은 것을 그리 중요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원경도 잡고, 중경도 잡고 근경도 잡으면서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연결시켜주는 오브제 같은 것도 집어넣는 것이 대개들 하는 방식인데, 그는 그런 방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오로지 꽂히는 것은 인물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劇)이 아니고 사실(事實)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도리깨질을 하고 있으면 그냥 그 도리깨질 하는 그 자리를 찍어 보여주면 될 일이다. 화전민이 밭을 태우면 그냥 그 불 탄 밭에서 그를 찍을 뿐이다. 방도 부엌도 마루도 모두 있는 그대로다.

  그곳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들 모습만 보여주면 되지, 굳이 사진가가 어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 더 보태거나 뺄 필요도 없고, 순서를 짤 필요도 없다. 기록자로서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자 해서이기도 하고, 사진가의 존재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들 개개를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그의 사진 찍는 행위는 예술이나 진보운동과 같은 어떤 본질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가 조문호가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의 실존적 행위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행위다.

  행위자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런데 사진가 조문호의 그러한 실존 행위는 그를 소유의 존재로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 사람과의 소통과 그 안에서의 능동적 주체성을 찾으면서 사진을 하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래서 일곱 살 박이 아들의 눈물을 가슴에 묻으면서 가난에 몸서리치면서 아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그가 남긴 말 한 마디가 가슴을 후빈다.

'사람을 생각한다면서 가족을 등한시 하는 것에 대한 고뇌가 평생 무겁습니다.'

2. 사람, 세계의 중심

  사람들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것이, 사진가 조문호는 영락없는 예술가다. 그 누구한테도 규제받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쓴 소리를 마구 던지는, 돈은 없지만 '가오'는 있는, 그런 가난한 예술가 말이다.

조문호는 비록 한 평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허기진 뭔가를 그 인사동 사람들을 통해 메웠다. 그 인사동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가 카메라를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한둘씩 세상을 떠나 그 때 그 사람들이 없어져 갈 때 그들과 나눴던사람 냄새를 보존하기 위해 그들을 사진으로 박제해두고 싶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지천으로 깔렸던 그 정(情)과 우애를 담아놓고 싶었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어 기억하게 하고, 가난한 예술인들은 사진에 남아 서로를 기억하도록 하고, 그래서 모두 '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나누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조문호, 민주 항쟁, 1987
ⓒ 조문호
 조문호, 민주 항쟁, 1987
ⓒ 조문호
 조문호, 민주 항쟁, 1987
ⓒ 조문호
 조문호, 민주 항쟁, 1987
ⓒ 조문호
 조문호, 민주 항쟁, 1987
ⓒ 조문호
  사진가 조문호가 사진 평생을 사람에 꽂혀 카메라를 처음 들었던 때부터 사람을 중심으로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80년대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그리 하였듯, 사회 비판에 목소리를 냈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을 치열하게 작업하기도 했고, 사라져 가는 강원도의 산하를 아름답게 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꼭 사람이었다. 그 시절 데모하는 현장을 많은 사진가들이 찍어댔지만, 조문호만큼 사람 한 사람 인물을 슬프면서도 재밌고, 웃기지만 뭉클한 사람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방독면을 쓰고 일에 지쳐 기대어 있는 청소부 아저씨, 매운 최루가스에 콧구멍을 종이로 틀어막은 근엄한 수녀님과 경찰 젊은이,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가슴에 달고 십자가를 한 손에 높이 들며 연신 눈물을 흘리는 명동성당 앞의 '박종철  어머니', 역촌동 가는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 힘껏 박수를 치면서 시위 부대를 격려하는, 이를 앙다문 어떤 아저씨... 그는 민주화운동 현장에서도 보이는 것이 사람밖에 없는 모양이다. 사람에 웃고 울고, 천상 사람 앓이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팔자일 것이다.

  역시나 그랬다. 그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진가 최민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젊었을 때 음악을 좋아해서 고향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마을의 정미소를 개조해 음악 감상실을 차려 음악에 흠뻑 빠져 살다가 부산으로 올라가 남포동에서 국악 주점을 하였다.

그때 사진가 최민식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찍은 최민식의 사진에 조문호는 완전히 빠져들었고, 가산을 거덜 내는 대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목도하는 도리를 최민식으로부터 배웠다. 그렇지만 사진 찍는 스타일은 최민식과는 많이 다르다. 최민식은 대상에 대해 사진가가 개입하지 않는 채 사진을 찍는다. 소위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조문호는 결정적 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상의 움직임을 고정시키고 시선을 렌즈에 고정하도록 찍는다. 눈동자란 마음의 거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자르거나 후보정을 과하게 하는 따위 또한 하지 않는다. 사진에 나오는 지금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나중에는 다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사동 사람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다 그러한 그의 사람과 사진에 대한 관점이 깊게 반영된 것들이다. 천상병, 김영수, 신경림, 김언경, 심우성, 공윤희... 그들이 박힌 저 사진은 그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그토록 웃고 울고 떠들었던 술집, 찻집, 골목, 담벼락, 거리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사람이 있었는데 ...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다. 조문호의 사진은 그 슬픔을 머금는다.

 인사동 사람들, 1985~2013 (신경림)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 1985~2013 (신우성)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 1985~2013 (김언경)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 1985~2013 (무세중)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 1985~2013 (천상병)
ⓒ 조문호
사진가 조문호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사진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대해 날선 비판을 거침없이 하는 어른이다. 2015년도 사진계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제2회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문제 때도 조문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진가라면 그 거대 권력 앞에서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평소에 자신에게 많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원로 사진가 선배들에게조차도 거리낌 없이 비판의 메스를 가했다. 한국의 사진계가 인맥과 학맥에 휘둘려 그 썩고 문드러짐이 극에 달했고, 그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그렇데 된 데에는 당신들 원로 사진가들이 자기 제자들을 챙기기만 하지 옳지 못한 일을 한 데에 대해 따끔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가르치지 못해서였기 때문이라는 일갈이다. 가히 죽비 소리다.

그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진계가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금도를 지켜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이 최민식 사진상이라면 '사람'이 그 사진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적어도 최민식 사진을 폄하하는 자들이 '최민식'이라는 이름 석 자를 더럽히는 짓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 홍보에 혈안이 된 협성재단은 최민식의 이름을 빌어 최민식 정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유명한 사진가에게 상을 주기로 운영위원장과 짜고 부정한 짓을 했음이 드러났다. 사진가란 사람을 존중하고, 작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최민식 정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음에 대해 사진가 조문호는 분노한 것이다. 일부 심사위원은 그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어 사진가에게는 심장과 같은 '눈'을 스스로 파버린 것에 대해 그가 분개한 것이다.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말이다.

3. 따뜻함, 대상과의 거리

조문호 사진이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사진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아마 이구동성으로, '따뜻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청량리 588>은 그 따뜻함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가 조문호의 첫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청량리 588>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곳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면서 작업한 서울시 전농동 홍등가에 대한 기록이다.

사진을 찬찬히 보고 있자면 느낌이 아련해진다. 언젠가 만난 적 있었던 듯한, 그 아련한 우리들의 과거 그 시절에 내 친구였고 내 누이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청량리 588 안에서 사진가 조문호는 직업여성들의 행위를 보지 않았고, 그 시공간 속에 살던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따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사진을 찍히는 그 대상들이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따뜻해진 것은 사진가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따뜻한 사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메워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조문호의 사진에는 겉모습이 찍히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그 마음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 청량리 588, 1985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 청량리 588, 1985
ⓒ 조문호
좋은 사진은 사진가와 대상이 교감에서 나온다는 그 명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이란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이란 순간적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 아닌 사진가와 대상의 교감이 이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이다.

그가 처음에 이곳을 찍으러 갔을 때 그는 사회적 공간성의 의미로 이곳을 찍고자 했다. 그러다가,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서 '사람'을 찾아버렸다. 그래서 그는 소외라는 이념이나 588이라는 공간의 사회사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돈 벌면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의 사진집은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그 여인들의 행위를 사회악으로 규정해서 일소의 대상으로 삼는 정부의 시책에 저항하는 몸짓인 셈이다. 그들은 윤리를 타락시키는 '윤락'녀가 아닐 뿐더러 우리가 구원해줘야 할 '악의 무리'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누이였을 뿐이다. 그것을 사진가 조문호는 사진으로 말을 한 것이다.

 동자동 쪽방 사람들, 2016
ⓒ 조문호
 동자동 쪽방 사람들, 2016
ⓒ 조문호
지금 사진가 조문호는 70 나이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2016년 추석 무렵 그는 홈리스들이 사는 서울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사진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곳은 지금은 다 잃어버린 정(情)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들과 한 식구(食口)가 되었다. 얼마 후 동료 사진가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작은 사진전을 열고, 사진을 한 장씩 그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사진이 잘 나오거나 못 나오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못 나왔다고 사진을 삭제해버리면 그 찍힌 사람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돼버리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이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 누군가로부터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느끼게 되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 그는 '동자동 사람들' 작업이 사진가로서 하는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니 힘이 생기고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그 작은 콤팩트 카메라 들 힘만 있으면 그는 또 어딘가 힘없고 무시당하지만 사람 사는 맛이 있는 그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리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나누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출처: 오마이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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