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조의 정형시이며 2연 8행인 동시를 가사로 하여 쓰인 전형적인 두도막형식, A(aa') B(bc)의 동요이다. 바장조의 음계를 사용하고 8분의 6박자이며 느린 두 박자 계열의 리듬으로 자장가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1절과 2절이 각 16마디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절은 두도막형식인 네 개의 작은 악절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은 악절의 앞부분은 같은 리듬으로 이루어져 총 네 번 반복된다. 각 동기의 두 번째 마디는 한 음을 길게 끄는 것으로 작곡되어 전체 16마디 중 8마디는 길게 끄는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복되는 리듬과 읊조리는 듯한 선율이 가사의 잔잔한 분위기를 나타내 주는 서정적인 노래이다. 주요 3화음만을 사용한 화성진행으로 단순한 리듬과 화성을 가진 곡이다.
한인현(1921∼1969)의 동시 '섬집아기'는 1946년 발간된 동시집 '민들레'에 수록되었고 1950년 '소학생' 4월호에 실려 알려졌다. '소학생' 지는 조선아동문화협회에서 1946년 2월 윤석중, 조풍연 등이 편집하여 창간된 아동 잡지로 주간지로 시작하여 통권 제49호까지 발간하고 1947년 월간지로 바꾸어 1950년 5월호까지 발간되었다. 작곡가 이흥렬(1909∼1980)은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1937년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하였으며 가곡과 동요 400여 곡을 작곡하였다. '섬집아기'는 밝고 희망적인 내용의 동요가 아님에도 집에 혼자 남겨져 잠드는 아기의 모습과 굴 바구니를 다 채우지 못하고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어려운 현실과 엄마의 애틋한 마음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동요곡 1위
'섬집아기'는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누구나 좋아하는 한국동요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원초적이고 애틋한 마음, 그리고 자연친화적인 정서를 담은 이 노래만큼이나 노스탤지어 짙은 향수를 배어나게 하는 노래가 또 있을까. 시인 한인현(1921-69)의 고향은 함경남도 원산이다. 마식령산맥의 봉우리들이 영흥만 쪽으로 늘어져 내린 갈마반도 명사십리이다. 그 원산 갈마반도 명사십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한인현은 원산 광명보통학교를 거쳐 함흥사범학교룰 졸업하고 평교사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한인현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특히 '섬집아기'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한창 일할 나이인 4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는 점이 미쳐 자료정리를 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겠지만, 어찌 됐던 그와 관계했던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섬집아기'는 6.25 전쟁 와중에 탄생했다고 한다. 그 내력을 요약하면, 한인현은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 발령지로 경기도 거남국민학교에 재직하게 된다. 하지만 재직 중에 6.25 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는데, 피난살이 와중에 한인현은 부산 앞바다 조그만 섬에 놀러가게 된다. 그때 한인현은 갈증을 느껴 바닷가 주변을 헤메다가 어느 오두막집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 오두막집에는 잠자는 아기가 있었고 거기서 낯선 방문객의 방문에 굴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달려오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섬집아기'라는 동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느낌의 충만은 한인현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갈마반도와 호도반도, 그리고 영흥만의 흰모래빛과 자갈, 푸른 소나무와 같은 이미지들이 맞닥드러지면서 마침내 '섬집아기'라는 동시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섬집아기'의 작곡은 한인현이 이흥렬(1901-1980)에 부탁하여 이루어졌다. 이흥렬은 고향이 한인현과 같은 원산이고 일본 동경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한인현의 모교인 광명보통학교에 재직 중이었다. 이흥렬은 한인현의 동시 '섬집아기'를 받아본 즉시 곡을 붙여 보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한인현은 은석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9년 글짓기 교사 세미나 도중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향년 4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