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는 편법의 미학이다
가쁜 순간을 보내고 난 후
서린 입김처럼
그렇게 운무가 눈앞을 가린 날
강물은 말없이 넓고
넉넉하고 따뜻하여
나는 그만 울고 말았네
담쟁이 넝쿨 칭칭 담을 에워싸 듯
당신이 내려준 운명의 끈을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부둥켜 안았네
열망이 간절해서 슬프고
세월의 무게가 버거워서 서러운
그 찬란한 눈물방울로
물빛 따라 짙어가는 울창한 숲길에
황백의 밤꽃 빽빽하게 피웠네
밤나무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네 그루…
―곽혜란 시, 강가에 밤꽃 피우고 [전문]
이를테면 은유는 직선거리를 나두고 돌아가는 방법이다. 길을 갈 때 더러운 것을 피해가듯 하고자하는 말을 드러내놓고 하기에는 상대방에 혐오감을 주거나 또는 부끄러운 말을 하기가 쑥스러울 때 하고자하는 말을 돌려서 할 수 있는 언어가 은유 방법의 적임이다.
밤꽃의 의미를 알고 부연해서 시를 썼다면 [강가에 밤꽃 피우고]라는 제목 자체만 보더라도 남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은유법을 도입했기 때문에 자세히 시를 꿰뚫지 않으면 뜻도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어법이다.
가쁜 순간을 보내고 난 후
서린 입김처럼
그렇게 운무가 눈앞을 가린 날
가쁜 순간을 보내고 난 후는 남녀의 관계를 끝낸 후 황홀함과 피곤함이 겹칠 때 젖어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흐름을 적절하게 안개 또는 구름을 개입시켜 능숙한 솜씨로 경험을 노출시킨 공감대의 산물이다. 성을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쓴다면 읽은 독자들도 낯 뜨거운 장면에 당혹해 할 수 있다. 이것을 방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은유법의 매력이다.
[가쁜 순간]은 언어의 짜임새가 적절한 표현의 연결고리이다. 앞에 도입 부분부터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참 쑥스러웠으리라. [가쁜 순간]이 이 시에 안성맞춤이다. 섹스라고 하기도 뭣하지 않은가. 우리말을 갖다 집어넣어도 부자연스럽다. 시인의 타고난 끼라할까. 재능이다.
강물은 말없이 넓고/넉넉하고 따뜻하여/나는 그만 울고 말았네
2연에서는 모든 것을 맡기고 조선여인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고정관념은 지조이다. 습관화 되어버린 타성은 한국의 고전적 인습이다. 영육까지 맡기고 평상심으로 돌아가니 평안함이 믿음으로 영글고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나도록 희열에 감사한다.
담쟁이 넝쿨 칭칭 담을 에워싸 듯
당신이 내려준 운명의 끈을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부둥켜 안았네
3연을 보라. 2연에서 사랑을 바치고 마음까지 다 내준 상태에도 꺼지지 않는 의욕까지 불태우며 담쟁이 넝쿨에 비유하여 매달리는 여자의 바침을 운명적으로 이끌고 가 사랑을 전달하는 의지가 적나라하게 힘을 준다.
열망이 간절해서 슬프고
세월의 무게가 버거워서 서러운
그 찬란한 눈물방울로
사랑은 해도 항상 슬프다. 사랑의 바람은 간절해서 사랑을 줄기차게 해도 못 다한 사랑이 있다. 사랑은 주어도 주어도 부족하고,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모자란다는 말이 있다. 안달하며 살겠끔 만들어진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활활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장작불과 같다. 그래서 항상 힘이 들게 버거운 생활을 한다. 믿음이 강하면 그만큼 사랑은 신뢰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정신의 줄기가 없는 것인가. 사랑에 믿음이 부족하다. 사랑의 무게는 믿음이다. 저울에 달수는 없지만 시인에게서 사랑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물빛 따라 짙어가는 울창한 숲길에
황백의 밤꽃 빽빽하게 피웠네
관계를 나눈 자리는 물이 흐르는 울창한 숲에서 열정으로 이루어졌다. 사랑이 밤나무 숲에 퍼져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관계를 무수히 가졌다면 지나친 것일까. 필자도 꽃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밤꽃이 황백의 꽃이라면 남녀관계의 분비물을 표현하였으리라. 이런 정황을 살펴보건대 시인은 자기의 경험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밤꽃의 상징화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교에서 열정적으로 뜨겁게 뜨겁게 사랑을 나눈 것을, 빽빽하다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것이 상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밤나무/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 네 그루…
[강가에 밤꽃 피우고]의 시는 시인이 여행을 하다가 강변 등에 밤나무 군락지를 보고 꽃의 의미를 알고 대비시켜 착상한 작품으로 보고 싶다. 밤꽃은 남자 생식기의 정액 냄새를 의미한다. 시인은 밤꽃에 관한 이야기를 상징화하고자 은유법을 도입시켜 감추어 두고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도록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 수준 높은 은유의 맛을 적절히 잘 소화해 냈다. 이 시를 쓴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세부적인 쓰고자한 의도의 표현은 모르지만 여성이 성관계를 묘사한 작품을 내놓기는 쉽지가 않았으리라. 필자가 판단한 짧은 평을 대신해서 용기를 찬양한다.
출처: http://blog.daum.net/gawoul/16140352
'♣ 느티나무 쉼터 ♣ > ♥문학은 내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글날 특잡-김소월, 브라질에 가다 (0) | 2016.12.17 |
---|---|
한글의 힘(MBC 한글날 특선다큐) (0) | 2016.12.17 |
가난한 삶/ 법정스님 육성 특강 (0) | 2016.12.07 |
[인터뷰] 꽃 시 220여 편 묶어 낸 나태주 시인과 <별처럼 꽃처럼> (0) | 2016.12.05 |
[스크랩] 법정스님의 남기고 가신 아름다운 말씀 ^^ (0) | 2016.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