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티나무 쉼터 ♣/♥문학은 내친구

아버지의 등을 밀며/손택수(영상시)

봄내지기 2017. 9. 12. 12:47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앗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다섯살 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여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여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자식에게 볼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기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

 

 

 

[아버지의 추억] <20> 시인 손택수

아들과 대중탕 못 간 이유, 이제서야…
40년간 지게일로 시커멓게 죽은 등…병수발 때 드러나

아버지의 추억 

  누가 물으면 여섯 살이라고 해야 한다. 알았지? 어머니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꼭 이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싫어요.’ 목젖까지 올라오는 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네” 하고 시무룩하게 대답을 해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정색을 하고 거듭 확인 절차를 거치곤 하셨다. 너, 몇 살이니? 여섯 살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목욕가방을 챙기셨다. 그러면 옆에서 또랑또랑한 두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듣고 있던 누이동생들이 마구 놀려대기 시작했다. 오빠는 거짓말쟁이래, 거짓말쟁이. 우리 오빠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대요.
  주말마다 한 번씩 목욕탕에 가는 게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머니와 공범이 되는 것도 싫었고, 앙큼한 누이들에게 매번 꿀밤을 먹이면서 싸우는 것도 싫었다. 속으론 여섯 살, 여섯 살 하고 몇 번이나 되새겼는데 잔뜩 긴장한 목에서 내 의지와는 정반대로 저번처럼 갑자기 여덟 살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내 고추를 잡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정말 여섯 살 맞니?’ 하고 묻던 그 돼지 같은 아줌마를 또 만나면 안 되는데, 이런 공포감에 떠는 것도 싫었다. 다른 애들처럼 내놓고 뛰어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하게 목욕탕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온갖 찜부럭이 다 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아버지 탓이야.’ 급기야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따라다닐 수 없을 만큼 커버린 뒤론 하릴없이 혼자서 목욕을 다녀야 했다. 여탕의 악몽에서 해방된 게 나는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행복감도 잠시뿐이었다. 여탕을 벗어난 것까진 좋았는데 남탕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끙끙거리며 때를 밀 때마다 함께 와서 등을 밀어주는 부자(父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매번 등 밀어줄 사람을 탐색해야 하는 내 처지란 것이 생각하면 참 딱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졸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 중에서). 그랬다.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지 않는 이상한 위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꽤 오랫동안 적대감을 부러 숨기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뭔 놈의 소설 시 나부랭이냐 이놈아, 늬 애비가 시장에서 지게질 하고 번 돈이 어떤 돈인데!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오셔서 하는 푸념을 나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술주정을 대놓고 저주하곤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건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걸, 술힘을 빌리지 않곤 지게를 질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노쇠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알코올성 간경화 말기로 아버지가 쓰러져 누웠을 때 나는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보았다. 40년 가까운 지게 짐에 화인처럼 찍힌 자국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자국이었고, 아들에겐 더군다나 어떤 식으로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관장을 하고 아버지가 아기 때의 내게 그랬듯 나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다. 그리곤 아버지를 업고 병원 욕실을 찾았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적막한 등짝이 드러났다. 아버지,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 지게 자국이 제겐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과 같아요.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아버지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삶의 무게들을 비로소 쓰다듬기 시작했다.

▲ 손택수는…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당선돼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등이 있다.

 

출처: 아버지 학교

편집 겸 옮김: meister5959@hanmail.net

 

   이 시는 한국전쟁을 치른 뒤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기까지 이어진 아버지 세대의 삶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엔 싸한 아픔이 밀려온다. 평생 지게를 지고 농사일에 파묻혀 새우등이 되도록 허리 한번 마음껏 펴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홀연히 찾아온 중풍으로 3년 9개월 동안 기어 다니셨던, 육 남매 낳아 기르며 고생하시다가 생의 끝자락을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하셨던 아버지. 몸이 무거우면 하늘로 오르지 못하실까 봐 그러셨을까. 끝내는 누워서 자신의 몸뚱이까지 어린 새끼들에게 다 나눠주고 떠나는 거미처럼 살가죽이 뼈에 맞닿은 뒤에야 벽제 승화원에서 지게 자국을 지우고 하늘로 떠나신 나의 아버지.ㅠㅠ

 

  어린 시절 여름날, 아버지가 집 뒤 울 옆으로 흐르는 도랑 가에 엎드려 누나들이 씻겨드리는 등목을 하실 때면 등과 어깨엔 평생 숙명처럼 짊어져야 했던, 농경사회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지게질로 피부가 혈액순환이 안 돼 마치 검은 참깨를 뿌려놓은 듯이 6남매를 거느린 가장이 진 삶의 무게가 참혹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 나의 아버지,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지 못한 철부지 막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깨닫습니다.

' 내가 아버지의 짐이었다고...' (봄내지기 추가)

 

이 자료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손택수 시인의 여러 자료들을 모아 다시 편집한 것임을 알립니다. 하여 일부 정보의 오류가 있을수 있으니 읽고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편집 겸 옮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