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낭송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해설> 1978년 [문학사상]에 발표하였으며,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수록되어 있다.
정희성은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가 처한 노동 현실을 통해 삶의 궁극적 가치를 묻는다. 정희성은 도시 근로자의 지친 삶과 무거운 비애를 노래한 시를 많이 발표한 시인이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면이 부각되고 있다.
이 시는 물의 이미지와 화자의 세계 인식이 병행되어 전개되고 있다. 강물의 이미지는 곧바로 화자의 세계관을 대변한다.
'강'은 도회를 흐르고 있으며, 시간적 배경은 저물녘이다. 맑게 흐르는 강이 아니라 무겁게 흐르는 강물이다. 이 샛강은 썩어서 흐른다. 그 강물은 스스로 썩어간 것이 아니다. 썩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연중 산업화, 도시화라는 문명적 속성의 부정성을 암시한다. 문명 이전의 청정과 정체성은 산업화에 의해 침해를 받고 오염되며 그 부정성은 누적되어 간다.
물이 흐르듯이 소외 받은 소시민의 삶도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유동적으로 흘러간다. 삶의 애환을 가슴에 가득 안은 채 강물처럼 흘러간다. 하루의 노동이 끝난 뒤 삽을 씻으며 삶의 슬픔 또한 삽을 씻듯 씻어 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씻겨 나가는 아픔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일시적 현상도 아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생활고이며, 쉽사리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애감은 강물처럼 무겁게 드리우는 것이다.
저녁 무렵, 강물이 깊어만 보이는 배경은 애상을 충분히 자아낸다. 달은 어둠과 대조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서러운 정감을 더해 준다. 어두운 강물 위에 달이 뜨듯 생화의 희망을 잃지는 않아야 한다. 삶이 비록 서럽더라도 삶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서러움이다. 가난한 마을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도시 빈민의 서글픈 삶이 애상적 분위기 속에 드러난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이 시는 소외된 도시 노동자의 서글픈 삶이 애상적 분위기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고통을 격앙된 비판의 목소리가 아닌, 절제되고 관조적인 독백으로 일관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인생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이 시의 화자인 중년의 노동자는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현실을 돌아보고 있다. 화자는 생계의 수단인 삽을 강물에 씻으며 삶의 슬픔도 함께 씻어버리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게 씻겨 나가는 것이 아니다. 화자는 고되게 일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썩은 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삶이 비록 서럽더라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도 삶은 지속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서러움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마을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정희성(鄭喜成) : 1945 - >
* 1945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 용산고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 1970년 군제대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 1974년 첫시집 [답청(踏靑)]을 출간하였다.
* 1978년 <새벽이 오기까지는>, <쇠를 치면서>(1978), <이곳에 살기 위하여>(1978) 등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출간하였다.
* 1991년 세번째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펴냈으며,
* 2001년 <시를 찾아서>와 <술꾼>, <첫고백>, <세상이 달라졌다> 등을 비롯해 43편의 신작시가 실려 있는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를 출간했다.
* 2002년 숭문고교 국어교사로 재직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및 대기고등학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시집으로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등이 있으며, 번역서 [몽유왕국을 위한 음악]과 김태형과 공저인 이론서 [한국시의 이해와 감상]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1981)과 시와 시학사상(1997)을 수상했다.
출처:유투브 (카톨릭문화원 아트센터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