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웰컴 투 봄내골 ♣/♥어머니 영전에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읽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봄내지기 2013. 10. 1. 11:05

 

 

♡ 엄마가 하늘로 떠난 뒤 49일(7재, 2013. 11.09)째 되던 날 밤, 엄마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자정이 넘도록 솜씨도 없이 준비하여 다음날 아침 상에 올린 모습입니다. 엄마는 생전에 " 나는 이담에 죽거든 괜히 먹지도 않는 음식 이것 저것 하느라고 애쓰지 말고 막걸리에 설탕 타서 밥이나 말아 놓고 감이나 있으면 하나 올려다오 " 하셨다. 지난날 시어른들 제례 준비하며 겪은 어려움이었을까. 아님 홀로 남은 막내에게 부담지운다고 그리 말하셨을까. 엄마가 하늘로 떠난 뒤 명절이나 추모일이 돌아오면 같은 음식을 준비하여 막걸리랑 올려드린다.  홍시가 없는 계절에는 냉동감을 해동하여 올리거나 곳감으로 대신할 때도 있다. 엄마, 하늘에서 늘 막내를 지켜 봐주세요.^^

 

 

 

 

♡ 자정을 넘겨 음식 준비를 끝내 뒤 내 방에 엎드려 훌쩍이며 엄마에게 편지를 쓰고 나니 날이 환하게 밝았다. 살아계실 때 좀 더 살갑고 따스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 드렸어야 했는데. 지나고 보면 모두 아쉬움뿐. 엄마는 " 에미가 없더라도 끼니 거르지 말고 친구라도 하나 사귀어 외롭게 살지 마라, 형제지간에 폐 끼치지 말고 조카들에게 추하게 보이지 말고. " 하셨다. 그래서 '밥 잘 먹고 꿋꿋하게 살게요' 라고 편지에 써 드렸다.

 

 

♡ 고향 마을 성황당이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 가끔 산에 가서 나물도 뜯고 도토리도 줍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랑 성황당 앞에 앉아 잠시 쉬어 가면 그때마다 엄만 커다란 도토리나무를 바라보고 산신님께 기도를 올리곤 했다. 초등학교 때는 이곳으로 봄 소풍을 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노래 부르며 손수건 돌리기도 하고 벌칙을 받으면 가운데 나가서 율동을 곁들인 노래도 부르고 때론 보물찾기로 상품도 받았다. 어린 시절에도 같은 크기였으니 수백 년 되었지 싶다. 6.25전쟁 중에, 그 후 산불이 몇 번 발생했다는데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성황당을 지키는 나무는 굳건했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며칠 뒤 엄마의 발길이 닿은 성황당을 찾아 나무를 끌어안고 그 옛날 엄마처럼 인사했다.

" 산신님 고맙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이 산에서 나물을 뜯어 팔아 우리 육 남매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 후에도 가끔 이곳을 찾아 나무를 끌어안고

" 나무야 잘 있었어? 고마워, 아프지 말고 잘 지내 도토리 많이 열고~"

하며 인사하곤 한다.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 기형도(1960~89) '엄마 걱정' 중에서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읽고/봄내지기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하늘에 계신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난다. 엄마는 매일 새벽 아침 조반도 드시지 않은 채 전날 밤 채반에 안쳐두었던 산나물과 채소를 커다란 양푼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왕복 6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휴양지인 약수터 주변 하숙집을 찾아다니며 팔아오곤 하셨다. 지난밤 산나물과 채소를 씻고 다듬고 때론 데치고 헹궈 다시 물기를 짜고 털어 상품으로 만들기까지 엄마는 밤이 이슥해서야 잠자리에 들어 겨우 한숨이나 눈을 붙이셨을까.

 

  새벽 아침, 빈속에 잰걸음으로 약수터를 휘달려 돌아와야 했던 우리 엄마, 얼마나 허기졌을까! 약수터에서 나물을 팔고 오시면 잠시 앉아 숨돌릴 새도 없이 가족들의 아침상을 차린 뒤 국 말아 한 술 후루루 빈속을 채우곤 이내 또다시 산으로 밭으로 달려가야 했던 우리 엄마. 요즘처럼 전기밥솥이 있다면 타이머 스위치 하나 맞춰놓고 마음 편히 갔다 오시련만.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니 엄마가 얼마나 쫓기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고된 생활을 이어가셨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6.25 전쟁의 상흔이 널브러지고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던 50년대의 참혹했던 시절,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내야만 했던 고달프고 가난했던 6~70년대까지, 아마 '어미'가 아니었으면 엄마는 그 힘든 과정을 매일 아침 이겨낼 수 없었지 싶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을 읽으면 화자인 기형도는 시장에 간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미에 대한 본능적인 어린 화자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끈은 '이미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어린 기형도는 학교에서 돌아와 방에서 숙제하며 엄마를 기다려 보지만, 엄마는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 왜 엄마는 빨리 돌아오지 않는 걸까?  장에 나간 엄마는 집에 돌아와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어린 자식 생각에 마음은 더 급하고 타들어가지 싶다. 하지만 열무를 다 팔아야 하는 엄마, 열무를 다 팔아야 어린것에게 학용품 하나라도 사 줄 수 있는 엄마, 그래서 열무를 다 팔아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엄마. 나는 <엄마 생각>에서 이 그림이 그려질 때면 하늘에 계신 엄마 생각에 목에 통증을 느끼며 울컥 눈물이 솟는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나물을 빨리 팔아야 집에 돌아가서 식구들 아침밥을 차려줄 텐데. 나물을 조금이라도 팔아야 우리 애들 학용품도 사고 기성회비라도 낼 텐데, 하는 간절함과 쫓기는 마음에 때론 힘들게 뜯어온 나물을 헐값에 팔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의 그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을 생각하면 지난날 엄마에게 짐을 지운 죄가 너무 큰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저리다. 이처럼 <엄마 걱정>을 읽을 때면 어린 화자의 마음이 가슴으로 흐르며 어둡고 힘든 세월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육 남매를 위해 밤낮없이 헌신하셨던 엄마의 모습을 오롯이 떠오르게 한다. 

 

  시인은 왜 해를 '시든지 오래'라고 했을까? 왜, 해가 '진다'라는 표현을 버리고 굳이 '시든다'라고 말했을까? 아마 그것은 '시든다'는 시적 언어가 갖는 이미지화, 즉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가는 화자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그리려고 시인만의 언어를 빌렸지 싶다.

  '시든지 오래'라는 시구를 읽으며 문득 초등학교 1학년 때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낮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른들은 모두 농사일로 밖에 나가시고 텅 빈 집엔 개와 닭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혼자 방안에서 크레파스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집엔 나 홀로 남아 있었다. 늘 익숙한 일인데도 그날은 왠지 서럽고 무서움에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그때 마침 밖에서 돌아오던 큰누나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우리 막내 혼자 있었어~ " 하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나를 안아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시 <엄마 걱정>에서 화자는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천천히 숙제하며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가는 어린 화자의 안쓰러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시든다'라는 것은 살아있는 식물이 물이 부족해 말라갈 때 쓰는 진행형 자동사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자신의 심리상태를 '시든다' 한 단어로 회화적 응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엄마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며 이 시의 백미다.

 

 또 시 <엄마 걱정>에서 화자는 '찬밥처럼'이라고 표현했다. 찬밥은 어떤 의미인가? 따끈하고 말랑한 밥은 엄마의 관심이다. 밥이 식어 찬밥이 되어간다는 것은 관심에서 차츰 멀어진다는 이미지다. 화자가 엄마를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곧 따스한 밥이다. 처음엔 '숙제하는 동안 엄마가 오시겠지'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지 싶다. 그런데 해가 저물어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는 즐거움은 서서히 걱정(두려움)으로 변한다. 어찌 보면 속 좁은 철부지의 원망 섞인 투정처럼 보이지만, 나는 엄마를 기다리는데 엄만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어린 화자의 엄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찬밥'이라는 심상적 이미지로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화자는 해가 지기까지 무시로 방문을 열고 문틈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엄마가 오시나' 내다보았지 싶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 해는 점차 기울어지고 어스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자 어린것을 집에 두고 열무를 팔러 간 어미의 마음은 더 무거웠지 싶다. 열무를 다 팔아야 한다, 는 조급한 마음에 애가 마르고 어둠이 깔린 들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엄마의 종종걸음은 더디기만 하여 천근만근이었지 싶다.

 

  이처럼 기형도 시인이 '방과 후 엄마를 기다리는 자신의 마음'을 시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시인 기형도뿐만 아니라 헐벗고 가난했던 당시 도시 근교의 농촌에서 살아가는 엄마들의 힘든 일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화자가 엄마를 기다리(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시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고귀한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엄마 걱정'이 곧 '어머니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이라는 시인의 애틋한 마음을 그려볼 수 있다.

 

이 감상문은 나름 기형도 시인과 비슷한 추억이 있어 끄적여 봤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embed/EL1AQQU0MpY (꽃구경가요/장사익)

 

  아들 등에 엎혀 마을을 지나 산 속으로 들어가는 어머니.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을 고려장하려고 집을 나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심에도 아들이 혼자 집으로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 봐 걱정이 되어 솔잎을 따서 가는 길마다뿌려주고 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부디 천년이고 만년이고 기다려주세요. 꼭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